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언론 '북한군 러 파병' 국정원 발표 크게 보도

사실 확인 않고 받아쓰기로 안보위기 고조시켜

북한이슈로 김건희·검찰 향한 국민 분노 은폐

과거 국정원 숱한 오보에 여론조작·정보무능도

그럼에도 주류 언론들 국정원 맹신하며 받아써

국정원·검찰 받아쓰기 언론 탓에 언론위기 커져

국가정보원 로고. 국정원 홈페이지
국가정보원 로고. 국정원 홈페이지

지난주 18일 이후 주말·휴일 동안 모든 언론은 ‘북한 특수부대의 러시아 대규모 파병’ 소식으로 도배됐다. 18일 저녁 KBS 9시 뉴스는 “북, 우크라전에 특수부대 1만2천명 파병…천5백명 1차 파견”이라는 제목의 톱뉴스부터 시작해 무려 9개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토요일인 19일과 일요일 20일에도 KBS의 톱뉴스는 ‘북한군 러시아 파병’이었다.

종일 뉴스채널인 YTN은 18일 저녁부터 밤새 이 소식을 반복해서 전했고 19일에도 아침부터 하루 종일 전문가 대담 등으로 북한군 파병 의미와 전망을 다뤘다. 다른 지상파, 종편 방송도 비슷했다. 거의 모든 주류 신문들은 관련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고 다른 지면을 털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언론 보도가 이 정도면 주말 이후 우리나라의 최대 이슈는 확실해졌다. ‘북한 특수군 1만2천명 러시아 파병’ 뉴스 때문에 주말·휴일 동안 다른 정치·경제 이슈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언론에서 사라진 이슈 중엔 김건희 씨의 온갖 의혹과 그런 김건희 씨에게 무죄 결론을 내린 검찰에 대한 국민의 들끓는 비판 여론이 있다. 

윤석열 정부의 ‘무인기 평양 침투설’로 불안해하던 국민들은 ‘북한군 러시아 파병’ 뉴스에 또 한 번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한반도 안보지형을 뒤흔들고 있다”는 KBS 9시 뉴스 앵커의 말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혹시 이러다 전쟁이 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사흘간 언론의 톱뉴스를 장식하고 국민들을 불안케 한 이 뉴스는 정말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한·미·일 동맹과 북·러 동맹이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위협 구도로 현실화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간 군사충돌 위기가 높아지는 상황이라 더욱 위험하다. 

 

10월19일 토요일 발행된 주류 신문들의 1면 톱 기사. 
10월19일 토요일 발행된 주류 신문들의 1면 톱 기사. 

그러나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국정원의 발표 내용을 우크라이나 말고는 확인해 준 곳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개입해온 미국과 나토는 공식적으로 ‘확인 중’이라고만 했고 파병 받았다는 러시아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파병 당사자인 북한도 확인해준 사실이 없다.

이 보도의 출처는 단 한 곳, 한국의 국정원 뿐이다. 국정원이 언론에 배포한 ‘북한 특수부대 러·우크라 전쟁 참전 확인’ 제목의 보도자료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기해 보도한 것이다. 모든 언론은 ‘국정원에 따르면’이라고 기사 출처를 밝혔다.

우크라이나 군 정보국과 국정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볼 여지도 있다. 국정원이 증거로 내놓은 사진과 영상자료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상은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장면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군인들은 북한군이 아니라 지난 9월 러시아-라오스 합동군사훈련에 참여한 라오스 군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동영상 속 군인들이 북한 사람이 아닌 라오스인처럼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과 우크라이나 정보 당국의 발표 이후 나온 미국·나토의 후속 발표 역시 ‘사실이라면’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다.

일부 국내 학자들과 전문가들은 SNS에서 다른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전쟁 중 가짜뉴스를 생산·유포해온 우크라이나 군 정보국이 생산한 뉴스를 질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언급하고, 이를 한국 국정원이 보도자료로 만들어 배포하고 언론이 받아쓰기했다는 것이다.

 

10월18일 KBS 뉴스9 톱뉴스 화면 갈무리. 
10월18일 KBS 뉴스9 톱뉴스 화면 갈무리. 

그러나 대부분의 주류 언론은 이 소식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사실이 아니거나, 조작됐거나, 과장되었을 것이라 의심하는 기사는 주류 언론에서 단 한 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론은 과거 국정원 보도자료나 흘려주기 정보에 속아 오보를 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처음부터 국정원이 오보를 만들어낸 적도 많다. 국정원이 ‘오보 제조기’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국정원이 공식적으로 낸 보도자료를 언론이 받아쓴 것이니 신뢰할 만한 보도인가? 그 전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언론은 국정원이 낸 보도자료는 확인 없이 이렇게 단정적으로 받아써도 되는 것인가?

국정원의 오보와 정보수집 무능력 사례는 알려진 것만 해도 여럿이다. 지난 2016년 국정원이 개성공단 철수 직후 처형당했다고 발표했던 전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 리용길이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적이 있다. 2012년 국정원은 북한 로켓 추진체에 문제가 생겨 해체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고 언론이 이를 받아 보도했는데, 다음날 북한은 보란 듯이 장거리 로켓발사에 성공했다.

2011년에는 국정원이 ‘김정은 단독 방중’이란 정보를 청와대에 보고하고 발표까지 했다. 국정원 발표를 가장 먼저 보도하는 연합뉴스가 이를 긴급 뉴스로 내면서 수많은 다른 언론들이 이를 받아썼다. 그러나 이 뉴스도 며칠 뒤 오보로 확인됐다.

국정원의 정보수집 무능이 드러난 적도 자주 있었다. 국정원이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을 국정원은 사흘간(52시간)이나 모르고 있다가 북한 중앙TV를 보고 알게 된 사건은 국정원을 세계적인 ‘바보 정보기관’으로 만들었다. 야당은 국정원을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동네정보원’이라고 불렀다.

국정원은 정보수집에는 무능하지만 정보조작에는 열심이었다. 2012년 대선 때 국정원은 댓글부대를 은밀히 가동시켜 정보와 여론조작에 나섰다가 들통난 적도 있다. 2013년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도 다 알려진 사실이다. 과거 국정원이 가짜 정보를 언론에 흘려 여론몰이 조작을 해온 것은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2016년 9월15일자 뉴욕타임스 기사 화면 갈무리. 
2016년 9월15일자 뉴욕타임스 기사 화면 갈무리. 한국 국정원이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선택되거나 입증되지 않은 정보를 유출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국정원의 정보 무능과 오보, 가짜정보 생산이 잦아지자 해외 언론이 한국의 국정원을 조롱하는 보도를 낸 적도 있다. 2016년 9월 뉴욕타임스는 ‘소문, 오보와 익명성(Rumors, Misinformation and Anonymity)’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국정원은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선택되거나 입증되지 않은 정보를 유출한다고 비판받고 있다”고 썼다. 워싱턴포스트도 비슷한 시기에 ‘많은 실수는 한국 정보기관의 붕괴를 뜻하나?(Do blunders mean South Korea’ spying apparatus is broken)’ 제목의 기사로 한국의 국정원을 조롱했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은 여전히 국정원을 두텁게 신뢰하고 있다. 맹신(盲信) 수준이다. 국정원이 발표하면 한국 언론들은 받아쓴다. 언론이 보도하는 북한 관련 뉴스의 거의 대부분은 ‘국정원 발(發)’이다. 언론에 ‘정보 당국’ ‘북한 소식통’ ‘대북 관계자’로 나오는 취재원은 거의 모두 국정원 직원이라고 한다.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한국 언론은 오로지 국정원을 통해서만 북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언론은 국정원 발표를 의심 없이 받아쓰기만 해온 것이 사실이다.

국정원은 북한 관련 정보를 독점하면서 국가기간통신사인 연합뉴스나 조선일보 같은 이른바 ‘보수언론’을 통해 정보를 흘려 ‘필요한 때’에 북한 관련 이슈를 만들어내 왔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이명박-박근혜와 윤석열 정부에서도 뜬금없이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 발표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보수 언론’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쓰기 보도하면 극우세력이 ‘좌파몰이’ ‘빨갱이몰이’로 여론에 색깔론을 퍼뜨리는 방식이다. 정통성 없는 정권이나 무능한 정권이 이를 감추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국정원을 활용한 것이다.

이번 ‘북한군 러시아 파병’ 보도에서도 이런 모습이 보이고 있다. 북한군의 파병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언론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 국정원 보도자료를 받아쓰기해 신문 1면과 방송 메인뉴스 톱을 도배하고 하루 종일 같은 얘기를 반복할 게 아니라 일단 사실 확인에 나섰어야 했다.

받아쓰기 보도를 하더라도 적어도 국정원 발표가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했다. 언론은 그동안 여러 번이나 국정원의 틀린 정보, 가짜 정보에 속아놓고도 이번에도 일단 받아쓰고 보자는 식이다. 언론의 확인 보도는 저널리즘의 기초다. 북한 관련 뉴스는 나중에 오보임이 확인돼도 북한이 정정보도를 요청하지도, 손해배상을 청구하지도 않으니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니 ‘아니면 말고’ 식으로 사실인지 오보인지 확인하지 않고 받아쓰는 것이다.

 

2016년 9월 시사저널 1827호의 "국정원이 발표하는 정보는 거의 여론몰이용이다" 기사 화면 갈무리.
2016년 9월 시사저널 1827호의 "국정원이 발표하는 정보는 거의 여론몰이용이다" 기사 화면 갈무리.

사실 확인 노력과 함께 국정원의 발표가 이 시점에서 왜 나온 것인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도 짚어봐야 한다. 그동안 국정원이 북한 관련 정보를 국내 정치용, 여론몰이용으로 악용했던 여러 사례를 감안해야 한다. 이번 ‘북한군 파병’ 자료로 언론이 북한 관련 이슈를 쏟아내는 동안 김건희 씨와 검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묻혀버릴 것이다.

온 나라를 사흘째 뒤흔들고 있는 ‘북한군 러시아 대규모 파병’ 뉴스는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된 보도가 아니다. 만약 사실로 확인된다면 KBS의 주장처럼 한반도 안보에 위기가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오보나 조작정보, 과장정보로 드러난다면 그것은 한국 언론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국정원, 검찰, 기재부 받아쓰기에다 정유라, 진중권 류(類)의 말을 받아쓰며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언론들 때문에 언론의 위기는 이미 보통의 위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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