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히 사법(司法)의 시대다. 대한민국을 제외한 선진국 가운데 검찰의 수사 및 기소, 법원의 판결이 정치와 일상을 지배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이건 ‘법치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 흔히 ‘법치주의’를 법의 지배(rule of law)라고도 하며 입법, 행정, 사법을 포함한 국가의 전 부문과 영역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다스려지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한데 근래 우리가 목도하고 경험하는 사건들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다.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의 지배와 표현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권력을 지닌 자가 권력을 유지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을 도구화하는 것을 뜻한다.
감시자를 감시(監視)하는 시스템의 부재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기소·판결, 윤미향 의원에 대한 수사·기소·판결, 곽상도에 대한 수사·기소·판결 그리고 이재명 대표에 대한 전방위적 수사 등이 함의하는 바는 명확하다. 한국사회의 감시자라 할 검찰과 그 검찰을 감시해야 할 법원이 감시자의 임무를 전혀 수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검찰과 법원을 감시하는 제도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검찰은 직접 수사권과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지닌데다 영장청구권과 기소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해 형사사법절차에 관한 한 대한민국 검찰은 가히 무소불위라 할 것인데, 이런 독점적 권한을 지닌 검찰은 수사대상과 방법(압수수색 및 구속 등), 수사개시 여부, 수사개시의 시점과 수사의 속도, 기소여부 등을 마음대로 정하며 검찰권을 전방위적으로 투사 중이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건 그런 무소불위 검찰을 제도적으로 통제하고 견제할 장치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검찰을 감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국가기관이 법원인데, 지금의 대한민국 법원에 그런 역할과 기능을 기대한다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보다 어렵다 할 것이다. 이른바 조국 사태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검찰발 드라이브에 법원은 그저 보조자 역할에 충실한 느낌이다. 압수수색도, 구속도 심지어 판결의 결과까지도 거의 대부분 검찰의 의도와 목표가 관철된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든 중대 형사사건에서 법원이 기본권 보호의 최후 보루 역할이나 실체적 진실 발견의 담지자 기능을 수행한 기억은 희귀하다.
물론 대한민국 언론이 언론 같다면 검찰과 법원의 폭주를 일정 정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나, 대한민국 언론은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다소 모욕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양비(兩非)론과 기계적 균형도 대한민국 언론에겐 사치다.
‘선의’에 기댈 것이 아니라 ‘권한’을 줄이고 민주적으로 통제해야
헌법을 보면 검찰이라는 단어는 아예 없고(검찰은 법원과 같은 헌법기관이 아니다. 검찰청은 행정 각부 중 하나인 법무부의 외청에 불과하다), 검사라는 단어도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위한 영장발급을 신청하는 주체로만 호명될 따름이다.
2019년 검란(檢亂) 이후 윤석열의 집권을 거쳐 완성된 검찰독재, 사법독재가 대한민국의 유일한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가르쳐주는 뼈아픈 교훈은 헌법과 주권자의 일반의지에 복무하는 검찰과 법원은 검사와 법관의 ‘선의’에 기대서는 절대로 달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헌법과 주권자의 명령에 복무하는 검찰과 법원은 제도적 통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즉 검찰을 기소만 전담하는 기관으로 만들고 기소청의 구성, 기소 과정, 기소관에 대한 징계 등에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 법원의 구성, 재판과정, 법관에 대한 징계 등에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개입하고 통제하는 것이 지금의 검찰과 법원을 헌정질서와 주권자의 일반의지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검사와 법관의 '의사(意思)'가 아닌 검사와 법관의 '권한(權限)'에 방점을 찍는 것이 검찰과 법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핵심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한민국 검찰과 법원에 전하는 충고
대한민국 검찰과 법원에게, 대한민국의 자칭 보수들이 숭배하는 미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쓴 불후의 명저 '연방주의자 논설' 중 한 대목을 들려주고 싶다. 경청하기 바란다.
만일 인간이 천사라면, 어떤 정부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천사가 인간을 통치한다면, 정부에 대한 그 어떤 외부적 또는 내부적 통제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 인간에 의해 운영될 정부를 구성하는 데서 최대의 난점은 여기에 있다. 먼저 정부가 피치자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정부가 그 자체를 통제하게 해야 한다. 인민에 대한 종속은, 의문의 여지 없이, 정부에 대한 일차적 통제이다. 하지만 경험은 인류에게 보조적 예방책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더 나은 동기의 결핍을, 상반되고 경쟁하는 이해관계를 이용해 보충하는 이런 방책은 인간사의 모든 공적·사적 체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특히 권력을 하위〔직급〕에 배분하는 데서 그런 방책이 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불변의 목표는 각자가 서로에 대한 견제 수단이 될 수 있고, 모든 개인의 사적 이익이 공적 권한의 파수꾼이 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각각의 직책을 배분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빈틈없는 고안물은 국가의 최고 권력을 배분하는 데도 마찬가지로 필수 불가결하다.
-연방주의자 51번 [매디슨] 1788. 2. 6.
제임스 매디슨은 불완전한 인간이 정부를 구성해 통치할 때는 인간의 덕성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구성된 정부에 대한 외부적 또는 내부적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봤다. 또한 제임스 매디슨은 (주권자는) 정부를 구성하는 각자가 서로에 대한 견제수단이 될 수 있도록 각각의 직책을 배분하고 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매디슨이 본 인간은 불완전하며, 정념에 휘둘리고, 특권에 경도되는 인간이다.
설마 자신을 천사라고 생각하는 검사와 법관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 불과한 검사와 법관이 각각 구성하는 검찰과 법원의 권한을 다른 국가기관과 나누고(내부적 통제), 주권자인 국민이 외부에서 기관의 구성·기소 및 재판과정·기소관 및 법관에 대한 징계참여 등의 방법과 경로로 검찰과 법원을 통제(외부적 통제)하는 것은 매디슨에 따르면 너무나 정당하고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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