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15주기, 그를 진정으로 기리려면

'탄신'으로 신격화하기, 그를 훼손하는 일

평생 '학생'이었던 이, 숭배 아닌 '친구'가 돼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명재 에디터
이명재 에디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5주기를 며칠 뒤에 맞는다. 2009년 8월 18일, 그의 급작스러운 타계는 지금에도 그의 부재의 크기를 남아 있는 이들의 가슴 속에 더욱 키우고 있다. 또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해서 여러 추모 기념 행사가 연중 내내 벌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김대중 탄신 100년'이라는 말이 붙은 행사들이 눈에 띈다. '김대중 탄신 백주년' 평화음악회와 같은 행사들이다. 

'탄신'이라는 용어에는 김대중에 대한 벅찬 존경의 마음, 또 ‘거인 부재’의 시대에 큰 인물을 찾는 심정이 배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같은 경외와 추앙의 발로에서의 행위는 동시에 그를 오히려 훼손하는 일이 되고 있다. ‘탄신(誕辰)'은 성인이나 옛날의 임금에게 붙이던 극극존칭으로 ‘신격화’를 하는 것인데, '우리 역사의 뛰어난 인물의 출생에 대해 탄신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은 오랫동안 단 두 명,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칭호를 그 두 분도 과연 좋아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탄신’이라는 말에는 그 출생에서부터의 지상의 다른 존재들과는 다른 비범성과 같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그렇다면 이는 그 위인을 오히려 천지인(天地人)의 기운을 운 좋게 내려 받아 그렇게 훌륭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 존경의 마음을 담겠다는 의도가 오히려 그 분들을 죽이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성인으로 추앙되는 석가도 그렇고 공자도 그렇고 예수도 정작 그 자신들은 ‘나를 결코 신격화하지 말라’고 생전에 신신당부했듯 나는 이분들에 대해서조차 탄신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 자신이야말로 그러길 원하지 않았던 바라고 보거니와, 타고나기를 위대하게 태어났다고 신격화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평생의 정진과 고투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다.

 

3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내 김대중홀에서 한 시민이 고(故) 김대중(DJ) 대통령의 생애와 흔적이 담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2024.1.3 연합뉴스
3일 광주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내 김대중홀에서 한 시민이 고(故) 김대중(DJ) 대통령의 생애와 흔적이 담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2024.1.3 연합뉴스

그럼에도 세종대왕과 충무공 두 분이야 워낙 온 국민의 일치된 존경을 받는 분이고, 오랫동안 이 말을 써 왔기에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자꾸 탄신이라는 말을 새로 붙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니 이게 새로운 유행이라도 되는 듯하다.  20대에 숨진 어느 독립투사의 출생을 기리는 음악회 안내문에 ‘000 의사 탄신’이라는 표현을 쓴 걸 보게 됐는데, 존경의 마음을 더 많이 담아 기리고 싶은 심정의 발로라는 건 알겠지만 이는 ‘위인’을 기리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1979년에 횡사한 어느 독재자를 ‘반인반신(半人半神)’으로 모시면서 탄신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이 '탄신 유행'의 한 시초였던 듯하다. 그 독재자에 대한 숭배가 신앙의 수준에까지 이른 단면으로 보여 씁쓸했는데, 그런 것을 가장 닮지 말아야 할 이들이랄 수 있는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에 '탄신'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고 과연 무덤 속의 그 이는 과연 좋아할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김대중은 평생을 민주주의와 평등, 온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바쳤다. 주역의 건괘(乾卦)에 나오듯 '무수(無首)', 우두머리가 없는 것, 또는 모든 이가 저마다의 뭔가로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한 사회의 발전의 방향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탄신'과 같은 말을 쓰는 것은 그 사회의 퇴보이며 역진의 한 현상이다. 가당찮게 ‘탄신’이라고 함으로써 실소와 분노를 자아내는 어느 독재자 추종자들의 행태를 바로잡기보다는 오히려 그걸 따라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김대중은 결코 완성된 자로 내려온 것이 아니었고, 완성돼서 이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는 불굴의 인간이라기보다 굴하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었다. 사후에 완성된 자서전에서 스스로 털어놓듯 '소년 김대중'은 형제들 가운데 가장 겁이 많았다고 한다. 밤중에 혼자 측간을 가는 것이 두려워 누나가 데려가 줘야 했을 정도다. 겁 많고 내성적이던 소년이 훗날 독재와 맹렬하게 싸우게 된 것은 겁이 없어서가 아니라 겁을 내면서도 꺾이지 않으려는 용기를 냈기 때문이다.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펼친 고 이문영 교수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자서전의 제목으로 삼았듯이 그의 불굴과 용기는 '겁 많은 자의 용기’였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나는 일생동안 끊임없이 공부했다”면서 “두려워 울면서도 미래를 설계했다”고 자신의 삶을 돌아봤다. 다섯 번의 죽음의 고비, 6년간의 수형 생활, 수십년 간의 망명과 연금 그 파란 점철의 삶에서 그는 두려웠고 울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두려움과 울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려는 용기를 냈었고, 그것이 김대중을 만들었던 것이다. 

올해 초에 개봉된 <길 위에 김대중>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그는 "나는 늘 길 위에 있습니다. 누가 부르든지 늘 달려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말대로 늘 길 위에서 펼쳐졌던 그의 정치역정이었다. 그는 항상 길 위에 있었고, 또 늘 공부했다. 그래서 그는 교사라기보다는 '학생'이었다. 항상 ‘학생’을 잊지 않음으로써 결국 뛰어난 교사가 된 것이었다. 김대중을 진정으로 기린다는 것, 그것은 그를 저 높이 받들고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살아 보는 것, 그와 같은 '학생'이 되는 것, 무엇보다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되지 못하면 스승이 못 되고, 스승이 못 되면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옛 현인의 말처럼 그와 친구이며 제자이며 또한 스승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김대중에 대한 추모는 그에 대한 추종으로써 '김대중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다. 김대중을 '따라가면서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 ‘김대중 선생님’이라는 추앙과 숭배의 족쇄로부터 그가 화석화되지 않도록, 김대중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어받는다는 것은 그 자산과 함께 모순과 한계까지 함께 떠안는 것이다. 

예컨대 남북한 교차승인이라는 50년 전 김대중의 공약이 아직도 미완인 오늘날, 그의 부재를 더욱 절감하게 하는 요즈음의 남북 대결 현실에서 김대중이 우리를 만들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김대중을 만드는 것이 그에 대한 진정한 추모가 될 것이다. 김대중을 저 천상으로 올리는 게 아닌 지상으로, 우리와 친구로서, 같은 학생으로 함께 있게 하는 것, 그럴 때 우리는 김대중을 진정으로 추모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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