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이후 최고지도자의 첫 다자외교무대 등장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북한의 외교적 반격이 시작됐다. 9월 3일 베이징에서 개최되는 제80주년 중국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태운 전용열차가 9월 1일 평양역을 출발했다. 김정은의 이번 베이징 방문은 2019년 1월 이후 6년 8개월만의 중국 방문이자, 첫 다자외교무대 등장이다. 이번 전승절 행사는 반미·반서방 국제연대 강화를 과시하는 자리인 만큼, 예상을 깬 김정은의 참석은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일본, 미국 방문을 통한 한·미·일 협력 강화에 대한 반격의 의미를 띠고 있다.

제70주년 전승절 행사 때 천안문 망루에는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우측에 푸틴과 박근혜 대통령 등 외빈이 서고, 좌측에 장쩌민, 후진타오 등 전임 주석들이 자리했다. 이번엔 시진핑 절대권력을 상징하듯 중국원로들이 배제되고 그 대신에 시진핑 좌우로 외빈이 서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천안문 망루에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우측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 좌측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나란히 서서, 북·중·러 3국 정상이 한 장의 사진에 담기는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1일 전용열차로 출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일 전했다.[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 2025.9.2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1일 전용열차로 출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일 전했다.[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 2025.9.2 연합뉴스

김정은의 중국전승절 참석은‘북한 외교의 정상화’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다자외교무대에 참석하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일성 주석은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과 양자외교를 펼쳤지만, 여러 차례 다자외교 무대에 참석한 바 있다. 김 주석은 한국전쟁 직후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 참석한 데 이어 6월 1일 ~ 7월 19일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9개국을 순방했다. 1957년에는 소련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식, 1959년 1월 소련 제21차 공산당 대회 및 같은 해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주년 경축대회, 1965년 4월 비동맹회의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김일성 주석은 1967년에 북한이 ‘유일지도체계’를 수립하고 1974년 김정일을 후계자로 내정하면서 점차 다자외교 활동을 줄였다. 김 주석이 다자외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0년 5월 비동맹운동의 지도자인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 대통령 장례식, 그리고 1983년 제7차 비동맹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1984년 5월 16일 ~ 7월 1일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7개국을 순방한 것뿐이다.

이에 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재임 중 다자외교무대에 참석한 사례가 없다. 김정일이 해외에 나간 것은 김일성 주석의 수행원 자격으로 1965년 4월 인도네시아 비동맹회의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정도이다. 그는 대부분 평양에서 외국 정상을 만나거나, 열차를 이용해 중국과 러시아를 극비리에 방문하는 방식으로 양자외교를 전개했다. 이 때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은둔형 지도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다자외교무대 등장은 김정일 때와 비교하면 새롭지만, 김일성 때와 비교하면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북한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를 끝으로 열지 않다가 36년 만에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2021년 1월 제8차 당대회를 열었다. 2025년 6월 12차 당 전원회의에서는 내년 상반기 중에 제9차 당대회를 소집했다. 정기적인 당대회 개최가 ‘당의 정상화’ 과정이라면, 김정은의 다자외교무대 등장은 ‘외교의 정상화’라고 볼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평양 방문일정을 마치고 19일 밤 전용기로 평양을 출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 국제공항에 나와 푸틴을 환송했다. 2024.6.20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평양 방문일정을 마치고 19일 밤 전용기로 평양을 출발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 국제공항에 나와 푸틴을 환송했다. 2024.6.20 연합뉴스

김정은의 안러경중(安露經中) 전략구상

우리가 주목할 것은 김정은의 다자외교무대 첫 등장이라는 ‘형식’에 못지않게 그가 어떤 관점을 갖고 다자외교에 나서는가 하는 ‘내용’이다. 김정은의 최근 외교 행보는 현 국제정세를 ‘신냉전과 다극화’로 보는 그의 국제정세관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22년 12월 제8기 6차 당 전원회의에서 “국제관계 구도가 ‘신냉전’ 체계로 명확히 전환되고 다극화 흐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러한 국제정세 인식 아래 2023년 12월에 열린 제8기 9차 전원회의에서는 외교 3원칙(당의 존엄 사수, 국위 제고, 국익 수호)을 발표하면서 ‘강국의 지위에 맞는 공화국의 외교’를 주문했다. 실제로 북한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 국경을 재개방하며 외교활동을 재개했다. 전통적인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반미 전선에 서 있는 이란, 벨라루스는 물론 베트남과 라오스 등 글로벌사우스 국가들과의 교류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 외교전략구상의 핵심은 역시 중국과 러시아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첫 외교포석은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이다. 2023년 7월 쇼이구 국방장관의 방북으로 시작된 북·러 관계 개선은 2023년 9월 김정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의 북·러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2024년 6월 푸틴 대통령이 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해 양국 정상회담을 갖고 <조·소 동맹조약>의 자동군사개입조항과 유사한 내용을 포함한 <조·러 포괄적 전략동반자관계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근거해 2024년 10월 마침내 북한 전투부대가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 파견되는 등 첫 해외파병의 기록을 세웠다.

김정은 위원장의 다음 외교포석은 중국과의 관계증진이다. 북한으로서는 중국의 대규모 경제지원이 절실하지만, 대외무역에서 중국 비중이 98.3%(2023년 기준)로 과도한 대중 경제의존도는 오히려 중국발 체제위기가 될 수 있다. 중국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과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는 바이든 미 행정부와 거래를 시도해 북한의 불신을 샀다. 또한 코로나19로 중국에 장기체류하고 있는 북한인이 입국하고 같은 수의 재입국을 허용해 달라는 북측 요구에 대해 유엔안보리 제재 위반이라며 중국 측이 거부해 북한의 불만이 크다.

하지만 북한은 유엔안보리가 허용한 정제유 50만 배럴, 원유 400만 배럴 지원은 물론, 인도주의 및 민생 목적의 대북 지원, 그리고 최근 개관한 원산갈마지구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도 중국 당국의 협조는 불가피하다. 최근에는 북한군 파병 대가로 러시아의 지원 형식으로 중국정부의 묵인 아래 중국제 중고 기계류나 원부자재를 우회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 증진을 통해 좀 더 많은 경제적 교류와 지원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면 6년 8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찾는 게 된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북·중 및 북·러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중·러 3자 정상회담은 중국 측이 난색을 표명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방중 목적은 당장 한미일 남방삼각에 맞설 북중러 북방삼각을 구축하지는 못하더라도, 북·러 관계 강화를 통해 안보는 러시아로부터 보장받고 북·중 관계 증진을 통해 경제적 이익은 중국에게서 얻는다는 ‘안러경중(安露經中)’의 전략구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중국전승절에 참석해야 했나

중국정부는 지난 7월 1일 제80주년 전승절 행사에 이재명 대통령을 초청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신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하기로 하고, 이에 앞서 박병석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통령 특사단을 중국에 보냈다. 신정부의 한중관계 개선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은 2015년 제70주년 전승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면서 많은 외교적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균형외교’를 통해 한·중 관계를 강화하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공동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얻고 한중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실용외교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에 대해 한국이 미·일 동맹에서 벗어나 중국에 기울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서방국가 정상 중 유일하게 참석한 점이 논란을 키웠다. 중국의 전승절이 단순한 외교적 행사를 넘어 동아시아 안보구도와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각국 정상들과 함께 성루에 서 있다. 2015.9.3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전 중국 베이징 톈안먼에서 열린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각국 정상들과 함께 성루에 서 있다. 2015.9.3 연합뉴스

중국전승절의 명칭은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기념일’이다. 명칭에서 보듯이 전승절 행사의 목적은 ‘반일 반서방 국제연대’에 있다. 또한 중국공산당 정부가 전승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함으로써 항일전쟁의 주체가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아닌 공산당 정부에 있다는 ‘역사수정주의’를 노린 것이다. 이는 중국 주도의 대만 통일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제70주년 전승절 행사 때는 박근혜 대통령을 제외하고 서방국가의 국가원수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박근혜의 중국전승절 열병식 참석은 결과적으로 한·일 및 한·미 관계에서 우리나라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역대 정부가 원칙을 지켜왔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하고 햇볕정책의 성과로 만들어진 개성공단이 문을 닫게 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에 대한 사드 배치 허용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정부가 한한령(限韓令)을 발동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박근혜 정부의 근시안적인 대중 우호 정책이 역설적으로 한·중 관계를 악화시킨 것이다.

실용외교의 시험대, 시진핑은 APEC에 참석할까

이재명 대통령은 8월 24일 한중 수교 기념일에 맞춰 박병석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대통령 특사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이날이 이 대통령의 방일, 방미 기간과 겹쳤기 때문인지, 시진핑 주석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홀대’ 논란이 불거졌다. 과거 대통령 특사들이 중국에 갔을 때 시 주석을 만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특사단이 시 주석은 못 만났지만, 중국 측은 자오러지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왕이 외교부장, 왕원타오 상무부장 등이 나와 나름대로 특사단을 예우하는 모양새는 취했다. 이번 전승절 열병식을 관람할 천안문 망루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어떻게 예우할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오러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26일 오후 베이징에서 박병석 한국 대통령 특사 일행을 만나고 있다. 2025. 8.26 신화 연합뉴스
자오러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이 26일 오후 베이징에서 박병석 한국 대통령 특사 일행을 만나고 있다. 2025. 8.26 신화 연합뉴스

대중 특사단은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의 참석을 공식 요청하는 이 대통령의 친서를 왕이 외교부장에게 전달하였다. 지난 8월 31일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10월 말 경주 APEC 정상회의 참석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은 시진핑의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전승절’ 참석을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실제로 시진핑이 경주에 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만약 시진핑 주석이 APEC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바로 신냉전 구도의 형성을 의미하진 않더라도, 여전히 한·중 관계 개선은 이재명 정부가 내건 ‘국익중심의 실용외교’에 숙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시진핑 주석이 APEC 참석을 위해 한국에 와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된다면,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에 따른 우려에도 불구하고 향후 한·중 관계는 크게 개선될 여지가 크다. 김 위원장이 그린 ‘한·미·일 vs.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형성될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로선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시진핑 주석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이시바 일본 총리도 APEC에 참석해 다자 정상회의뿐만 아니라 한·중은 물론 미·중, 중·일 양자 정상회담도 성사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구도 형성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고, 미국, 일본에 이어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더 나아가 북한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경주 APEC의 성공적 개최 여부는 이재명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의 성패를 가르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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