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32년 전으로 되돌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명재 에디터
이명재 에디터

32년 전 5월 하순의 어느 날, 거리마다에 장미꽃이 피어나던 그 봄날의 어느 날, 꽃다운 나이의 여학생, 아니 그 자신이 꽃이었던 한 여학생의 목숨이 거리에서 꺼져가고 있었다.

이 여학생은 자신을 때리는 백골단에게 이렇게 애원한다.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저 죽어요.”

그러나 백골단은 “이년아, 집에서 공부나 하지 데모는 왜 해”하며 구타를 멈추지 않는다.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에서 이렇게 무차별 난타를 당한 여학생은 의식을 잃었고 그녀의 몸은 최루탄 가스 자욱한 그 거리에 한동안 그대로 놓여 있었다. 뒤늦게 다른 대학의 남학생이 이를 발견하고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만 백골단은 그런 그에게도 무차별 몽둥이질을 했고, 할 수 없이 그는 골목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한겨레신문 취재차량에 태워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스물 다섯 여학생의 거리에서의 죽음

대학 입학 식 때의 김귀정의 모습. 
대학 입학 식 때의 김귀정의 모습. 

이 여학생의 이름은 김귀정, 성균관대 불문과 4학년이었다. 나이는 스물 다섯. 대학생으로는, 특히 여학생으로는 적잖은 나이였던 것은 그녀가 원래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있다가 다시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동아리 심산학회 회장을 하며 적극적으로 학생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했던 김귀정은 비가 내리던 이날 거리 시위에 참여했다가 살인 폭력에 의해 그 생명을 마감했다(이상 지승룡 민들레 영토 대표의 2022년 5월 25일 페이스북 글에서 인용).

오늘 김귀정의 죽음을 다시금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짧았던 삶, 너무도 짧았던 삶을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안 사정으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들어온 대학에서 후배들에게 든든한 언니였던,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 20대 아가씨가 꿈꿨을 미래, 이루고 싶었던 꿈을 생각한다.

그때 김귀정이 있었고, 다른 많은 ‘김귀정들’이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거리에 나섰던 것은, 강의실 대신 거리에 나와서 백골단이 던진 “하라는 공부는 왜 안 하고”라는 말처럼 왜 강의실에서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아니 학교가 아닌 거리에서야말로 진짜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왜였는가.

그 떠올리기만 해도 살벌한 백골단의 폭력에 몸을 떨면서도 교문을 박차고 나왔던 것은 왜였던가.

거기에는 대단한 결단, 비장한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다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차마 그러지 않을 수는 없어서였을 것이다.

김귀정은, 이 만학의 젊음은 열심히 살았다. 김귀정과 다른 ‘김귀정들’만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때의 젊은이들, 대학생이었건 아니었건, 그때 젊은이들은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들의 열심은 자신의 내일을 위한 것이었고, 오늘보다 더 나은 자신의 내일을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다만 적잖은 이들에겐 자신의 내일만이 아니라 이웃까지, 아니 전혀 모르는 이들의 내일까지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만인의 자유를 위해 싸울 때 그때라야 나는 자유다’라고 한 김남주 시인의 시와 같은 결연한 의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다른 이들의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한켠에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안녕을 살피는 마음뿐일 때는 나올 수 없는 용기와 결심을 하게 됐을 것이다.

김귀정과 다른 김귀정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늘이 있게 된 데에는, 거리의 시위 대열에 함께 어깨를 겯지 않더라도, 학교 도서관에서 오로지 자신의 내일을 위해 법전을 파고들던 이들에게조차도 도서관에 사복 차림의 경찰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몸을 뒤지고 무릎을 꿇리는 일을 언젠가부터 겪지 않게 된 데에는, 그런 김귀정의 마음이 있었던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난 70년대, 80년대의 어느 날을 아직도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사망한 지 18일 만에 다니던 성균관대에서 치러진 김귀정의 영결식.
사망한 지 18일 만에 다니던 성균관대에서 치러진 김귀정의 영결식.

한 사회를 '사회'로 만들어주는 것

지난 80년대의 숨 막히고 기가 막히는 시절이 ‘있었다’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고 우리가 옛날 얘기하듯 웃으면서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러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 윤정모 선생, 시대의 모순과 맞섰던 이 담대한 작가가 지금에도 그 시절을 얘기할 때면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런 시절은, 우리가 그냥 흘러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시절을 지나온 것이 아니라 헤쳐온 것이며, 그것은 적잖게 우리 사회의 김귀정들이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거기에는 누군가의 땀이 있었고, 피도 있었으며,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목숨까지의 희생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처절함도 있었고, 김귀정과 같은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은 이도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들의 내면에서의 죽음들도 있었다.

김귀정이 죽은 뒤 3년 뒤에 그녀의 언니의 딸, 그러니까 김귀정의 조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수영선수가 됐고, 씩씩한 태도와 용모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정유인이라는 이름의 이 젊음은 자신이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이모 김귀정과 눈매가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젊은이는 아마 아는 것 같다. 자신이 앞만 보고 물살을 가를 수 있었던 것은, 윤정모 작가처럼 마음 졸이지 않고 거리를 맘껏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이모 김귀정, 김귀정들, 그리고 그와 함께 거리에 나서지는 못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그걸 지켜보며 마음은 그와 한편에 있었던 이들의 기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렇게 어린 청년도 그걸 안다.

30년 전에 거리에서, 도서관에서 각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았던 이들은 이제 다들 뭔가가 돼 있다. 그중의 어느 일부에는 열심히 법전을 외워서 대통령이 된 이도 있고, 법전만 읽느라 도서관 창밖을 내다볼 시간이 없었던 듯한 어떤 이는 그 최고권력자의 지극한 총애로 장관이 돼 있기도 하다. 그런 이들을 맹목으로 받드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 있건, 무슨 일을 하건, 젊은 날을 어떻게 보냈건, 저마다 자신의 삶에서 어떤 최선을 다했건 누구에게라도 한 가지 반드시 없어선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김귀정이 있었다는 것, 김귀정의 죽음이 있었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 '기억'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하나의 인간의 사회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에 속하는 일인데,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다. 자기 안의 ‘인간’에 대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에 대한, 그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고서는 어떤 사회도, 어떤 나라라고 하는 것도, 그리고 어떤 ‘자유’도 있을 수 없다.

경찰이 농성 중인 노동자의 머리를 내려쳐 피를 흘리는, 91년으로부터 32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인지 믿기 힘든 장면을 보면서, 최루탄 캡사이신이니 하는 얘기를 스스럼 없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김귀정을 다시 생각한다. 숨이 끊어진 지 18일이 지나서야 모교에서 후배와 친구들의 영결의 배웅을 받을 수 있었던 김귀정을, 다시 그날을 앞두고 있는 즈음, 올해의 그 즈음에 더욱 생각하게 된다. 또 다른 김귀정을 예고하는 듯한 저 무례 무도한 이들의 언행을 들으면서 그의 생전의 웃음을, 그리고 그의 마지막 생의 순간의 비명과 고통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이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다면 그가 터뜨릴 하늘 위에서의 그의, 김귀정의 오열을 생각한다. 우리가 '인간'이라면 그 오열을 견뎌내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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