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에서 허용될 수 없던 진보적 신앙관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가 과학의 길로 인도

1774년 연소와 호흡에 중요한 기체 '산소' 발견

프랑스 혁명과 종교적 신념의 자유를 적극 지지

한국 개신교도 인간에 대한 연민, 겸손 본받아야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위키백과)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위키백과)

18세기 처음으로 산소(O₂)를 발견한 영국의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의 전기를 쓰려는 게 아니다. 삶의 단계 단계에서 거부할 수 없이 내면에서 솟구치는 요구가 그를 어떻게 앞선 세계로 이끌어 갔는가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요즘 세간에 오르내리는 어느 목사가 한 방송에서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고백했다고 한다. 자신이 큰 교회 권력을 가졌으면서 다른 누군가가 그런 일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는건 참으로 옹색하다.

프리스틀리는 1774년 산화수은을 가열해 생긴 기체를 분리했다. 이 기체 속에 인을 넣으면 밝은 빛을 내며 타고, 이 기체를 넣은 항아리에 쥐를 넣었더니 대기 중에서보다 더 활기차게 활동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기체가 연소와 호흡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이다. 실험 설계 및 과학적 발견에 이르는 과정이 흠잡을 데가 없다. 그는 이 기체를 '플로지스톤 제거 기체(dephologiticated gas)' 라고 이름 지었다. '플로지스톤'이란 18세기초 독일 화학자 '게오르그 에른스트 슈탈(Georg Ernst Stahl)'이 현대 화학 용어로 '산화(oxidation)'라고 부르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가상의 원소이다. 프리스틀리와 동시대를 살았고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보아제에 의해 그 가설은 폐기됐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산소를 발견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조셉 프리스틀리가 산소 발견을 위해 사용한 장비들. (ReAgent Chemical Services)
조셉 프리스틀리가 산소 발견을 위해 사용한 장비들. (ReAgent Chemical Services)

이런 얘기로 시작하면, 그의 직업이 화학자라고 생각하기 쉽겠다. 직업을 개인적 가치 실현과 경제적 욕구 충족이라는 두 가지 조건 사이의 '첫번째 균형점'이라고 정의하면, 그는 화학자가 아니다. 굳이 '첫번째'라고 하는 이유는 그 점이 매우 부자연스러운데 위치함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프리스틀리는 목사를 직업으로 택했다. 그는 현대적 시각에서 매우 진보적인 목사이다. 과학의 여명이 통트기 시작한 시기, 그래서 많은 자연 현상을 여전히 신적 계시로 돌리던 시절에 그는 교회가 과학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목사였기에 화학자도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이 교회에서 얼마나 환영을 받을지 모르겠다.

그는 부유한 삼촌의 양육 하에 당시 영국 개신교의 주류였던 캘빈주의적 환경에서 매우 독실한 목사의 길을 가도록 교육받았다. 그런데, 심하게 앓은 16살에 그의 삶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게 된다. 신의 절대적 주권에 기초한 캘빈의 '예정설'을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누구나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주류 개신교계로부터 신의 절대주권론을 부정한다고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장래가 보장된 길을 놔두고,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로 인해 그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잠시 신학을 떠나, 불어, 독일어, 수학, 자연과학, 논리학, 형이상학을 공부했다. 다른 직업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이 때의 공부를 통해 그는 삶의 가치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도 있다는 생각에 눈을 떴고, 그 생각을 구체화하는데 좋은 토대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18세에 다시 신학공부를 계속했지만 결코 캘빈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755년, 22세에 영국 서포크(Suffolk)에서 목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변함없이 신앙에서 신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와 이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화학자로서의 삶은 이와 깊은 관계가 있다.

1733년에 태어나 1804년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의 중반기 이후에 겪은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 등의 격동이 그의 지적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프랑스 혁명과 공화정을 공적으로 지지해 과격하다는 공격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위대한 프랑스 혁명의 원칙인 자유와 평등은 모든 인간의 권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 성공회를 비판하고 개신교내 소수파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요구했으며, 영국 정부의 부패를 질타했다. 그의 이런 발언들이 과격하다고 한다면 자유와 평등은 실현될 수 없다.

1774년 프리스틀리는 세계 화학계를 선도하던 파리를 방문해 당대의 유명 화학자들 앞에서 그의 산소 발견 실험을 재현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을 목사일 뿐 아니라 화학자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과학에 대한 헌신을 기독교 신앙의 한 형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지금의 일반적 분위기와도 충돌한다.

1791년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던 이들에 대한 반감으로 일어난 '버밍햄 폭동(Birmingham riot)'으로 자신의 집과 실험실이 불타는 위험 속에 런던으로 탈출했다. 1794년 결국 미국 펜실베니아주로 이민하여 목회를 하다 1804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과학을 인간 이성의 결정체로 존중했다. 화학자로서의 삶을 귀하게 여긴 까닭에 산소의 발견이라는 위대한 업적에까지 이르렀다. 그를 기리기 위해 1923년 미국화학회는 가장 권위있는 상인 '프리스틀리 메달'을 매년 1명에게 수여한다.

프리스틀리는 시민이 이끄는 공화정을 지지했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용기있는 발언을 했다. 그의 신학적 관점이 주류의 편에 서지 않았다 해도, 그것이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 기인했다면 존중받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자유가 소중한 이유이다. 겸손함이 아쉬운 우리 기독교계를 보며, 그의 삶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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