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각 분야 전문가들을 대체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법률 사무는 가장 먼저 AI로 대체될 것으로 예측된 분야 중 하나였다. 정보기술(IT) 강국으로 꼽히는 국내에서도 향후 법률 사무에서 챗GPT의 사용이 점점 더 확대될 것이며, 그 결과 로펌의 업무처리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일선에서 뛰는 송무 변호사로서 나는 정작 변호사 업무에 AI를 적용하는 것이 기대처럼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국내 몇몇 대형 로펌들은 최근 소속 변호사들에게 업무에 챗GPT 사용을 공식 금지했다. 이 같은 결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첫째, 챗GPT에는 아직 기술적으로 중대한 흠결이 존재한다. 둘째, 사용하는 변호사들이 프론티어 엔지니어링 훈련을 받지 않을 경우 AI에게 지시를 잘못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 AI를 업무에 활용할 때 필요한 법조 윤리가 아직 미비하기 때문이다.
갈 길 먼 법률 사무의 챗GPT 활용
미국과 달리 우리 법조계가 AI 활용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데에는 결정적인 다른 사정이 있다. 바로 재판기록의 폐쇄성이다. 나는 법률 사무에서 AI 활용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 관한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공론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헌법 제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다만, 심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법원의 결정으로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즉,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가 원칙이되, 심리는 예외적으로 ‘법원의 결정’으로 비공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공개 재판의 원칙이라고 한다.
공개 재판의 원칙은 우리뿐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사법 원리이다. 원칙적으로 공개 범위는 ‘심리’와 ‘판결’이므로 재판의 최종 결과물인 판결문뿐 아니라 심리 과정에서 제출된 각종 서면과 증거(이하 ‘재판 기록’) 역시 공개돼야 마땅하다. 이 원칙이 잘 확립된 미국의 각 주에서는 재판기록을 일종의 공공기록물로 취급해 시민 누구에게나 접근 권한을 보장한다. 다만 최소한의 개인 정보와 기업 내부의 기술 문서, 회계 정보 등은 재판부의 비공개 결정을 통해 선별적으로 가려진다.
재판이 시작되면 미국 변호사의 주된 업무 중 하나가 바로 공공기록으로 공개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재판부에 소명해 비공개 결정을 받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면 비공개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원칙에 따라 시민에게 공개된다. 이처럼 미국에서 재판기록의 공공기록화는 AI가 등장하기도 훨씬 전부터 민주주의의 일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건국 이후 200여 년간 법률 사무 분야에서의 AI 활용을 준비해 온 셈이다. 특히 최근 20여 년에 걸쳐서는 모든 재판기록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도적, 기술적 보충만 이루어지면 AI가 언제든지 미국의 모든 재판기록에 접근할 수 있다.
반면 국내에서 재판기록은 전혀 공공기록화 하지 못했다. 헌법에는 법원의 비공개 결정이 있어야만 예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돼 있는데, 국내에서는 처음부터 기록이 공개되지 않으니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예외가 오히려 원칙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판결문에 대한 접근권 역시 극히 제한돼 있다. 일반 시민이 국내 각급 법원이 내린 판결문을 열람하려면 대법원 사이트에 들어가 예약을 신청하고, 정해진 날짜에 대법원 도서관을 방문해 제한된 시간 동안 대법원 내부 컴퓨터를 이용해야만 한다. 예약은 하루에 단 20명만 가능하다. 이처럼 판결문에 대한 접근조차 매우 취약한 현재 환경에서 AI가 활약할 수 있는 여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법률AI의 딥러닝을 위해서는 판결문과 재판기록이 학습자료로서 풍부하게 제공돼야 하는데 말이다.
법률AI는 재판기록의 공공기록화 선행돼야 가능
판결문과 모든 서면과 증거에 접근할 수 있게 될 경우, AI는 다양한 기능을 갖추게 될 것이다. 특정 사례에서 어떤 증거가 재판부의 신뢰를 얻었고 얻지 못했는지, 계약서의 어떤 조항이 훗날 어떤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 금전적 배상액이나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에게 부과된 형량의 평균치를 예측하고, 담당 판사나 배심원들의 성향 분석 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재판기록이 더 폭넓게 공개되고 수월한 접근을 가능하게 할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제기됐지만 여러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정부 수립 이후부터 누적돼 온 막대한 기록을 정리하고 전자기록화하는 작업은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민사 재판에서 전자소송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2010년 이후에도 형사재판은 여전히 종이 문서를 통해서만 진행되고 있다. 현재 사법부의 인력만으로는 이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대규모 국가 예산 투입은 필수적이다. 전자기록화된 재판기록의 공개 여부와 범위, 방식에 관하여 국회의 입법도 필요하다.
재판기록의 공공기록화는 시민의 권리이자 AI시대를 준비하는 사회적 인프라 구축의 의미가 있다. 법률 사무에 AI 활용도가 높아진다면 기업과 개인은 많은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사법 불신이 해소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신용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향후 10년, AI의 적합한 활용이 그 사회의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법률 분야에서 AI가 실용화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누군가는 재판기록의 공공기록화를 설계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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