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해결, 산 윤석열 손을 빌린 죽은 아베의 승리
고통 덮는 방식…'대승적 결단' 아닌 가해자 '대승'
반성‧사과 없이 수구보수가 강요하는 '화해와 용서'
가해자도 망치는 길…피해자들은 용서하고 싶은데
윤석열 정부는 결국 일제 강제징용 문제를 가해자의 어떠한 사과와 보상도 없이 피해자가 과거를 잊고 고통을 덮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것은 '산 윤석열의 손을 빌린 죽은 아베의 승리'라고 할 만하다. 지난해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일본의 지정학적 전략을 위해서 구상한 내용들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와 족벌언론들이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화해와 용서'이다. 표적을 정하고 검찰과 언론을 앞세워서 증오를 부추기며 죽도록 괴롭히는 것이 특기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화해와 용서'를 말하니 아이러니하지만, 알다시피 이들의 '화해와 용서'는 특정한 주제들로 한정돼서 선택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과와 보상도 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에 대한 '화해와 용서'뿐 아니라, 진정한 사과하고는 거리가 먼 행위들을 하고 있는 광주 학살에 책임이 있는 특전사동지회에 대한 5.18 희생자들의 '화해와 용서'가 있다. <조선일보>는 "5.18의 정신"까지 들먹이며 특전사동지회를 용서하고 화해하자고 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가해자나 가해자를 편드는 사람들이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맥락이다. 이들은 가해자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도 없이 그것을 강요한다. 그런데 이런 가해자들과 그 지지자들이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피해자야말로 누구보다 용서하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 심리학자인 해리엇 러너가 쓴 <당신, 왜 사과하지 않나요?>는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충분히 오래 대화를 나누며 경청하고 나면 실제로는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용서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는 스스로가 분노, 고통, 후회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다. … 앙심에 찬 인간이 아닌,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용서하고 싶어요'라는 말은 '이 일을 떠나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어요'라는 뜻이다."
그리고 용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바로 가해자가 먼저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의 경우에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의 배상이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이 없다면 용서와 화해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없는 용서와 화해는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망치는 길이다.
"나는 가해자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용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가 없다면, 또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도 미안함과 재발 방지 맹세를 해오지 않는다면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인간애에 반한다. 가해자는 용서를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회복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동의한다."
즉, 일본이 반세기 전에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 전쟁 범죄를 저지른 나라의 정부와 구성원들로서 그러한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 인간적 가치들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반성과 사과를 필요한 것이다. 해리엇 러너는 진심 어린 사과는 피해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치유할 수 있도록 도울 뿐 아니라, 가해자가 명예와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사과는 피해자가 삶을 망가뜨리는 분노, 고통, 원한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돕는다.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에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잘못된 언행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이다. 진심 어린 사과는 피해자가 치유의 가능성을 모색할 여지를 안겨준다. 사과는 사과하는 사람에게도 선물이다. … 좋은 사과는 우려와는 반대로 남들의 존경을 얻는 길이다."
지금, 일본 정부처럼 구체적 잘못에 대한 직접적 사과 없이 25년 전의 막연하고,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의 내용은 있지도 않았던 담화를 계승한다는 것을 어떻게 진심 어린 사과라고 볼 수 있는가? 이처럼 진심 어린 반성과 사과가 없는데도 계속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용서라고 부를 수도 없으며 새로운 피해만 덧붙이는 극심한 2차 가해다. 신학자인 스티븐 체리가 쓴 <용서라는 고통>은 이것을 지적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일이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만 용서도 가능하다. 억지로 강요된 용서는 용서라고 부를 수 없다. … 용서가 단순히 가해자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라면 가해행위를 묵인해줌으로써 도리어 피해자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박탈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 진정한 용서는 그런 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용서는 가해자의 잘못을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것이기는커녕,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사과를 바탕으로 그것을 함께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피해자의 승리'일 뿐 아니라 피해자, 가해자 모두를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게 하는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용서는 가해자가 저지른 행위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한 인간으로서 나는 네가 내게 저지른 악행을 똑같이 반복할 수 없으며 반복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피해자의 승리다. … 용서는 피해자 자신, 가해자 그리고 제3자에게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고귀한 행위다."
따라서 지금 반성과 사과 없는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이들은 '가해자의 승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인들을 위해서도, 일본인들을 위해서도, 한국과 일본의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윤석열 정부의 이 불의한 강제징용 문제 '해결'을 막아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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