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확인 않고 땡처리 채권에도 지급명령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지인의 부탁으로 2000만 원의 빚 보증을 섰던 김모씨, 이미 채무 당사자는 2015년에 개인 파산으로 면책을 받았다. 김씨는 채무자가 파산 면책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빚 보증도 당연히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 법원에서 문서 한 통을 받았다. 26년 전 빚보증의 채무는 물론 연체 이자까지 갚으라는 지급명령서였다.
은행권의 가계대출 연대보증제도는 2008년에 폐지되었고 2013년 제2금융권에서도 사라졌다. 이처럼 연대보증제도는 과거의 유물이 되었지만, 제도가 폐지되기 이전에 보증을 섰던 사람들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주채무자가 연체를 하게 되면 보증인이 대신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폐지되기 전까지 제2금융권의 연대보증 채무금액은 전체 대출액의 14%를 차지하고, 연대보증인 수가 155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법은 사라져도 빚은 남았다?
사례의 김 씨처럼 오래된 채권에 대해 한참동안 추심이 이뤄지지 않다가 느닷없이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서가 날아오는 경우가 있다. 이때 채무자들은 법원의 지급명령서이니 법적 효력이 분명할 것이란 생각에 크게 당황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김씨의 채권은 상환 의무가 없는 채권이다. 소멸시효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통상 금융회사들의 채권은 연체 후 5년이 지나면 회수 권리가 사라진다. 이를 채권의 소멸시효라고 한다. 다만 「민법」은 채권의 소멸시효를 연장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두고 있다.
대표적인 시효 연장 수단으로 채권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은 지급명령이다.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보다 간단하고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법원의 전자소송을 통해 신청이 가능하고 인지대와 송달료만 부담하면 된다. 채무자의 심문없이 채권자의 신청만으로 진행되는 약식재판 절차이다. 지급명령 후 채무자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확정이 되어 채권의 소멸시효는 다시 10년간 연장된다. 죽었던 채권조차 간단한 약식재판 절차로 10년의 생명을 다시 얻는다. 김 씨의 채권은 소멸이 완성된 이후에 지급명령서가 송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김씨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면 채권은 다시 살아난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채권자는 도대체 왜 죽은 채권에 대해서까지 지급명령을 신청했을까? 그리고 법원은 소멸이 완성된 죽은 채권임에도 채무자에게 지급명령서를 송달하고 있다는 말인가? 채무자 입장에서 법원의 지급명령서는 대항할 수 없는 법적 효력을 지닌 압박으로 여겨진다. 설마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에 대해 법원이 확인도 않고 채무자에게 지급명령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한다.
땡처리된 빚에 대한 무차별 지급명령 신청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을 부실채권이라 하고, 금융회사들은 이 부실채권을 장부상 손실처리 한 뒤 대부업체나 자산관리 회사에 매각한다. 부실채권이기 때문에 헐값에 매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실채권이 쏟아지는 양에 따라 그리고 채권의 차주신용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채권 원금의 20~30% 정도에 매각되고 있다. 그러나 부실채권의 양이 늘어나면 이 가격은 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2017년 8월말 기준, 상위 20개 대부업체가 보유하고 있는 부실채권 244만 건을 분석한 결과 매입 가격 평균이 6.4%였다. 1000만 원짜리 연체 채권을 가정할 경우 겨우 64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채권은 한 차례만 매각되는 것이 아니다. 244만 건 중 1회 매각된 채권은 133만 건, 2회 매각된 채권은 56만 건, 3회 매각된 채권은 23만 건, 6회 이상 매각된 채권도 1만 3000건에 달했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채권자가 6차례나 바뀌어 추심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땡처리 된 채권인 셈이다. 땡처리로 채권을 매입한 대부업체들은 매입한 채권에 대해 일괄적으로 지급명령을 신청한다. 법원의 전자소송으로 일괄 신청하기 때문에 채권의 소멸시효 같은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채무자들이 이의제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채권도 살릴 수 있다. 채권자 입장에서는 소송문서 제출 부담의 감소, 소송 비용의 절감 등, 전자소송 제도를 통한 사법서비스 덕을 톡톡히 본다.
반면 법원은 채권자의 지급명령 신청에 대해 채권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지 않는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잠자는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법원의 논리가 채권시장에서는 비정하게 작동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결국 채권자를 대신해 법원이 법원의 권위를 실어 존재하지 않는 채권에 대해서도 지급명령을 실행한다.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11조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채권의 추심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하는데 법원 스스로 법을 위반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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