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식으로 권력 허상 좇은 다른 시대 두 여인
18세기 프랑스의 걸출한 여인 중에 마담 퐁파두르(1721~1764)가 있다. 창부 출신의 미인 어머니(포아송 부인)와 금융업자 출신의 부자 애인(샤를 뚜르넴)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담 풍파두르는 타고난 외모도 특출했지만 어머니의 철저한 훈육 아래 미술, 춤, 연극, 디자인, 독서, 작문 등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추며 성장했다. 부자 생부의 지원도 있었지만, 딸에게 자신이 경험한 고통과 치욕을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이 크게 작용했을 터! 그렇게 자란 딸이 첫 결혼에 실패할 무렵, 우연히 사냥 나온 루이15세에게 그 미모가 눈에 띄어 여후작 작위까지 받고 1745년엔 왕의 공식 정부(情婦)가 된다. 마담 퐁파두르의 등장이다.
미모에 태도, 실력까지 겸비했던 루이15세의 애첩
오늘날 ‘피부는 권력이다’라는 화장품 광고도 있지만, 인간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외모가 권력’이 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그 이전에 비해 인간적 유대감이나 공동체가 해체되고 오로지 개인의 경쟁력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같은 자본주의라도 가정보다는 일터에서, 농어촌보다는 도시에서 외모를 더 중시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권력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외모 중독에 곧잘 빠진다. 그런 맥락에서 얼굴, 몸매, 풍만한 가슴을 지닌 마담 퐁파두르, 나아가 패션 감각과 헤어스타일까지 선도하던 마담 퐁파두르는 한창 권태기에 접어든 루이15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특히, 루이15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기에 늘 허전한 구석이 있었다. 당연히 ‘조건 없는’ 사랑과 위안을 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를 갈망했다. 그 와중에 루이15세는 나중에 마담 퐁파두르가 될 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
그러나 마담 퐁파두르가 권력을 얻게 된 것은 단지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처럼 외모로 인한 매력은 몇 년 가지 못한다. 게다가 엄연히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는 왕비도 있었고 그 전까지 왕의 최고 애첩이었던 마담 맹트농도 의식해야 했다. 여기서 ‘태도’가 중요했다. 인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담 퐁파두르는 한편으로 왕비의 질투와 시기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루이15세를 통해 왕비의 외로움과 빚 문제를 해결하도록 ‘베갯머리 정치’를 했다. 왕은 퐁파두르의 이런 모습에 더 감동했다.
황제의 부족한 점 채우며 모두의 사랑을 받다
나아가 퐁파두르는 파리 한복판에 사관학교를 멋지게 세워 가난한 귀족 남아들이 강력한 군대를 이끄는 간부가 되도록 만들었다. 나중에 등장하는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도 바로 이 사관학교 출신이다. 이는 마담 맹트농이 수녀학교를 세워 가난한 귀족의 여아들을 수도자로 길러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던 것보다 당시 사회 상황에선 더 돋보였다. 이렇게 퐁파두르는 고립무원의 베르사유 궁전에 입성한 뒤, 날이 갈수록 왕은 물론 더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찬사를 받는 존재로 부상했다.
외모와 태도 외에 퐁파두르의 실력은 더 결정적이었다. 독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루이15세를 위해 퐁파두르는 스스로 연출가 및 배우가 되어 많은 작품들을 연극으로 보여 주었다. 처음엔 15석 짜리 소규모 궁정 극장이 나중엔 50석 규모로 커질 정도로 인기 높았다. 한편, 당시 귀족들이 사용하던 도자기는 중국 등 해외 수입품이었는데, 국부 유출을 꺼린 퐁파두르는 세브르 도자기 공장을 세워 자체 브랜드를 개발한다. ‘퐁파두르 핑크’라는 독특한 장밋빛 색깔을 화학자와 함께 개발, 선풍적 인기를 얻었다! 높은 품질과 독특한 색상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고 국왕 루이15세의 총애를 더 받게 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퐁파두르는 왕에게 ‘걸어 다니는 사전’일 정도로 모르는 게 없는 여인으로 통했다. 왜냐하면 퐁파두르가 1745년 궁전에 입성한 뒤 궁정예절, 궁정음악 외에도 식물, 무용, 연극, 문학, 오페라, 역사, 건축, 법원 등을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사교장이자 공론장 역할을 했던 주요 살롱에서 타인과 대화할 때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여선 안 되었다. 심지어 그녀의 샬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 정도였다. 그리하여 루이15세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퐁파두르에게 물어보았고, 그 때마다 단순 명쾌한 답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문화예술은 물론 인문학적 안목까지 탄탄했기에 마담 퐁파두르는 국왕과 더 이상 잠자리를 같이 하지 못할 정도가 돼서도 총 20년 가까이 정치, 외교 등에서 비선실세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퐁파두르 많이 닮은 것 같으면서도 크게 다른 김건희
느닷없이 18세기 프랑스 궁중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김건희 여사 때문이다. 대선 국면에서 손바닥에 임금 왕(王) 글자를 새기고 나온 윤석열, 틈만 나면 “반국가세력 척결”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들먹이며 실은 루이15세에 이상의 전횡을 휘둘렀던 제왕적 대통령! 그러나 그 뒤에 숨어 사실상 비선실세 권력자 노릇을 했던 김건희!
물론 18세기 프랑스와 21세기 대한민국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건 무리다. 그럼에도 이 짧은 글에서 흥미로운 차이점 내지 공통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김건희는 그 어머니가 딸의 외모를 철저히 관리(?)해 검사들이 혹할 정도로 만들었다. 반면 퐁파두르는 그 어머니가 굳이 외모를 관리하지 않아도 국왕이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둘째, 김건희는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도 잘 하지도 않았는데, 오래 유지(yuji)되지 못할 수단과 방법으로 ‘가짜 박사’까지 되었다. 반면 퐁파두르는 다방면에서 학업 성적도 좋았고, 문화예술적, 인문사회적 소양이 풍부했으며, 국왕의 사랑을 오래 유지할 정도로 실력자였다.
셋째, 김건희와 퐁파두르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자의 비선실세로서 농민, 노동자, 빈민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 위에 팔자에도 없는 화려한 삶을 과하게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퐁파두르는 감옥에 가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김건희’는 감옥에 갔다.
모두가 권력자 되면 아무도 권력자 아닌 민주주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어떤 고상한 자리에 권력을 부여하고, 그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경쟁을 벌이는 것, 이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길이 결코 아니라 일종의 가상(허상)일 뿐이란 점이다. 진짜 민주주의란 보통사람들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과정, 풀뿌리 민초들이 자율자치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 그리하여 저 높은 곳에 군림하는 권력자를 상정하지 않는 그런 시스템이다. 그렇게 되면 아예 비선실세 같은 게 생길 여지 자체가 없어진다. 모두 권력자가 되면 아무도 권력자가 아니란 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겉보기엔 대혁명이었지만 실제로는 돈 많은 자산가(BG)들이 기존의 귀족과 지주들을 물리치는 권력 투쟁에 불과했다. 2025년 우리의 ‘빛의 혁명’은 과연 어디로 달릴 것인가? 단지 권력자가 국힘당에서 민주당으로 바뀐 것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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