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폰〉 미국 사회 극심한 불안증에 관한 이야기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잭 크레거 감독의 영화 <웨폰>은 현재 국내 극장가에서 개봉 중인 작품 중 가장 특이한 급에 속한다. 과거 <겟 아웃>(2017)의 조던 필이 만들어 냈던 파격의 놀라움, 최근 라이언 쿠글러가 <씨너스: 죄인들>(2025)로 보여줬던, 파괴에 가까운 격렬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할리우드는 확실하게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현재의 미국 사회가 도저히 해독이 불가할 정도로 이해는커녕 파악 자체가 안 되고 있는 지경인 만큼, 한 편의 영화에 온갖 장르를 다 뒤섞어 놓고는 부분마다 겨우 맞춤형 식으로 해석의 이론을 내놓고 있는 형국이라는 점이다. <웨폰> 역시 이것을 어떤 영화라 해야 할지, 무슨 장르의 영화라고 규정해야 할지, 내용의 서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무엇보다 무엇을 얘기하려는 영화인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의 미국 사회가 매우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 있고 사람들에겐 대책이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거시(巨視)를 상실한 지 너무 오래돼서 미시(微視)적인 것, 곧 눈앞의 작은 일상마저 엉망인 사람들이 됐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인다. 다들 미쳐있다, 고 여러 영화가 요즘 증언하고 있다.
저마다 문제투성이 6인의 시선으로 본 하나의 사건
<웨폰>의 얘기는 기이한 설정에서 시작된다. 지역은 펜실베이니아 근교 어느 마을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며 이것은 모두 사실이라는, 한 소녀(스칼렛 셔)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어느 날 이 마을 초등학교 3학년 한 학급의 학생 17명이 사라진다. 알렉스라는 이름의 소년(캐리 크리스토퍼) 1명만을 제외하고 싹 없어진다. 아이들 모두 학교에 동시 결석을 한 후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날 새벽 2시 17분에 어딘가를 향해 하나같이 뛰어간 후 없어졌다는 것이다. 부모들, 마을 주민들이 아이들을 백방으로 찾는다. 당연히 FBI도 개입한다. 미국의 전국적 사건이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30일이 넘도록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간 것일까. 살아는 있는 것일까. 마을에 연쇄살인범이 출몰한 것일까.
영화의 전체 구조는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한 가지 이야기, 곧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로부터, 여기에 관련이 있는(듯 보이는) 선생, 학부모, 일선 경찰, 교장, 노숙자, 그리고 남아있는 아이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입체화한 것이다. 다중 시점이다. 벌어진 사건을 바라보는 여섯 명의 시선이다. 사라진 학급의 담임선생 저스틴 갠디(줄리아 가너)는 당연히 주민들의 추궁 앞에 수세에 몰린다. 아들을 잃은 학부모 아처(조쉬 브롤린)는 자신의 건축 공사 현장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일선 경찰인 폴(올든 에런라이크)은 점점 기이한 사건에 휘말린다. 교장 마커스(베네딕트 웡)는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손님을 맞으며 일상이 무너진다. 노숙자 제임스(오스틴 에이브람스)는 안 봐야 할 것을 본 후에 불행을 맞는다. 그리고 남아있는 아이 알렉스는 사건 이후 늘 어둡고 우울하다.
이들은 모두 속사정들이 있고 나름의 핸디캡이 있다. 저스틴 갠디는 전에 근무했던 학교로부터 문제 교사로 지적받아온 젊은 여성이다. 아이들과의 불필요한 개인 접촉이 늘 문제가 돼 왔다. 건설사업자 아처는 아이를 엄하게 키워 온 가부장적 스타일을 지닌 인물이다. 경찰 폴은 알코올 중독 문제가 있고 제임스는 마약 중독자에다 빈집을 털며 살아간다. 교장 마커스는 게이이며 모든 것을 규정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원칙주의자이다. 어린아이인 알렉스는 집안 내력에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알고 보면 문제가 있는 사람들 천지이다. 이건 곧 미국 내부가 ‘병든’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은유로 보인다. 정상이 없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병들었다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아가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가관들이라는 것이다.
규정 탓하며 서로 떠넘기는 속에 어느새 사라진 사건의 본질
아이들 17명이 없어졌는데 누구도 아무런 해결방안을 마련하지 못한다. 무능력하다. 영화 초반부 소녀의 내레이션에도 그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 모든 일은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모두 쉬쉬한 결과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다는 식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사회나 국가가 움직여지고 있는 행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책임의 공을 그저 여기저기로 떠넘기는 과정에서 사건의 본질은 늘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아이들 17명이 사라진 사건의 본질, 미국 사회라는 본질, 미국 사람들이 그동안 믿어왔고 추구해 온 것의 본질이 사라졌다는 것, 바로 그 얘기를 이 영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마음속으로 번져온다.
그러면서 하는 게 늘 규정 탓이다. 자본주의적 이기성이 극대화 되어 있는 나라나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다. 규정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창의적 융통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교장 마커스는 담임선생 갠디가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이다. 갠디는 퇴근길에 집으로 혼자 걸어가는 학생을 같은 방향이라 태워다 준 것뿐이며 아이가 울고 있기에 달래느라 한번 안아준 것뿐이라 해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규정은 규정이에요. 아이들과의 신체접촉은 안 됩니다.” 그는 알렉스의 이모할머니인 글래디스(에이미 매디건)에게도 부모를 면담하지 못하면 아동보호기관에 보고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알렉스는 위탁 가정에 맡겨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뭔가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법과 시스템에서 규정한 원칙 안에만 머물려 한다.
마커스의 이 같은 태도는 결국 큰 화를 불러온다. 규칙이 규칙으로서 작동하려면 사람들의 내면적인 삶이 충분히 이해되어야 한다. 교장 마커스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응당 책임져야 할 일을 회피하려는 셈이다. 자본주의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양, 늘 그 합리성을 떠벌리지만, 그것은 불합리하고 불안정하기 일쑤라는 걸 이제 누구나 느끼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기괴한 일에 맞닥뜨리게 되면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영화 후반, 이 마을은 쑥대밭이 된다. 등장인물들 모두 끔찍한 결론 앞에 서게 된다. 각자의 운명은 다르나 꽤 충격적인 것만큼은 모두에게 같다.
얼마 남지 않은 미국 사회를 느낄 수 있는 여러 레퍼런스들
모든 퍼즐, 특히 밀실(그것이 방이 됐든 마을이 됐든)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그 밀실 안에 있는 사람, 그것도 자주 거론되거나 자주 보여지며 아주 익숙한 사람이 범인이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 17명이 사라진 곳도 알고 보면 ‘바로 거기’이다 눈 밝은 관객들은 일찍 눈치를 챘을 것이다. 맥거핀(macguffin)같은 눈속임 장치는 없다. 처음 느낌이 왔던 그곳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다만 이유가 궁금해질 뿐이다.
많은 영화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온 작품이다. <겟 아웃>처럼 이상한 마을은 곧 이상해진 미국이나 원래 이상했던 미국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중간중간 나오는 피에로의 이미지는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It)』에서 가져온 것이다. 스티븐 킹은 공포소설을 통해 미국의 중심, 가장 미국적인 무엇이 계속 일그러지고 훼손돼왔음을 지적해 온 작가이다. 아리 애스터 감독이 만든 <유전>처럼 무속의 광기가 영화 곳곳에 느껴지기도 한다. 후두교 의식처럼 보이는 장면은 <씨너스: 죄인들>에서도 만났던 모습이다.
작가주의 감독들은 사회를 분석하고, 사회에 경종을 울릴 요량으로 공포 미스터리 장르를 이용하곤 한다. 영화의 제목이 왜 ‘웨폰’인가는 영화 중후반에 알 수 있다. 안 가르쳐 주는 것이 예의이다. 직접 확인해 보시기들 바란다. <웨폰>은 지난 10월 15일 전국 개봉했다. 썩 잘 되고 있지는 않다. 선구자의 언행은 대체로 안 듣고 안 보는 경우가 많다. <웨폰>이 그렇다. 미국 사회,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 얼마 남지 않았다. 최소한 급격하게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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