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년, 주류언론 '명단 감추기' 여전
추모행사서 희생자들 이름 불러도 보도 안해
911·세월호·서해훼리 사망자명단 모두 공개
언론 스스로 제정한 '재난보도준칙' 어쩔 건가
'희생자 명예보호' 아닌 '다른 무엇' 감추나
사회적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여부 공론화해야
이태원 참사 1년을 맞아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들이 지난 2주 동안을 집중추모기간으로 정하고 분향소를 설치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29일에는 서울시청 앞에서 추모행사를 열고 유가족들은 터져 나오는 눈물을 힘겹게 참으며 희생자들을 기억하겠노라는 편지를 읽었다.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뒤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모두가 그 이름을 기억해달라는 뜻이었다.
주류 언론들은 집중추모기간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몇가지 기사들을 보도했다. 끝나지 않은 유가족들의 고통을 전하고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면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를 비판한 언론(한겨레·경향 등)이 있는가 하면, 진상규명 작업을 정쟁이라고 이름 붙여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참사 원인이 ‘우측통행을 안했기 때문’이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언론(조선일보 등)도 있었다.
그러나 1년 전처럼 참사 희생자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은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이 마찬가지였다. 유가족들이 29일 열린 추모행사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가며 ‘기억하겠다’고 했는데도, 주류 언론들은 그 이름들을 지면과 방송에 올리지 않았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참사’라는 지적, 딱 거기까지였다. 주류 언론들은 여전히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 명단을 공개하는 것이 ‘2차 가해’요 ‘패륜’이라고 보는 것일까?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해 참사 당시 윤석열 정부는 희생자의 신상 등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거의 모든 주류 언론들은 정부가 주문한대로 희생자 이름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고 정부는 이름도 영정사진도 없는 기괴한 합동 분향소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조문하도록 했다. 마치 희생자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참사를 당했으니 이름을 감추는 것이 그들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는 식이었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희생자 명단 일부를 공개하자 주류 언론들은 ‘갑자기’ 그것이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2차 가해’요 심지어 ‘패륜’이라고까지 비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자기 자녀가 참사의 희생자가 되었는지, 주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헤매고 다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 잘못 없는 내 아이가 순식간에 죽음을 당했는데 왜 이름을 감춰야 했는지 유가족들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들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추모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은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다.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곳, ‘그라운드 제로’에 있는 9.11 박물관에는 올해도 희생자의 유족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열고 희생자의 이름을 불렀다. 희생자 유가족은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9년 전 무능한 정부가 구해내지 못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우리는 유가족들과 함께 언론이 공개한 이름을 부르며 기억하고 추모했다. 1993년 삼풍백화점 사고 때에도,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에도 언론은 희생자의 이름을 공개해 추모했다. 30년 전 역시 정부의 무능과 무리한 항해로 희생된 서해 훼리호 사고의 희생자 290명의 이름도 현장의 위령탑에 그대로 남아있다.
이태원 참사 직후 한국 언론이 ‘2차 가해’라며 이름을 감출 때 오히려 여러 외신들은 희생자들의 이름과 사연을 공개하고 보도했다. 사회적 참사로 인한 희생자의 이름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불러주는 것이 추모이기 때문이다.
언론 재난보도준칙에 "재난피해자 명단 신속공개해야"
홍원식 동덕여대 교수는 지난 10월 18일자 한겨레 신문 칼럼에서 “다른 나라 대부분의 언론에서 사고 희생자의 명단이 공개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면서 “과연 우리 언론이 그 이름을 그렇게 꼭꼭 숨겨놓으며 보호했던 것이 정말 희생자의 명예와 존엄을 위한 것이었는지 다시 묻게 된다"고 했다. 홍 교수는 또 "혹시나 그 이름이 언론에서 보호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위해 외면되고 감춰진 것은 아닌지 따져 봐야 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한국기자협회, 한국방송협회,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신문협회, 한국신문윤리위원회가 2014년 공동으로 제정한 ‘재난보도준칙’을 보면, 제11조(공적 정보의 취급)에 “피해규모나 피해자 명단, 사고 원인과 수사상황 등 중요한 정보에 관한 보도는 책임있는 재난관리당국이나 관련기관의 공식 발표에 따르되, 공식 발표의 진위와 정확성에 대해서도 최대한 검증해야 한다”면서 “공식 발표가 늦어지거나 발표 내용이 의심스러울 때는 자체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보도하되 정확성과 객관성을 최대한 검증하고자 자체 취재임을 밝혀야 한다”고 했다.
요약하면 ‘피해자 명단’을 당국·기관의 공식 발표를 받아 보도하고, 만약 공식 발표가 늦어지면 자체적으로 취재해서 밝히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이태원 참사 때부터 그것은 왜 갑자기 ‘2차 가해’가 되고 ‘패륜’이 되었을까?
시민언론 민들레는 지난해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공개한 뒤 정부와 일부 언론으로부터 ‘2차 가해’니 ‘패륜’으로 매도당하고 경찰의 압수수색까지 받았다. 그 이후 몇몇 ‘비주류’ 언론들이 희생자 이름을 공개했고, 올해 수천 명이 모인 1주년 추모행사에서도 희생자들 이름이 큰 목소리로 불리워졌다. 그런데도 주류 언론들은 왜 여전히 희생자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가? 이름을 끝내 감추어두면 희생자의 명예가 보호되고 그것이 취재보도 윤리에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일까? 시민언론 민들레처럼 고소고발을 당할 것을 두려워일까?
주류 언론들이 여전히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을 방송 화면과 지면에서 감춰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적어도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인지에 관한 공론의 장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해 ‘갑자기’ 사회적 참사 희생자 명단공개를 ‘2차 가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한 뒤 지금까지 언론은 단 한번도 이를 따져보거나 공론화하지 않았다.
사회적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 여부 공론화한다면
언론이 공론의 장을 연다면, 시민들과 함께 이런 문제들을 묻고 토론해 주기 바란다. 첫째, 사회적 참사의 경우 희생자 이름을 감추는 것이 반드시 그들의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명예를 지키는 방법인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이름을 감춤으로써 오히려 죄 없는 그들의 죽음을 모독한 것은 아닌가? 둘째, 희생자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명예를 지키는 것과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름을 공개하는 것은 무엇이 더 중요한가? 셋째, 언론이 이름을 공개해 유가족에게 신속히 고인의 생존 여부와 주검을 확인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가? 넷째, 정부와 정치권이 희생자 이름을 감추려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지 않았는가? 다섯째, 피해자 명단을 신속하고 정확히 보도하라고 언론 스스로 제정한 재난보도준칙은 어찌할 것인가? 여섯째, 정부가 진정한 사과와 재발 방지대책을 내놓는 데에 최선을 다했는지 그리고 참사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진정성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언론은 성실히 취재하고 보도했는가? 일곱째,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진정한 추모와 기억은 가능한가?
참사는 막아야 하지만 또 벌어질 수 있다. 정부가 무능·무책임할 때 우리는 사회적 참사를 겪었다. 앞으로 또 이런 사회적 참사가 터진다면,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죄 없이 희생된다면 그때 언론은 또 어쩔 것인가? 또 희생자 명단을 감추고 이름도, 영정도 없는 분향소와 추모관의 모습만 국민에게 보여줄 것인가? 여전히 희생자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주류 언론들은 이런 고민을 하기에 게으른 것인지, 아니면 비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