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스스로를 민주주의 모범국가라고 자랑한다. 가장 오랜 민주주의 헌법과 제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제도로선 틀리지 않다. 그러나 최근의 미국 정치판은 한국과 거의 다르지 않다. 주먹다짐만 뺀 힘겨루기 판이다.
지난 주 화요일. 미국에선 중간선거가 있었다. 중간선거는 이름 그대로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선거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핵심이다. 중간선거에서 집권 여당은 평균 20-30석을 잃는다. 뉴딜의 루스벨트 대통령도 피해가지 못한 미국 정치사의 전통이다. 심지어 2010년 오바마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무려 63석을 잃었다. 의석 변동 수치로 70년 만의 대기록이다. 올해 바이든은 낮은 40%대 지지율에 머물면서 대부분의 조사기관이 공화당의 중간선거 낙승 또는 압승을 예상했다.
그런데 공화당은 지난 20여 년간 치른 선거 중 가장 나쁜 성적표를 받았다. 하원에서만 간신히 과반수를 넘겼다. 7곳에서 여전히 개표가 진행 중인 11월 16일(미국시간) 현재, 공화당은 과반인 218, 민주당은 210석.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에 대한 유권자들의 경각심’으로 풀이하고 있다. 민주당은 승리라고 자화자찬하지만, 민주당이 잘 해서가 아니라, 유권자들이 공화당을 견제하면서 그나마 지켜낸 ‘가까스로 민주주의’라는 말이다.
중간선거의 명암
2016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미국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사회적 현상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백인종주의의 발호, 기독교 국가주의의 확산, 극우 미디어의 선동, 공화당의 극우정당화, 연방 대법원의 사법 횡포(?). 그 화룡점정은 트럼프의 1/6 쿠데타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선거를 극우 공화당이 휩쓸었다면 그 후폭풍은 무시무시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선거는 미국 민주주의의 당면한 위기를 가름하는 커다란 시험대였다. 때문에 ‘가까스로 민주주의’의 뜻은 결코 가볍지 않다. 또 위기 상황이 종료된 것도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극우화된 공화당 때문이다. 하원의 다수당이고, 상원 역시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인 60석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에 공화당이 작정한다면 필리버스터의 힘으로 의회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두 번째는 금권선거의 문제다. 미국 선거에서는 돈을 많이 쓰면 대체로 당선된다. 최근 통계로 후보당 평균 지출 규모는 상원은 1600만 불(환율 천원으로 단순계산해도 한국 돈 160억), 하원은 200만 불에 이른다. 지출의 대부분은 방송광고, 여론조사, 정치 컨설팅과 홍보 등의 비용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N. 펠로시 하원의장의 경우, 이번 선거 후원금으로 2300만 불을 모았고, 심지어 8000만 불, 거의 1억 불을 모은 후보도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돈이 선거에 흐른다.
또 다른 문제는 이번 선거가 미래에 대한 의제가 없는 정치행사였다는 점이다. 당장 진행되고 있는 범세계적 현안인 우크라이나 전쟁, 핵무기의 위험성 문제는 이슈로 오르지도 못했다. 정부가 긴급예산이라며 무려 380억 불(한국돈 거의 40조)을 추가로 요청했음에도 그렇다. 한편, 몇 개 주를 제외하고는 목전에 닥친 기후 위기와 지구 온난화 문제도 의제로 세워지지 못했다.
물론 긍정적 성과도 작지는 않다. 우선, 2020년 각 주의 공화당 의회가 제정한 ‘유권자 통제법 voter suppression act’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통제법은 사람들의 투표참여를 어렵게 해(예: 우편 투표 제한, 무효표 규정 및 유권자 자격심사 강화, 선거 자원봉사 제한 등) 공화당에 유리한 선거환경을 만들려는 의도를 담은 법이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의지가 법을 넘어섰다. 또 쿠데타의 주역 트럼프의 영향력도 현저하게 낮아졌다. 그를 좇아 2020 대선결과를 부정하는 후보자들이 대거 낙선했다. 11월 12일 현재, 상원 5명 중 3, 하원 31명 중 15, 주지사 7명 중 5, 주 행정장관 5명 중 4명이 떨어졌다. 한편, 민주당의 진보적 의원 여섯 명(이중 네 명은 민주 사회주의 조직 회원) 모두 이번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극우 성향인 연방 대법원의 사법 횡포를 막아낸 직접 민주주의의 힘이다. 가장 큰 의제는 여성의 임신 중지권 문제였다. 지난 6월 연방 대법원은 여성의 헌법적 권리를 무효화하고 사안을 각 주의 입법사안으로 넘겼다. 이에 대해 몬타나, 미시건, 버몬트, 캘리포니아, 켄터키 등 다섯 개 주가 유권자들의 심판을 구했다. 결과는 모두—몬타나는 약간 다른 부분도 있지만 기본은 같다—여성의 권리보장으로 귀결되었다.
무엇이 달라질까?
선거 때마다 미국에서 회자되는 속담 같은 것이 있다. ‘만약 선거가 무언가를 바꾼다면 저들이 우리가 투표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지...’ 확인할 순 없지만 마크 트웨인의 말이라고 한다. 이번 중간선거로 무엇이 달라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달라질 것 없다’이다. 지금의 정당 배치도로는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무슨 큰 것을 해볼 수 없는 구도이다. 달리 말해 우크라 전쟁, 변동 속의 국제질서, 침체국면의 국내외 경제, 어디에도 희망적인 신호는 없다는 뜻이다. 현재가 계속되면서 오히려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필 이 글을 막 마무리하는 시점에 트럼프가 2024년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는 쿠데타 주동자이자 두 번씩이나 탄핵심판을 받은 자다. 출마 동기 중에는 다가오는 연방 법무부의 수사와 기소를 피하려는 계산도 숨어있다고 한다. 미국은 이래저래 ‘가까스로 민주주의,’ 엽기적 정치판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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