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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해 안동대 명예교수. 전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장
임재해 안동대 명예교수. 전 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장

“오월의 정신을, 오늘의 정의로!” 올해 5.18민중항쟁 기념식 주제이다.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43주년 기념행사의 주제를 밝히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희생했던 5.18정신을 이어받아 정의로운 오늘을 만들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해석했다. 5.18정신을 오늘의 정의로 만들어가자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한 사회라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가 결핍된 시대일수록 정의에 대한 요구가 커지기 때문이다.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주목받을 때는 박근혜 정권 시절이었다. 친박인사들이 득세하고 문고리 3인방이 대통령을 좌우하며, 최순실 국정농단이 문제되던 시기이다. ‘친박무죄 반박유죄’란 말이 나돌 만큼 사법 정의도 신뢰를 잃었다. 박정희 군부독재를 미화하려고 국사교과서를 국정화 하는 역사왜곡까지 밀어붙이던 암흑기였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정의에 대한 갈망이 컸다. 결국 시민들의 촛불시위로 박근혜는 탄핵되고 18개 범죄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수감되었다. 정의를 짓밟은 데 따른 응분의 징벌이다.

친윤의 면죄부 수사와 반윤의 무차별 수사

지금 새삼스레 정의가 소환되는 것도 정의가 위기에 처한 까닭이다. 윤석열 정권은 불과 1년 만에 박근혜 정권 막바지를 뺨치는 위기 국면에 이르렀다. 친박들처럼 윤핵관들이 설치는 것은 물론, 문고리 3인방처럼 안보실 차장이 대통령실을 좌우하고, 최순실처럼 천공의 국정농단이 논란거리이다. ‘친박무죄 반박유죄’와 같이 지금은 ‘친윤무죄 반윤유죄’란 말이 공공연하다. 조용한 내조를 공언했던 김건희 박사는 국정개입에 본격적으로 나서서 권력서열 1위 행세를 할 뿐 아니라, 대통령도 대놓고 국정파트너라고 함으로써 ‘윤·김 공동정부’로 일컬어지는 괴상한 정국이 조성되었다.

제왕적 대통령 행세를 하는 윤석열 정부의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정의가 빛을 잃게 마련이다. 여당과 검찰조직이 대통령 휘하의 직속기관처럼 움직이면서, 수사 정의와 사법 정의는 물론 인사 정의, 사회 정의, 경제 정의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우선 법 적용부터 공정해야 한다. 법은 모든 국민에게 같은 기준과 원칙으로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가장 명백하고 가장 원칙적인 사법 정의만 제대로 이루어져도 우리 사회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친윤무죄 반윤유죄’라는 말이 설득력을 지닐 만큼 사법 정의 이전에 수사 정의부터 설자리를 잃었다. 형평성의 수사 원칙마저 무너진 탓이다. 친윤수사가 착수조차 못하는 성역으로 존재하는 반면, 반윤수사는 기소를 전제로 한 기우제식 강제수사가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친윤의 면죄부 수사와 반윤의 무차별 수사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윤 대통령은 총장 시절 ‘수사권으로 보복하면 깡패’라고 했는데, 야당 대표 이재명에 관한 무차별 수사는 깡패 수준의 보복이 아닌가 묻고 싶다.

수사 정의는 딴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

친윤수사는 면죄부 수사답게 한결같이 불송치 또는 불기소로 가고 있다. 김건희 박사의 허위 경력 기재 사건 불송치를 비롯해서, 코바나컨텐츠 뇌물성 협찬 의혹 불기소,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수사 뭉개기, 그리고 장모 최은순의 100억대 잔고증명 위조사건 불송치, 공흥지구 개발특혜 의혹 불송치 등이 모두 그런 보기들이다. 대통령 관저 선정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천공도 친윤인 덕분에 소환조차 못하는 성역으로 존재한다. 대통령 취임식에 장모 최은순 수사경찰관을 콕 집어 특별 초청한 사실은, 대통령 권력이 수사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입증한 구체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수사 정의는 딴 나라의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현 정부에서는 수사 정의뿐 아니라 사법 정의도 사라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대법원이 판결한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기업의 배상’ 결정을 대통령이 뒤집어엎은 사실이다. 대통령이 개인과 기업 사이의 민사소송 판결에 끼어든 것부터 잘못인데, 더 나아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한국 기업이 대신 변제토록 한 것은 삼권분립 위반이자 사법 정의를 정면으로 묵살한 행위이다.

실제 재판 과정도 문제적이다. 현직 부장검사 박은정이 “이게 재판이냐? 저를 증인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법무부의 소송 대응이 정치권력에 휘둘리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판사 사찰문건 전달 지시와 채널A 사건 감찰 및 수사 방해에 관해서는 이미 서울행정법원에서 직권남용의 중대 비위로 판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정권교체에 따라 ‘원고 윤석열, 피고 한동훈’ 구도가 되자, 법무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바람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윤 정부에서 사법 정의는 진작 물 건너간 셈이다.

정부는 기득권이 아닌 사회적 약자 편에 서야

인사 정의는 장관 임명에서부터 편중 인사로 빗나갔다. 군부독재 시기 군인들이 그랬듯이 현정부에서는 검찰 출신들이 정부 요직을 장악한 까닭에 검찰독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박근혜 정권의 문고리 3인방처럼 지금 정부에서는 검찰 수사관 출신들이 대통령실 문고리를 장악하고 있다. 후보 시절 대통령은 전두환을 찬양하면서 ‘적재적소의 인재 등용’을 표방했는데, 검찰 업무와 무관한 기관에도 검찰 인사로 도배를 했다. 총리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금감원장,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민주평통 사무처장도 검찰 출신이며, 심지어 서울대학병원 감사도 검찰 수사관 출신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까지 검찰 출신을 임명했다가 자녀 학폭 사실이 드러나 사퇴 소동을 빚었다. 법무장관이 검찰 출신인 것은 물론, 그 휘하의 인사정보관리단까지 모두 검찰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윤 정부 인사는 오로지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검찰의’ 인사인 까닭에, 인사 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리 없다. 그러므로 대통령에 의한 정부 인사가 아니라 검찰총장 윤석열에 의한 검찰 인사로 착각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축구국가대표팀 감독도 검사로 임명하라고 할까.

사회 정의는 차별 없는 대등사회를 겨냥하며 공동선을 추구해야 실현된다. 모든 국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공동선이다. 그러자면 정부는 으레 기득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 편에 서야 한다. 불편부당한 것이 공정인 것 같지만, 주어진 처지와 상황을 무시한 기계적 공정은 사실상 불공정이다. 갑과 을 사이의 문제라면 정부는 당연히 을의 편에 서야 공정하다. 부당한 가해가 일어났을 때, 정부는 피해자 편에 서야 정의가 실현된다. 억압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 편에서 억압하는 사람을 제지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런데 윤 정부는 사회 정의와 거꾸로 치닫고 있다. 을의 편에 서기는커녕 오히려 공권력을 동원하여 갑질하기 일쑤이다. 시민언론 ‘더탐사’를 여러 차례 압수수색한 것은 의도적인 갑질이다. 게다가 정부는 피해자보다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예사로 한다. 일본기업의 강제징용으로 평생 고통을 겪어온 피해자의 마지막 희망을 꺾어버리고 가해자 일본기업에 면죄부를 준 것이 2차 가해다. 노사문제에 정부가 나서서 중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용자 편에서 노조를 억압함으로써, 노조원이 노동절에 분신하는 사상 최악의 사태까지 빚었다.

경제 정의는커녕 빈곤층을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아

사회 정의 못지않게 경제 정의도 악화된 상황이다. 경제 정의의 기본은 균등분배에 있다. 재벌중심 경제체제에서는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악화되기 마련이다. 특히 재벌의 세습체제는 북한의 권력세습처럼 3대로 이어지면서 한국 경제권력을 지속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경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경제 정의는 실현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윤 정부는 오히려 대기업과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리는 일에 더 골몰하고 있다. 국민들은 물가 급등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재벌기업의 법인세 인하는 물론 부자들의 종부세 무력화까지 시도한 터이다. 많이 가진 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가진 자는 적게 내는 것이 공평과세인데, 과세부터 불공정을 심화시키고 있다. 부족한 세수에 따른 적자를 메우기 위해 전기료와 가스요금을 대폭 올림으로써 도리어 서민들의 주머니를 넘보는 형국이다.

경제 정의를 실현하려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의식주와 의료, 교육 및 교통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절대 빈곤을 추방하고 서민들의 복지 정책을 확대해야 하는데, 현 정부는 거꾸로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취약계층의 민생복지를 방치하고 있다. 휴지 줍는 노인들의 공공 일자리 예산을 비롯해서 저소득층 위기 가정에 대한 예산과 어린이집 확충, 노인요양시설, 장애인 복지시설 관련 예산을 두루 삭감했다. 경제 정의는커녕 빈곤층을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고 있다.

정의가 없는 대통령은 강도 집단의 우두머리

독선적인 대통령 권력이 정의가 설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탓에 어느 영역의 정의 하나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정의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대통령은 입만 열면 자유를 외치면서 뒤로는 시민들의 집회자유를 제한하는 야간집회 금지 입법을 획책하고 있다. 이처럼 표리부동한 위선적 정권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은 산에 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다.

정의는 거짓과 위선을 가장 싫어한다. 정의는 진정성이라는 토양 위에서만 성숙하게 자란다. 거짓을 일삼는 대통령에게 진정성이 있을 수 없다. 대통령이 간호협회를 찾아가 처우개선을 약속하고도 공약한 적 없다고 발뺌하거나, 대통령이 잘못한 말을 주어가 없다며 거짓으로 둘러대는 대통령실에서 무슨 정의를 찾을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빈 모니터를 바라보거나 백지를 들고 있는 사진을 내보내며 마치 중대한 업무를 보는 것처럼 홍보하는 가짜뉴스 정부에서 어떤 정의를 기대하겠는가.

철학자 키케로(Marcus T. Cicero)가 “국민은 온갖 사람들이 모인 군중이 아니라, 정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과 공동의 이해관계에 의해 연합된 결사체”라고 했다. 국민이 곧 정의의 결사체라는 말인데, 하물며 국민을 이끌어가는 대통령이란 자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최소한의 국민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셈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는 신국론에서 정치적 악을 해소하는 최고의 처방은 정의라고 주장하며, “정의가 없는 국가는 거대한 강도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정의가 없는 국가가 강도 집단이라면 정의가 없는 대통령은 강도 집단의 우두머리란 말이다. 대통령이 성역을 만들어 살아 있는 권력 수사를 틀어막고 있는 것은 사실상 정치적 악을 조장하는 일이자 정의를 깔아뭉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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