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남궁협 (언론학자)
남궁협 (언론학자)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이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손 놓고 쳐다만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안타깝다. 엄연히 삼권분립이 제도화되어 있지만 제도의 실행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국가 최고 권력자가 엉뚱한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속수무책이다. 훔치려고 작정한 자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실권을 틀어쥔 행정 수반이 통치권이라는 미명 아래 균형추를 맞춰오던 나름의 형식과 관행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권한을 남용하면 국회와 사법부가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보며 비웃었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허점이고, 트럼프와 윤 대통령은 그것을 악용한 셈이다.

민주주의의 2차 방어선

제대로 된 건강한 나라라면 이렇게 삼권분립이 망가져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가 위기 조짐을 보일 때면 2차 방어선이라는 게 작동한다. 그것은 잘못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역할을 하는 곳을 말하는데, 언론과 대학이 그런 곳이다. 언론과 대학은 민간조직으로서 국가 권력과 민중 사이에서 교량과 완충 역할을 동시에 한다. 이들의 공통된 직업적 소명은 ‘비판적 지성’이다. 세속적 현실에 매몰되어 있는 권력과 민중들에게 사회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과 문제점을 제시하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권력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을 때는 용기 있게 비판도 하고, 세상의 모순을 지적하는 게 본업인 사람들이 언론인과 교수들이다. 그런 점에서는 언론인과 교수 모두를 ‘지식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이 수행하는 직무의 특성상 고도의 전문성과 엄격한 공정성, 그리고 윤리적 판단력이 중요한 덕목일 수밖에는 없다. 이들은 누구보다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과 소통으로 ‘사회의 파수꾼’ 같은 공적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고독’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면, 그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익에 휘둘려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인과 교수가 누구에게나 “참 좋은 사람이다!” 혹은 “마당발이다”라는 평을 듣는 것은 결코 칭찬이 될 수 없다. 이들은 덕을 베푸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냉철하게 사태를 분석하여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묻는 일을 사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들은 때때로 위험을 무릅쓰고 나쁜 권력(자)에게 준엄한 비판을 가하는 용기도 내야 한다. 그래서 헌법은 이들에게 ‘언론 출판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라는 자유권적 기본권을 특별히 보호해주고 있다. 사람들도 이들이 사회의 건강성을 지켜주는 중요한 보루라고 여기며, 이들에게 특별한 경의와 권위를 부여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 부부가 벌이고 있는 안하무인의 행동을 보면 언론과 대학의 비판적 센서 기능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두 기관 모두 사회제도로서 수명이 다 되어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언론과 대학 모두 자신들의 생존 문제가 발등의 불이어서 본연의 역할을 잊은 채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언론의 경우, 레거시 미디어라고 하는 신문과 방송은 이미 오래전에 사회적 신뢰를 잃은 데다 디지털 소셜 미디어에 밀려 존재감을 상실한 채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대학도 진작에 창조적 지식생산을 멈춘 채 ‘취업공장’으로 전락한 데다 학생 수마저 급감하여 많은 대학이 머지않아 폐허가 될 운명에 있다.

생존의 저항 의지마저 상실한 언론

언론은 민주주의의 최일선에서 민주주의를 움직이게 하는 수레바퀴와 같아서 민주주의의 오작동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아무리 나쁜 권력이 선무당 같은 칼춤을 추더라도 언론만 제정신이면 대중의 힘을 모아서 굴복시킬 수 있다. 실제로 굴곡진 우리 현대사에서 어둠이 짙을 때면 어김없이 언론인이 횃불을 들어 길을 밝혔던 소중한 역사가 있다. 장준하의 <사상계>,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소리>,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그리고 송건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시대의 담론을 이끌며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언론을 보면 그런 것은 언감생심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언론자유마저 내팽개치고 권력에 투항하는 모습이다. 언론자유를 마음껏 허용하는 정부에게는 언론자유의 화신인 양 자신들의 입맛대로 권력을 실컷 물어뜯다가도, 반대로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폭압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권력의 눈치를 보며 권력의 입맛에 맛는 보도만 일삼는 게 기성 언론의 전통이 되어버린 지경이다.

그래도 과거엔 권력의 눈치를 보다가도 권력의 칼이 자신들을 직접 겨냥하면 벌떼처럼 뭉쳐서 저항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언론인들에게는 아예 그러한 최소한의 생존적 저항의지마저도 거세된 것 같다. 그러니 권력의 칼날이 거침이 없다. 신문은 진작에 보수가 장악하고 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방송만 잡으면 된다는 것일까. 권력의 압박과 공격이 방송에 집중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입체적이고 전방위적이다.

방송과 통신을 통합적으로 관장하는 방송통신위원회에 검찰의 칼날을 직접 들이대고 있고, 대표적인 공영방송사인 KBS와 MBC에 대해서는 생트집을 잡아서 권력의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경영진을 바꾸려 하고 있고, 대표적인 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와 뉴스전문 채널인 YTN을 민영화해서 뉴스 통제권을 재벌들에게 주겠다는 의지를 노골화하고 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머리띠를 하고 규탄시위라도 벌였을 일인데도 언론인들은 조용하다.

이렇게 민주주의 방어의 한 축인 언론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대학이다. 언론에 비해 사회적 영향력이 훨씬 빈약한 대학이 무슨 능력으로 무너진 방어벽을 홀로 버텨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대학은 과거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저항 정신이 깃든 곳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지금처럼 검찰과 언론이 모두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을 때에도 외딴 섬처럼 대학생과 교수들이 나섰다. 꺼져가는 민주주의의 열망을 대중들과 호흡하며 권력에 맞섬으로써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던 곳이 대학이었다.

대학(大學) 없는 대학

그런데, 불과 몇 년 전 ‘조국 사태’ 때 횃불을 들고 ‘공정’과 ‘정의’를 외쳤던 그 대학생들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서울 SKY 대학 신입생의 절반가량이 금수저 출신이라고 한다. 자본은 이러한 젊은 소비층의 변화를 모를 리 없다. 금수저들을 다루는 드라마들이 러시를 이루고 있는 건 이런 변화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느덧 대학 캠퍼스는 젊음의 낭만과 자유와 저항이 사라지고 경쟁과 소비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10여 년 전 당시 고려대 3학년생이었던 김예슬 씨가 고발했듯이, 이미 우리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 업체가 되어…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는 대학”의 모습으로 퇴락해 있다.

교수들도 다를 바 없다. 2000년대 들어 실용주의가 대학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자, 대학은 산학협동에 유능한 교수, 외부 연구용역을 많이 수주하는 교수, 기업과 정부에 자문활동이 많은 교수, 현업의 현장경험이 풍부한 전문가 교수들을 우대하였다. 돈벌이와는 먼 순수학문들은 대학에서 쫓겨났다. 급기야 교수들도 하나 둘 “책을 읽고 사색하는 교수를 사치스럽게 여기는 대학”을 떠나고 있다.

학생 수마저 급감하고 있어서 내년부터는 현재 200여 개나 되는 4년제 대학 정원의 절반 밖에 학생을 채울 수 없게 된다. 대학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현실에서 고매한 학문이니 비판적 지성이니 하는 말은 배부른 헛소리로 치부된다. 이제 폐허가 된 대학에는 안정된 소득을 보장받고 강의실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소심한 교수들만이 ‘최후의 지식인’으로 남게 될 것이다.

비판적 지성으로 장착한 언론과 대학은 민주주의의 2차 방어선으로서 사실상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마지막 방어선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살펴본 것처럼 이들은 이미 스스로 와해되고 있다. 이들은 이제라도 다시 정신을 차려서 일어설 힘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난번처럼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조치도 있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탄핵 주장은 벌써 나오고 있던 터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치는 않을 것 같다. “지금 돌아보니 박근혜 대통령은 차라리 양반이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는 마당이라면 현 권력자들에게 순순한 퇴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면 권력과 민중의 직접적인 충돌만 남은 것인가. 다시 함성의 계절이다. 연일 쏟아지는 성직자와 교수들의 호소는 그러한 불행을 막으려는 마지막 절규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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