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하나는 우리가 매일 뉴스로 접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상황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 내에서 발생한 은행권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긴급 현안과 더불어 신뢰가 위축된 달러의 위상을 유지하는 일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직면한 위기는 하루 아침에 발생한 것이 아니며 기본적으로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와 전망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 미국이 겪는 잠재적인 경제 위기는 통화 정책을 포함하여 미국의 장기 정책에 대한 패착에서 비롯되었다.
금융 중심의 거짓된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연준은 무제한으로 화폐를 남발하여 인플레이션을 치솟게 했으며, 이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하여 긴축통화 정책을 취하면서 결국 금융 시장에 혼란을 야기하였고, 급기야 조만간 닥칠 ‘엄청난 경제 혼돈’(최근 ‘초거대위험 Mega Threats’을 저술한 뉴욕대 루비니 교수의 표현)의 초입에 서있는 형국이다.
이에 더하여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서방 금융권에 예치한 수천 억 달러의 러시아 자산을 일방적으로 동결시키고, 러시아 은행들을 국가간 통화거래 시스템인 SWIFT에서 배제하는 강수를 두었다. 문제는 이를 지켜보는 대부분의 국가들에는 미국이 기축통화인 달러를 수단으로 삼아 러시아에 가하는 제재는 국제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의적으로 악용하는 것으로 비치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미 패권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자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중국을 방문한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고백적인 발언은 매우 충격적이다. “매일 저녁, 나는 왜 모든 국가들이 반드시 달러를 기반으로 무역 거래를 진행해야 하는지 묻곤 한다… 왜 우리(브라질과 중국)는 자신들의 통화로 거래할 수 없는 것인가? 과연 누가 금태환을 중지한 달러를 결재수단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는가?”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역시 달러를 수단으로 삼는 미국의 경제 제재를 사전에 이미 예측한 것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과 블라디보스톡 동방경제포럼 및 사마르칸트의 상해협력기구 정상회의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인민들은 달러의 패악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곤 하였다. 독자적 전략을 강조해온 유럽연합의 중심국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중국 방문 중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유럽은 치외법권(The extraterritoriality)적인 미국 달러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만약 두 초강대국(중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 우리는 유럽의 전략적 자치권을 행사할 정책적 여유나 자금이 없을 것이며 결국 속국이 될 것이다.”
사필귀정인가? 아니면 오비이락인가? 자산 보유수단 및 가치 평가 잣대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외환의 자산시장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1년 73%에서 2020년에는 55%로 격감하였고 러시아에 대한 제제가 시작된 이후 다시 47% 수준으로 내려 앉았다. 이는 달러와 금융 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미국 경제에 대단한 속도로 가해지는 위기의 국면이다.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를 설립하고 성장시켜온 레이 달리오는 최근 서점가를 달군 자신의 저서 ‘변화하는 세계질서’에서 강대국의 흥망과정을 18단계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대목에 눈길이 간다.
제14단계부터 극심한 내부 갈등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정치적 대립이 발생하고, 곧 이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정이 어려운 정치적 합의와 개혁을 우회하여 손쉽고 당장의 정치적 부담이 없는 통화팽창을 남발함으로써 인플레이션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국내적으로는 계층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자국 중심의 통화와 금융 정책을 추진하여 주변국에게 부담을 전가시켜 신뢰를 상실하면서, 급기야 기축 통화국으로서 지위를 상실하면서 결국 쇠망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마치 현재 미국이 처한 상황을 현장 중계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국내의 산적한 현안과 국제적 신뢰의 실추에도 불구하고 무역과 통상의 결제수단으로서 달러의 위상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2020년 기준으로 하여 유로화가 20% 수준을 차지하고 중국 위안화는 2-3%에 머무는 반면에, 대부분의 외환거래는 상기에 언급한 SWIFT시스템 방식으로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유동적으로 급변하고 있다. 우선 러시아와 중국 간 무역 거래의 결제방식에서 최근 양국의 통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70%선에 이르고 있으며, 그간 달러에 의존하여 왔던 중동 국가들의 원유 거래에서도 아랍에미리트를 선두로 하여 거래 당사국의 통화를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사우디도 곧 이를 공식화할 예정이며, 가나를 비롯한 아프리카 산유국들은 금을 기본으로 거래를 요구하고 있다.
아시아의 금융위기 당시 한국과는 달리 금융시장 개방을 거부했던 말레이지아 역시 역내 거래에서 달러를 거부하고 당사자 통화 내지는 지역통화를 요구하면서 아세안 역내의 지역통화 움직임을 촉발하고 있다.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및 남아프리카) 합의에 의해 상해에 설립된 신개발은행NDB 총재에 호세프 브라질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BRICS 역내 거래 역시 당사자 통화 내지 중국 위안화가 점차 표준이 될 전망이며, 중남미 국가 간에도 지역통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탈달러화가 진행되고 있는 주요한 상황을 재차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말레이시아는 아세안의 무역 거래에서 달러를 배제하는 지역통화를 제안했다.
# 가나를 비롯한 아프리카 산유국들은 이제 달러 대신 금을 기본으로 원유를 판매한다.
# 미국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인 프랑스는 위안화로 중국과 거래를 시작했다.
# 중국과 브라질은 향후 무역에서 서로의 자국 통화로 거래를 약정했다..
# 인도와 말레이시아는 현재에도 무역 거래에 인도 루피화를 사용한다.
# 중국은 사우디에 이어 아랍에미리트로부터 에너지를 위안화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 BRICS가 자체 통화의 개발을 논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제거래의 관성으로 인하여 네덜란드가 세계의 중심국가에서 멀어졌다 해도 길드화는 이후에도 수십 년간 국제거래의 주요 통화로 역할을 해왔으며, 한때 해가 지지 않았다는 대영제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국의 지위를 미국에 내주었지만 파운드화의 지위는 196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지정학적 이유로 이란 북한 베네수엘라 러시아 등 국가들에게 1만 건에 달하는 무리한 경제 제재를 가하고 통상적인 국제거래 시스템에서 이들 국가들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서방 은행에 예치된 일부 국가들의 외환자산을 일방적으로 동결하는 악수를 두었다. 이로써 중립적이어야 할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이 약화되고 점차로 국제사회 특히 남반구로부터 불신을 당하고 있으며, 미국 금융산업의 불안정과 통화정책의 실패(통화 남발 등)로 가치측정 단위와 저장 수단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지정학적 불안과 복수의 복잡한 결재수단보다는 단일 통화가 주는 편리함과 경제적 이익을 감안할 때, 현재로서는 달러를 갈음할 확실하고 안정적인 대체 방식이 미약한 탓으로 상당 기간 국제사회에서 중심의 역할을 지속할 것이라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다만 기축통화로서 위상을 계속 유지하려면 미국이 과거처럼 반복해서 자국 중심의 이해에만 집착해서 패권 유지의 수단으로 달러를 악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 있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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