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생각과 힘으로 ‘사면초가’ 상황 타개해야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10월은 이재명 정권에게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명 정권의 집권 기간 내내 관통할 대외정책의 큰 방향과 구도가 이 시기에 정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10월 말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APEC) 정상회의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동시에 참석합니다. 정치·외교·군사·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패권 경쟁을 하는 미·중 두 나라 정상이, 트럼프 2기 정권 이후 처음 대면하는 역사적인 무대입니다. 이때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를 예약한 '여자 아베' 다카이치 사나에도 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기회를 이용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재명 정권으로서는 주최국의 이점을 살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외교적 숙제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호기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홍보영상에 항공기 유도원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2025.10.2 [홍보영상 캡처.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홍보영상에 항공기 유도원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2025.10.2 [홍보영상 캡처. 연합뉴스]

한반도 포함 세계의 평화와 번영이 ‘실용 외교’

한 나라가 아무리 좋은 외교 정책을 세워도 대외관계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호응하거나 호응하도록 설득하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래서 10월 경주 아펙 정상회의를 전후해서 펼쳐지는 외교 무대가 이재명 정권으로선 매우 중요합니다.

이재명 정권의 외교 정책은 '국익 중심 실용 외교'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도 외교를 하면서 국익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국익 중심'이란 용어는 공허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실용 외교만 남는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생각하면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임 윤석열 정권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진영과 이념을 앞세운 맹목 외교를 하는 바람에 국익을 해쳤다는 반성에서 나온 정책입니다. 그래서인지 나라 안팎에서 반응이 좋습니다. 그래도 '무엇을 위한 실용인가?' 하는 점은 여전히 남습니다. 저는 한반도를 포함한 세계의 '평화와 번영'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평화 없이 한반도 평화가 없고, 세계의 번영 없이 한국의 번영도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곳곳 난관 널린 ‘사면초가’ 형국의 외교 환경

그런데 한국을 둘러싼 외교 환경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고사성어를 빌려 표현하면,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 난관이 널려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난관은 일본입니다. 일본 안팎의 예상을 깨고 아베 신조 전 총리보다 더욱 극우적인 다카이치가, 4일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총재로 당선됐습니다. 그는 각료 시절에도 매년 에이(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배외주의자입니다. 심지어 한국과 중국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것을 두고 "도중에 참배를 그만두는 등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 것"이라는 폭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부정하고 독도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반한 극우 전사'입니다.

 

4일 일본 자민당(LDP)의 새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가 2차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다. 2025.10.4.AP 연합뉴스
4일 일본 자민당(LDP)의 새 총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가 2차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다. 2025.10.4.AP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100여 일 동안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하면서 쌓아온 대일 실용 외교의 토대가 다카이치의 출현으로 여차하면 일거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물론 총리가 되기 전과 총리가 된 뒤는 정책이 달라질 수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압박이라는 공통의 과제가 있기에 총재 당선 전처럼 마구 달리지는 않겠지만 이 대통령이 최악의 일본 상대를 만난 건 분명합니다.

일본보다 더한 위협은 미국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3500억 달러(한화, 492조 8700억 원)를 자기 주머니에 든 돈으로 간주한 채, 관세 협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을 지렛대로 국방비와 주한미군 주둔비 대폭 증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미국의 요구대로 한다면, 나라가 거덜 날 내용들입니다. 윤석열 정권이 해온 한미동맹 중시, 미국 추수 일변도 외교를 그대로 이어간다면 어떤 재앙이 초래됐을지 끔찍하기만 합니다.

'생활 반미' 민심 활용해 트럼프 폭풍 헤쳐 나가야

다행스럽게도 이 대통령은 이면 합의를 안 하고, 국익에 반하는 합의는 안 하며, 공정하고 합리적이 아니면 안 한다는 '3불 정책'을 천명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와 얼룩말의 싸움에서, 한 사람의 지도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얼룩말 무리 전체가 힘을 합쳐 힘찬 발길질을 해야 겨우 사자의 횡포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마침, 미국 조지아주에 공장 건설을 해주러 간 한국 파견 노동자 300여 명을 노예처럼 쇠사슬로 묶어 질질 끌고 가는 미국의 야만 행위를 목격한 시민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추석 연휴 기간에 만난 시골 촌로들마저 "미국이 우리나라를 마소 취급한다"라고 분개하는 지경입니다.

저는 이런 시민의 각성을, '생활 반미'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이제까지 광주 학살에 군 동원 용인, 효순·미선 양 압사 사건, 윤금이 씨 살해 사건을 계기로 터진 반미 움직임이 좁은 범위에서 강렬하게 분출한 일과성 '정치 반미'였다면, 조지아 사태로 인한 반미는 넓은 범위에서 은근하게 지속되는 '생활 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짝 타오르다 금세 꺼지는 불꽃보다 은근하게 오래 타는 숯불이 무서운 법입니다. 이재명 정부는 정치 반미에서 생활 반미로 변하는 한국의 민심을 활용해 트럼프 발 폭풍을 헤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시민사회단체가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조지아 강제구금 인권침해 사과 및 대미 투자계획 전면 재검토 촉구 긴급 각계 기자회견'을 열며 "대미 투자 전면 재검토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홈페이지
시민사회단체가 1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조지아 강제구금 인권침해 사과 및 대미 투자계획 전면 재검토 촉구 긴급 각계 기자회견'을 열며 "대미 투자 전면 재검토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홈페이지

북한, 중국, 러시아, 팔레스타인 문제도 첩첩산중

북한과 중국의 사정은 또 어떻습니까. 북한은 이재명 정권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권 때 선언한 '적대적 두 국가론'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습니다. 또 핵보유국의 권리를 주장하며 비핵화 논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권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 비핵화를 가장 뒤에 놓는 '동결-축소-해체'의 새 해법을 내놨습니다. 남북 관계도 문재인 정권 때의 '운전자'에서 '페이스 메이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선결적으로 풀어야 남북 관계도 풀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지만, 그래도 한국의 어깨 너머로 북한과 미국이 독주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없지 않습니다.

중국과는 다소 호전 기미가 있으나 박근혜 정권 말에 배치한 사드 갈등과 윤석열 정권 때의 반중 정책의 여진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최근엔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본격화한 혐중 시위가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떤 나라에 대해 '반(反)'이라고 하는 접두어를 사용하는 것과 '혐(嫌)'이라고 말을 붙이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반일, 반미, 반중처럼 반은 그 나라의 구체적인 정책을 반대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혐중은 그 나라의 존재를 부정하고 얕잡아 보는 아주 모멸적인 행위입니다. 일본의 혐한 시위에 한국 사람이 분개하는 걸 생각하면 한국의 혐중 시위에 대한 중국 사람의 반응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혐중 시위는 중국과 관계 개선 차원이 아니라 인권 보호 차원에서 엄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차가워진 러시아와의 관계는 미국 눈치 때문인지 가장 뒷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지지를 넓히는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 문제는 더합니다.

각자도생의 시대, 독자적인 생각과 힘이 기본

이재명 대통령은 10월 1일, 제77주년 국군의날 기념사에서 "세계 각지에서 협력과 공동 번영의 동력은 약해지고,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는 각자도생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의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을 더욱 키워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발언 속에 한국 외교의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타개하려면 무엇보다 주체적인 생각과 힘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에 동맹도 중시하고 가치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건군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차량에 탑승해 사열하고 있다. 2025.10.1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충남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건군 77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차량에 탑승해 사열하고 있다. 2025.10.1 연합뉴스

저는 이재명 정권의 '국익 중심 실용 외교' 구호의 앞뒤를 바꿔 '실용 중심 국익 외교'로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용 외교를 하다 보면 국익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만, 국익을 외친다고 반드시 국익이 오고 실용 외교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윤석열 정권의 가치 외교, 진영 외교가 좋은 반면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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