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대 오른 이재명 대통령의 ‘국익 중심 실용 외교’
한국과 미국의 관세 협상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마감 시간 직전에 극적으로 타결됐습니다. 협상의 성패를 따진다면 “선방했다”라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재명 반대’를 외치는 국민의힘 소속 일부 의원과 <조선일보> 같은 ‘무조건 반이’ 세력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하지만 시시비비의 기준에서 보면, 트럼프 관세 협상은 지탄받아야 할 악행입니다. 힘의 우위를 앞세운 깡패의 팔 비틀기와 다름없습니다. 군함을 앞세워 약소국의 부를 마구 강탈해 갔던 제국주의 시대의 ‘군함 외교’가 21세기에 ‘관세 외교’로 얼굴을 바꿔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트럼프 관세 협상은 규칙 기반 ‘팍스 아메리카’ 시대의 종말
동네에서 힘깨나 쓰는 어깨가 지나가는 아이들을 불러놓고 공연히 꿀밤을 먹이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 대 세 대를 맞았는데 나는 한 대만 맞았습니다. 당하는 사람들끼리 비교하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덜 맞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한 대든 두 대든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짓입니다.
트럼프 관세 협상은 나쁜 걸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때린 사람 눈치만 살피는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국제 정치학자들은 2차대전 이후 80년간 미국이 설계하고 주도해 왔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트럼프 2기 정권을 맞아 완전히 붕괴한 신호로 보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등장이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붕괴의 원인인가 아니면 이미 붕괴한 질서의 결과인가’에 대한 시각 차이는 있지만, 확실한 건 트럼프 2기와 함께 규칙을 기반으로 한 ‘우아한 팍스 아메리카’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우아한 팍스 아메리카’ 시대가 가면 어떤 시대가 찾아올까요. 관세 협상이 끝난 뒤 한국과 미국에서 나온 관계자들의 발언이 어렴풋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협상 끝난 뒤에야 이재명 대통령 ‘당선 축하’ 밝힌 트럼프의 의도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자동차 관세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채, 협정을 맺지 않은 일본·유럽연합과 똑같이 15% 관세율을 부과받은 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저희는 마지막까지 12.5%가 맞다고 했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게 상당히 많이 흔들리고 있는 거다. 지난번 4월 1일 이후부터 각 나라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협상들 보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나 자유무역협정 이런 체제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체제 자체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아쉬운 부분이다.”
즉, 조 바이든 정권 때까지만 해도 국제 분쟁 해결의 주문처럼 등장했던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이번 협상 과정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앞으로는 규칙이나 법, 제도가 아니라 ‘힘에 의한 질서’가 위세를 떨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암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한국과 관세 협상이 끝난 뒤 트루스소셜에 2주 안에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것이고, “새 대통령의 대선 승리를 축하한다”라고 투고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당선된 뒤 처음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과 ‘대선 승리 축하’를 직접 입에 올린 겁니다.
돈으로 정통성 사는 ‘신 조공 외교’ 시대의 도래
‘부정선거론’을 고리로 트럼프를 끌어들여 이 대통령을 압박하려는 국내 극우·종미 세력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겠지만,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신 조공 외교’ 시대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조공 외교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주변국 군주가 중화의 중심을 자처하는 중국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예물을 바치고 군주 지위를 인정받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때 중국 황제는 주변국 사신이 바치는 예물보다 훨씬 많은 물품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자유무역협정으로 0%가 돼야 마땅한 관세를 15%나 올려주고 486조 4천억 원(3천5백억 달러)의 대미 투자라는 ‘예물’을 바치는 대가로 당선 축하와 정상회담이라는 ‘책봉’을 받았으니, 가히 조공 외교의 재판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중화 체제의 조공 외교에서는 바치는 예물보다 받는 선물이 더 많았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받는 선물도 없이 막대한 예물만 바쳤으니 ‘신 조공 외교’를 ‘개악된 조공 외교’라고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재판을 문제 삼아 브라질에 50%의 보복 관세를 매긴 것, 러시아에서 원유를 대량 수입한다고 인도에 25%의 높은 관세를 부과한 것도, 변형된 조공 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 모자라면 국제적 합종으로 맞서야
트럼프 2기의 국제 관계는, 구질서는 확실하게 무너졌으나 신질서는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일찌감치 이런 상태를 ‘괴물들의 시대’, ‘위기의 시대’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혼자의 힘으로 판을 주도할 수 없는 나라들은 더욱 쉽게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큽니다. ‘국익 기반 실용 외교’를 내세우고 있는 이재명 정권의 외교가 큰 실험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한미 관세 협상 결과에 대해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라고 평가하면서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 되겠다’라는 말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힘이 없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 진나라의 천하 제패 과정이 보여주듯이, 약소국은 아무리 강해도 홀로 강대국을 상대해 이기기 어렵습니다. 작은 나라들은 자강과 함께 동병상련의 국가들과 힘을 합쳐 대응하는 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대할 때 각개격파의 연횡론을 구사하고 약소국은 일치단결의 합종론을 펴며 강대국에 맞서는 것은,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국제사회의 상식입니다.
광화문 천만 촛불 시위 사진에 담긴 ‘국민 중심 외교’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권자의 힘을 뒷배 삼는 ‘국민 중심 외교’의 중요성입니다. 이번 관세 협상에서 2008년 광화문에 모인 천만 명의 촛불 시위 사진이 쇠고기 등 미국의 거센 농축산물 개방 요구를 잠재운 도깨비방망이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협상 직전에 임동원·김중배·백낙청·김상근·함세웅·황석영·정세현·신인령·문정인·이부영 씨 등 사회 원로 10명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의 무도한 관세 및 국방비 인상 압박을 비판하면서 정부에 주권자인 국민을 믿고 당당하게 협상에 임하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결국 협상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자국민의 목소리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과 관세 협상이 한고비를 넘겼다고 결코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우선 관세 협상에서 서로 해석이 달리 나오는 부분을 유리하게 정리하는 샅바싸움이 남아 있고, 국방비와 방위 분담금 증액 요구라는 더욱 큰 산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한미 관세 협상이 남긴 교훈을 거울삼아, 험난한 각자도생의 시대를 국민과 함께 헤쳐 나갈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