40여년 '대학 물'을 마셔온 내가 느낀 것은?
로스쿨, 의대만 북적, 기초과학은 거저 생기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투자, 육성해야
나는 27년 간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이제 한 사람의 시민, 연구자로 돌아간다. 대학에서 강의한 기간을 합하면 30년이 넘는다. 학부부터 박사학위 이수까지 17년 정도를 보냈으니, 그 기간 동안의 교사, 군 복무, 재야 연구자 생활 등을 빼더라도 40년 이상 대학에서 보냈다. 『시험능력주의』라는 책 서문에서도 썼지만, 나는 한국에서 제일 큰 대학에서 학생 시절을 보냈고, 서울에서 가장 작은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한국 대학과 고등교육, 학문사회, 학벌. 학력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날카롭게 느꼈다. 청년 때부터 한국 학문의 독자성과 진보성을 제창했기 때문에 미국 유학 보수파가 주류인 사회과학계에서 거의 주변적 존재로 겨우 살아남았다,
지난 40여 년 배우고 가르치며 느낀 참담한 대학 현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의 중요 대학들이 여러 외국의 대학평가에서 몇 등인지를 알리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곧 국내 신문사도 국내 대학평가에 기초해서 대학 서열의 변동을 보도할 것이다. 나는 이런 대학 순위가 한국 고등교육의 질이나 학문 발전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본다. 한국의 대학은 분명히 과거 개발독재 시기에 비한다면 교육 내실도 크게 향상되었고, 교수들의 연구 업적도 크게 향상되었다. 국제 수준의 학회에서 한국 학자들의 역할도 두드러지고, 특정 분야의 수준은 세계적인 반열에 오르기도 했고, 또 그런 세계적 반열에 오른 학자들을 보유한 대학도 있다. 그러나 내가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한국 대학의 일반적인 현실은 매우 참담하다. 사립대학의 파행, 특히 각종 사학비리는 70년째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데, 교육부는 이런 문제에 손을 놓고 있으며, 교수들은 거의 논문 생산기계가 되었으며, 비정규직 교수의 처지는 처참하고, 학문적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은 로스쿨로 가고, 과거나 현재나 학생들은 입학 이후 학문보다는 취업준비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 중 내가 가장 심각하게 보는 것은 미국과 유럽의 대학과 달리 한국의 대학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학부 중심 대학, 즉 학벌 간판을 발급하는 곳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대학 서열은 학문이나 교육의 수준과는 거의 무관하고, 졸업장 간판을 중시하는 학생, 학부모들은 대학 교육의 질에 관심이 없다. 이 ‘업계’에 있는 우리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서울대나 상위권 대학의 인문사회계 박사과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동화되어 있다. ‘학력 세탁’을 위해서나, 학문적 열정이 있어 이들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타 대학 출신들도 있지만, 학문적 열정을 가진 자기 대학 학부 출신자들은 거의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캠퍼스에 번듯한 건물이 올라가고, 수능성적이 최고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오고, 교수들은 열심히 논문을 생산하니, 대학은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인문사회계 학생들의 상당수는 로스쿨을 준비하고, 공대 자연계 학생들은 반수를 해서 의대 진학을 하려 한다. 학문은 공적인 것인데, 과거나 현재나 한국에서 대학과 학문은 거의 지위와 돈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명문대 간판을 얻기 위해 아이들은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학교와 학원을 전전해야 하고, 학부모들은 27조 원의 학비를 학원과 과외 공부에 지출한다. 과연 로스쿨과 의대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다수인 인문사회계와 자연계 기초학문 학과나 과목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왜 그런 학생들을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서울대 학부를 유지해야 할까?
기초연구는 선진국에서 수입, 한국은 학부 교육만 담당?
이론물리학의 국가적 석학이 한국 대학에서 퇴임하고 연구할 곳이 없어서 중국으로 간다고 한다. 중국은 한국 퇴임 교수들에게 상당한 연봉을 제안하면서 이들 우수한 학자들을 끌어들인다. 과연 중국은 이런 비용을 거저 지출할까? 이필호 기초과학학회 협의체 회장은 "최근 발생한 연구비 삭감, 2028년 수능 개편안, 의대 증원 등은 기초과학 교육과 연구 생태계의 저변을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기초과학 분야에 우수한 인재가 없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앞으로도 한국 기업들은 반도체, 조선, 자동차 산업이 지금까지 수준의 기술력만으로 버틸 수 있을까? 로스쿨과 의대가 한국을 먹여 살릴까? 성형외과나 피부과가 세계 첨단이니 의료산업에 한국의 미래가 있나? 각종 사회갈등, 저출생과 자살, 수도권 집중 등 사회붕괴 현상 모두 최고로 우수한 변호사와 판검사들이 해결할 수 있나?
법학과 의학은 세상의 미래를 밝히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을 가르쳐주는 학문이 아니다. 법학은 갈등을 처리하는 학문이지 사회 갈등의 확산을 막는 데는 답을 줄 수 없으며, 의학은 병이 생긴 후에 치료를 학문이지 병을 생기지 않도록 하는 학문이 아니다. 이 두 학문 역시 철학 사회학 심리학 정신과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의 기초가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 두 학문은 응용학문이며, 그 상당 부분은 당장의 문제해결에 사용되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수준 높은 ‘스킬’을 익히기 위해 그 사회의 가장 우수한 청년들이 몰려든다면, 사회와 경제의 토대는 누가 만들어 낼 것이며, 그 토대 구축에 필요한 설계, 그리고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학문은 어디서 만들어질 수 있을까?
과연 선진국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축적한 자신의 기초과학 지식, 그것에 기초한 최첨단의 기술을 후발국에게 무상으로 이전해 주나? 그리고 선진국의 지식 인프라는 세계화 시대에 인류의 공유자산으로 존재하는가? 한국 기업들은 그런 최첨단의 기초과학 기술과 그것을 가진 과학자들을 그냥 수입하거나 초빙할 수 있나? 왜 미국 정부는 이런 몇 제약회사의 백신 개발에 그렇게 많은 예산을 지출했나?
K-문화, K-영화, 한류의 세계화가 있지 않으냐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학문보다는 문화가 한국의 경쟁력인 점도 맞다. 그런데 문화산업이 어느 정도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으며, 문화산업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지탱해 줄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투자하고 키워야 한다
핵물리학처럼 전쟁 수행을 위한 첨단 무기개발에 필요한 지식은 언제나 국가의 것이었으며, 기업의 판매 시장은 온 세계이지만, 그 생산품의 부가기치를 높이는 핵심 기술은 언제나 국가가 막대한 투자를 해서 개발한 것이지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 스스로 개발한 경우가 거의 없다. 한국의 경제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법과 제도, 의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지식은 수입해서 사용할 수 없다. 동아시아와 남북한 평화를 보장받으려면 우선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을 잘 알아야 하며, 남아시아 국가들이나 중동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데, 그것은 미국과 유럽 학자들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관점, 특히 한국의 보통 시민의 생존과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적으로 정립해야 하는 것이다.
학문은 모든 것의 인프라이며, 그 위에서 기술개발도 교육도 언론도 영화산업도 가능하다. 그래서 대학과 학문은 공적인 것이며, 학자는 공적인 자산이다. 당장의 효용이 없는 기초학문에 열정을 가진 사람은 국가와 사회가 잘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여기서 제국을 경영했던 국가와 식민지였던 국가 간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과거 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에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하다.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원리를 탐구하는 기본지식이 필요 없으며, 그들에게는 먹을거리만 던져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별의 장벽을 뚫고 제국주의 본국의 대학에 진학한 식민지 엘리트들은 제국주의 통치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1945년 이후 신생 독립국들은 모두 대학을 설립하여 국가운영에 필요한 엘리트를 육성하려 했다. 그 후 70년 이상이 지난 세계 지식의 생산과 재생산, 엘리트 생산과 재생산의 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국개발연구원 박사 58명 중 54명이 미국 박사인 현실
이제 제국주의, 냉전 시대는 지났다. 과연 2차 대전 후 독립국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서도 자주성과 독자성을 확보했을까? 『궁정전투의 국제화』를 쓴 이브 드잘레이, 브라이언트 가스는 남미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에서 미국 시카고학파의 지배를 드러낸다. 90년대 이후 남미 각 나라의 경제정책은 모두 시카고 대학 동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발한다. 미국 유명대학 동문들이 각국 대표로 다보스 포럼이나 OECD 차원의 각종 경제회의에서 거의 유사한 정책적 대안을 내놓기 때문에, 세계 지식생태계를 지배하는 그들은 국적은 다르지만 시장 자본주의 외의 모든 정책적 대안이 등장하는 것을 막으면서 국제 금융자본의 활동을 지원한다.
전 세계 모든 신생 독립국처럼 한국에서도 한국전쟁 후 수 많은 대학이 설립되었고, 그 중 몇 분야는 상당한 수준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남미 국가들처럼 한국의 대학과 학문도 미국유학파들의 시험장의 기능을 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의 ‘신학’으로 불리는 경제학이 그렇다. 전원이 미국 박사인 서울대 경제학과는 학생들에게 어떤 교재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개발독재 시기 경제발전의 이론 정책적 기반의 역할을 충실히 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위원급 박사 58명 중 54명은 미국 박사이며, 4명은 영국 등 기타 지역 출신이고 한국 박사는 한 명도 없다. 그런데 개발독재 시기를 벗어난 지도 한참 지난 지금 미국의 최신 경제학 이론으로 무장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자들은 한국 경제에 무슨 대안을 제공해 주고 있을까? 왜 한국의 최상위권 대학에 경제학과가 있어야 할까? 경제학자들은 경제학과가 경영학과에 밀린다고 한탄하기 전에 이 점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필수적인 문학, 역사 등 일부 인문학에서만 국내 대학의 박사 학위가 여전히 경쟁력을 갖겠지만 그것도 지금처럼 이들 대학의 박사과정이 공동화되면, 그 우위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마 이렇게 10년이 지나면 아마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학도 영어로 쓴 논문이 국내 논문을 압도할 것이며, 외국에서 수학한 학자들이 한국의 교수 자리를 다 차지할지 모른다. 그 때가 되면 한국의 정부나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초 기술, 사회가 필요로 하는 현실 분석과 정책 처방은 모두 인공지능(AI)에 맡기고, 대학의 사망선고를 선포하자는 주장이 지금보다 더 힘을 얻을지 모른다.
고등교육의 독자성 부재는 국가 미래의 부재
이것이 ‘주변부’ 국가의 아주 작은 대학에서 겨우 밥을 먹으면서 평생 학문활동을 해온 내가 본 지금 한국의 대학, 학문의 모습이다. 제대로 된 학문공동체도 만들지 못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문적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교수직에서 물러가는 한 ‘원주민 학자’의 넋두리다. 내 진단과 전망이 제발 틀린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학문은 보편성을 갖고 있으나, 대학은 국적성을 갖는다. 국가의 체계적이고 정밀한 대학정책과 학문 정책이 없고, 예산이 고등교육에 제대로 투여되지 않는 것은 고위 관료나 정치세력이 국가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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