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컥하면서 투표하고 먹먹하게 기뻐하는 사람들
이재명포비아와 악마화가 낳게 된 역설적 반작용
네거티브 인신공격과 단일화에만 매달린 보수진영
별 성과를 못 낸 이준석의 양두구육 사기극 시즌2
권영국의 타당한 방향 전환과 역부족이었던 이유
분열과 위기 속에도 여전한 기득권 카르텔의 힘
대선 승리를 넘어서 '빛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
이변은 없었다. 내란은 마침내 진압됐고 민주주의가 승리했다. 이번 대선 결과는 선거운동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다. 지난해 12.3 쿠데타라는 윤석열의 선제공격은 거꾸로 제2의 촛불혁명('빛의 혁명)을 불러냈다. 그리고 이어진 5개월 동안의 거대한 투쟁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고, 이번 대선 결과도 결정했다.
12.3 밤의 그 장면과 충격, 공포를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지난 6개월 동안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도, 한강진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투쟁하거나 그것을 응원하던 사람들이 분노와 희망을 담아서 투표한 결과가 이것이다. 이번처럼 조마조마하면서 울컥거리는 마음으로 투표를 했다는 사람들이 많은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이태원에서 가장 소중한 이를 잃은 가족들, 양회동 건설 노동자의 부인과 형제, 채해병의 부모님, 12.3이 성공했다면 목숨을 잃었을 수많은 '체포와 수거' 대상자들이 누구보다 먹먹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마음에 공감하면서 함께 기뻐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윤석열 3년과 12.3 쿠데타, 1.19 폭동, 윤석열 탈옥 사태와 조희대의 사법쿠데타 등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김문수의 압도적 패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억지스러운 구분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의 압도적 승리'와 분리될 수가 없었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당원과 지지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효능감을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재명과 민주당이 12.3 쿠데타의 진압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큰 무리 없이 잘 해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핵심은 윤석열 내란 세력과 기득권 카르텔이 지난 5년 동안 집요하게 매달려온 이재명 죽이기와 악마화 공세였다. 그것은 물론 우파 지지층을 묶어 세우는데 효과적이었고, 심지어 쿠데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혐오를 통해 김문수 득표를 40% 넘게 끌어올린 비결이었다.
하지만 이 지독한 마녀사냥은 이재명에게 억지로 만들기도 어려운 신화적 서사와 아우라를 선물해 줬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수많은 고난과 죽을 고비들을 넘기면서 피로써 다져진 전우애 같은 것을 형성하게 됐다. 또 윤석열과 김문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기득권 카르텔이 그토록 증오하는 이재명을 통해서 저들을 심판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사상 최대의 정적 죽이기 마녀사냥이 사상 최대의 표 차로 승리한 야당 지도자를 낳은 역설이다. 하지만 김문수는 이번에 마치 목마른 사람이 계속 소금물을 들이키듯이 오로지 이재명에 대한 인신공격과 네거티브에만 매달렸다. 실패로 끝난 '단일화'와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도 준비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네거티브 공세 말고 '뭘 하겠다'는 부분은 윤석열의 정책과 노선을 그대로 베낀 것밖에 없었다. 이것은 방금 윤석열의 실패를 목격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 밖의 김문수의 선거 구호들은 총체적 카오스만 보여 줬다. 투표하라면서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이승만을 찬양하면서 4.19도 찬양하는 식이었다. 한쪽에서는 윤석열과 손을 잡고, 한쪽에서는 윤석열과 선을 그었다. 즉, 김문수의 선거 전략과 방향에서 일관성과 정합성은 찾을 수가 없었다.
친윤석열, 친한동훈 등으로 쪼개진 국민의힘 지도부는 선거를 포기한 것처럼 당권만 노리며 보란 듯이 서로 물어뜯었다. 이것은 국민의힘과 기득권 카르텔이 직면한 분열과 위기를 드러냈다. 기득권 카르텔을 구성하는 국민의힘, 검찰, 족벌언론, 재벌은 이번 선거에서 긴밀한 협력이 아니라 손발이 따로 노는 각자도생의 장면을 거듭 보여줬다.
기득권 카르텔의 분열과 위기는 한덕수와 단일화 실패가 낳은 아노미적 상황뿐 아니라 이준석과 단일화 실패에서도 드러났다. 김문수와 이준석은 별로 다를 게 없는 정치적 방향 속에서 이재명 인신공격도 같이하면서도 끝내 단일화를 하지 못했다. 어떤 약속도 믿을 수 없고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서로에 대한 심각한 불신 때문이었다.
결국 이준석은 기득권 카르텔과 우파 지지층의 일부가 미래를 위해 자신에게 배팅할 것을 기대했겠지만, 성과는 커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준석은 낡은 보수우파를 넘어선 새로운 우파의 대안이 아니라 그냥 '40대 윤석열이나 김문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준 것이 대선 후보 3차 토론에서 이준석의 '젓가락' 발언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국민의힘이 계속 우려먹던 '이재명 형수 욕설' 공세를 더 야비한 방식으로 확장한 것일 뿐이었다. 결국 이준석이 강조한 '압도적 새로움'은 극우적 혐오정치의 새로운 업그레이드에 그치고 말았다. 이런 방식은 '기성세대와 다른 청년정치'라거나 '양당체체를 벗어난 제3지대'라는 식의 사기극을 펼치며 지지자를 확대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이민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막말로 어그로를 끌고, 노골적인 성폭력적 언행에도 오히려 대통령이 됐던 트럼프의 성공 모델이 존재한다. 보수우파의 위기를 기회로 여긴 이준석도 그것을 노리고 크게 얻거나 잃을 수 있는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 결과는 그것이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준석이 이재명을 집중 공격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듯이, 그 반대편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김문수와 이준석을 집중 공격했다. 이재명도 광장의 일부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광장에서 멀어지지 마라'고 요구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과거에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윤석열이나 이재명이나 별로 다를 게 없다'라는 양비론적 방식과 달랐고 훨씬 타당했다.
더구나 권영국 후보가 있었기에 그나마 이번 대선에서 정치개혁, 기후 위기, 한반도 평화에 대한 정책 토론이 가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권영국 후보는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소수자와 여성 청년들의 목소리를 가장 잘 대변한 후보였다. 20대 여성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가 그것을 보여 준다. 하지만, 진보정치의 분열과 정의당의 기존 방향이 낳은 쇠퇴의 흐름을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이 흐름을 되돌리려면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 정의당(과 노동당과 녹색당)의 지지자들을 단단히 묶어 세우면서 둘째, 진보당 등과도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셋째, 민주당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열려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했다. 권영국 후보의 선거운동은 이런 방향이 분명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방향을 막아서는 힘까지 여전히 내부에서 작동했다.
하지만, 다음 선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광장의 목소리를 실현할 투쟁 건설을 위해서도, 이런 세 가지 방향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이번 대선 결과는 각 당에서 자신들의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이미 그 결과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당원 중에 62만 명이 참가한 투표 속에 후보가 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당원 중에 40만 명이 참가한 투표 속에 후보가 됐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당원 4만여 명이 참가한 투표 속에 후보가 됐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는 당원 6500여 명이 참가한 투표 속에 후보가 됐다. 나중에 사퇴했지만 진보당 김재연 후보는 당원 2만8000여 명의 투표 속에 후보가 됐었다.
각 정당의 1년간 당비 수입의 규모를 비교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각 정당을 지지하거나 우호적인 주류언론, 유튜브 등 뉴미디어, SNS에서 영향력과 풀뿌리 조직의 규모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가장 크고, 국민의힘은 그보다 작고, 나머지 정당들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이다. 물론 주류언론으로 보면 국민의힘이 더 커 보인다.
그런데 이제 레거시 미디어의 시대는 저물고 있고, 뉴미디어들이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뉴미디어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튜브 방송들의 동시 접속자 수는 국민의힘과 극우를 지지하는 유튜브 방송들과 비교해서 압도적인 상황이다. 이번 대선에서도 주류언론들은 이준석 젓가락 발언조차 외면하고 유시민의 설난영 발언을 의제로 삼으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대선 막판에 진짜 의제로 떠오른 것은 뉴스타파가 특종 보도한 리박스쿨의 댓글공작이었다. 이것은 레거시 미디어의 쇠락과 뉴미디어의 힘을 보여 준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물론, 그럼에도 40%를 넘긴 김문수의 득표가 보여 주듯이 기득권 카르텔과 그 일부인 족벌언론들의 힘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이들은 먼저 이번 대선이 12.3 쿠데타의 결과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일으킨 내란세력을 심판하기 위한 선거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3자 구도'를 만들어서 이준석의 몸집을 키워준 다음에 '단일화'의 노래를 반복 재생했다.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양당 모두가 문제'라는 기계적 중립과 양비론도 또 우려먹었다.
이것은 김문수와 이준석의 인신공격과 이재명의 내란 비판을 모두 '네거티브적 진흙탕 싸움'으로 묶어서 정치 혐오를 부추기면서 결국 기득권 우파에게 도움이 됐다. '여성의 목소리가 사라진 대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광장의 목소리가 사라진 대선'은 바로 이들 주류언론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민주당의 '우클릭'도 기득권 카르텔의 압박과 무관하지 않았다.
물론 정확히 하자면 민주당은 원래 중도 좌우를 포괄하는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보수 인사의 영입도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벌어진 것은 이재명의 민주당 적응과 장악이었다. 그러면서 과거에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을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싶다'던 변방의 비주류 이재명은 이제 실용주의를 강조하는 주류 정치인으로 변화한 상황이다.
물론, 여기에는 양면이 있다. 이재명의 우클릭과 민주당 장악은 맞물린 과정이었고, 그렇게 힘을 다지고 키운 민주당은 이제 국민의힘의 지역적, 정치적 기반을 갉아먹고 있다. 그래서 오랜 일당독재 속에서 만들어지고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서 기반이 확대된 보수정치 카르텔은 곳곳에서 금이 가고 갈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 또한 '빛의 혁명'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제 등장할 이재명 정권은 지지자들의 요구뿐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도 검찰, 언론, 사법부 등 기득권 카르텔과 권력기관에 대한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마저도 결코 만만치 않고 결사적 저항과 반발에 부닥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재명이 이번 대선에서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당장은 어렵다'고 한 차별금지법 제정 등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진보당과 조국혁신당, 사회운동 단체들이 민주당에게 약속받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광장대선 연합정치 시민연대–제 정당 연석회의 공동선언문'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담긴 성평등과 사회대개혁에 대한 추상적인 약속들은 민주당의 의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회운동이 얼마나 더 강력하고 폭넓게 힘을 모으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더 구체화되거나 실현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팔짱을 끼고서 민주당 정부만 탓하면서 개혁의 동력이 될 투쟁과 연대를 건설하지 못한다면, 문재인의 실패가 윤석열의 등장을 낳은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당분간, 기득권 우파와 권력의 카르텔은 위기와 분열을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그들에게 반격의 무기는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광훈 등 극우 행동대들의 존재, 이재명포비아와 악마화, 젠더와 세대 갈라치기, 종북몰이와 혐중몰이, 트럼프가 보여주는 국제적 극우화의 물결이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브라질에서 사법쿠데타의 피해자가 됐다가 2022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복귀한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의 경험을 이재명과 비교한다. 당시에 극우 대통령 보우소나르는 쿠데타까지 시도하며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역사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그것이 끝이 아니다. 보우소나르는 아직도 구속되지 않았고,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보우소나르의 자유당은 다시 주요 도시를 장악했다. 반면 룰라 대통령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이런 그림이 반복될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다. 12.3 밤의 그 장면과 충격, 공포, 분노를 절대 잊을 수 없기에, 지난 반년이 일단락되는 어제는 알 수 없는 슬픔, 희망, 두려움 속에 하루가 지났다. 이번 대선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고, 앞으로 또 어떤 견해 차이가 있더라도 우리 모두가 12.3 밤에 같이 분노하며 일어섰고, 6개월 동안 울고 웃으며 함께 싸웠고, 앞으로도 진정한 개혁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의 윗자리에 누가 앉아 있느냐보다 거리와 광장에 누가 앉아 있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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