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사람-자연이 한 생명처럼 사는 세상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화산 중 하나인 하와이의 킬라우에아가 3개월간의 휴식 뒤에 얼마 전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화산이 간헐적으로 분출하듯, 인간 사회에도 그런 시기들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1980년에 이어 1987년은 또 하나의 분출기였다. 그 계기는 (박정희의 18년 군사 독재를 뒤이은) 전두환 신군부 독재가 헌법 개정을 거부한 것. 그래서 1987년 6월 시민항쟁의 구호 역시 ‘호헌철폐, 독재타도’였다.
더 이상 대통령을 어용 대의원들이 장충체육관 같은 데서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대통령을 뽑아 나라 전체를 ‘민주화’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상식적이고도 초보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학생, 노동자, 농민, 빈민, 지식인들이 ‘목숨’까지 걸어야 했다.
목숨 걸고 부르짖었던 ‘독재타도’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를 보면, 1987년 1월 중순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에 연행돼 물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 일이 나온다. 이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창의적 거짓말을 꾸민다. 시국이 요동을 치자 전두환은 ‘4·13 호헌선언’을 했고, 전 국민적 저항이 거세졌다. 1987년 6·10항쟁 하루 전날 연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전투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한 달 가까이 의식불명 후 사망했다. 영화 속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은폐, 왜곡, 조작하려던 경찰, 보안사, 안기부 등 권력 진영의 위선과 거짓이 드러난다. 반면, 양심적인 검사, 교도관, 기자, 종교인 등 민주 진영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이 돋보인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1961년부터 1987년까지 꼬박 한 세대 간의 ‘군부독재’가 종식될 뻔했다. 그러나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어부지리’에 성공, 민주화는 지연됐다. 전두환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군복을 벗은 민간인(?) 노태우가 36.6%를 얻어 민정당(민주정의!)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 김영삼(통일민주당)은 28%, 김대중(평화민주당)은 27%를 득표했다. 양김씨가 단일화했다면 단연코 승리했을 게임! 그러나 동일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길에 나섰건만 두 사람(집단) 사이 철학의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19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0년 초에 이른바 ‘3당 합당’ 사건이 있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김영삼의 일갈(실은 권력중독!)이 그 배경이다. 1990년 1월 22일에 전격 발표된 ‘3당 합당’은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하나가 돼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출범시킨 것.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물론, 본격적인 민주화를 열망하던 민초들은 극도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렇게 ‘민주화’는 지연되고 또 지연되어 마침내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2002년 12월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결코 단선적으로 혹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크게 보아,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조금씩 움직일 뿐(파동), 그 어느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 2012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이 그 후퇴 국면이다. 그리고 다시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고양되는 듯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2022년 5월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했다.
전진 후퇴 거듭하는 민주주의 기본 동력은 자본주의
2023년 6월의 현실은 대략난감이다. 그렇다면 36년 전 1987년 6·10항쟁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이를 감히 이렇게 본다. 1987년 6·10항쟁은, 한편으로 그것은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아래로부터의’ 운동 중 일부지만, 다른 편으로 그것은 (광주항쟁과 마찬가지로) 군부독재(자본주의의 권위적 형태) 타도의 형태를 띰으로써 자본주의의 자유적 형태로의 전환에 기여하였다.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가 구현되었지만, 그 아래엔 여전히 자본주의가 기본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는 그 사회적 세력관계에 따라 (노동자와 시민운동의 성숙과 성장에 따라) 겉모습을 바꾸는데, 권위적 형태에서 자유적 형태로, 복지적 형태에서 생태적 형태로 전진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987년 6·10항쟁 및 7~9월의 ‘노동자대투쟁’과 그 이후 전노협 및 민주노총 출범과 민주노동당으로 상징되는 진보정당 창당 등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자본주의는 유연하게 형태 전환을 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아는 ‘민주화’다. 결국, 자본주의의 자유적 형태가 곧 그간 대한민국 민주화의 내용이었다. 그에 대한 자본의 역공이 1997년 이후 ‘IMF 체제’ 및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나타났다. 그 뒤 사회운동이 복지화나 생태화의 방향으로 압력을 거세게 가하자 이제 한국 자본주의는 겉으로는 그런 변화를 수용하는 척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개량의 물적 토대가 부족하기에) 과거의 권위적 형태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띤다. 이것이 곧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권의 본질이다.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면 정말 걱정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전진을 위해선 (그간 민주당이 어설프게 애써왔듯) 자본주의의 복지적 내지 생태적 전환에 갇히고 말 일이 아니라 ‘자본(관계)’ 자체를 과감히 넘어서는 ‘탈자본’의 새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그것이 멀리는 동학혁명과 빨치산투쟁, 가까이는 광주항쟁과 6·10항쟁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실천적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탈자본’의 새 세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의 생명처럼 사는 세상이다. 생산을 하되 자연의 복원력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그리고 세상 사람끼리 억압과 착취를 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일하는 것, 소비를 하되 상품과 화폐관계를 넘어 인간적 필요 충족(주거, 육아, 교육, 의료, 노후)을 최우선시하면서도 (초)미세먼지나 미세플라스틱, 공해와 오염을 유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는 것, 그리하여 돈이 돈을 버는 (가치가 가치를 낳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돕고 자연에 감사하며 사는 세상이다. 미친 듯이 돈만 벌려 하거나 미친 듯 권력을 추구하는 ‘중독 시스템’에게 과감하게 ‘NO!’라 선언하고, 그 대신 삶의 질과 삶의 아름다움을 위한 ‘건강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이것이 ‘탈자본’의 새 세상이다. 나는 이렇게 자본관계를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부디 제발>이란 책에서 ‘생태 민주주의’라 했다.
포기 않고 냉소에 빠지지 않는 당신이 마지막 희망
그렇다면 ‘생태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일부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의 사회경제 시스템 전반이 일종의 ‘집단자살체제’로 달려가고 있음을 더 이상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대면하는 노력이다. ‘가짜뉴스’나 ‘엉터리 대안’으로 자기기만을 일삼는 언론이나 대학, 종교와 정당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70년 전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신민은 확신에 찬 나치나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사이의 구분, 진실과 허위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을이나 지역 단위에서 생태 민주주의적 실천과 실험(생태마을, 에너지전환마을, 공동육아, 대안학교, 인문학 모임, 마을복지, 상부상조 공동체, 협동조합, 커먼즈 운동 등)을 더욱 왕성하게 해나가면서도 그런 발상이 전 시스템 차원으로 확산되도록 사회적 소통이나 연대를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 ‘나부터’ 출발하되, ‘더불어’ 변하기 시작하면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지고 여론이 형성된다. 여론이 달라지면 언론이 주목한다. 언론이 주목하면 정치가나 행정가들이 관심을 갖는다.
셋째,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엉터리 정치가나 행정가들을 과감히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선거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시장이나 군수, 대통령 선거는 결선 투표제를 도입, 압도적 지지를 얻는 이가 대표로 선출되게 하며(결선 투표제),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은 구역별로 개인을 뽑는 게 아니라 정당 투표를 하여 정당별 득표에 비례해 대표를 선발한다(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나아가 읍, 면 차원에서도 풀뿌리 민주주의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읍면 지방자치제). 민주·진보 진영은 평소엔 치열한 내부 토론을, 선거에서는 대담한 상호 연대를 해야 전망이 있다.
이 모든 걸 위해서라도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처럼 대한민국에도 또다시 사회적 대폭발이 필요할지 모른다. 물론, 그러한 사회적 화산 분출이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생태 민주주의’에 대한 치밀한 공부와 토론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대학 입시나 취업 고시 외에 공부의 절실함을 모르는 사회엔 아무 희망이 없다. 반면, 그 어떤 난관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또 섣부른 냉소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한,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은 살아 있을지 모른다. 리베카 솔닛이 <오웰의 장미>에 인용한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처럼 “가능성을 알아보고 경고를 하기 위해 앞을 내다보려 애쓰는 행위 자체가 희망”이다. 바로 당신이 그 희망의 출발점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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