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변방에서 태어난다

이미 ‘탈성장’시대, ‘포스트 성장’으로 간다

생태문명도시, 새로운 변이의 출현

지방소멸이 오히려 새 문명 태동의 ‘적소’

새로운 질서의 앞자락이냐 끝자락이냐

새 문명의 태동, 이번에는 순창이다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대표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대표

지난 9월 26일(금) 국회에서 ‘생태문명도시’ 토론회가 열렸다. 전북생명평화포럼과 순천에코칼리지(준), 한신대 생태문명원과 생태전환지원재단과 녹색전환연구소가 함께 준비했고 국회의원 안호영의원실(환경노동위원장)의 도움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나는 ‘생태문명도시, 왜? 어떻게? 무엇을?’이라는 제목으로 생태문명도시의 의미와 방향에서 대해 발표했다. 거창한 토론회는 아니었지만, 나에겐 또 하나의 문명사적 ‘변이’가 출현하는 현장이었다. 이번엔 ‘생태문명도시’다.

생태문명도시, 새로운 변이의 출현

토론회에서는 물론 질문과 의문도 적지 않았다. 절박한 기후위기 현실과 팍팍한 도시 현실 속에서 너무 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그 중 하나였다. 정당한 지적이다. ‘문명전환’도 ‘생태문명’도 분명 거대담론이고, 더욱이 주민들의 입장에선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후활동가에게는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참 반가운 이야기들이었다. 또 다른 삶과 세계의 태동을 예감케 하는 문명사적 ‘변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탈성장도 기후정의도 생명평화도 나에겐 담론적 변이들 중 하나이다. 문명사적 대전환기의 오늘, 다음 문명에는 어떤 사회문화적 변이가 지배종이 될지 알 수 없다. 우선 절실한 것은 변이들의 출현이다. 속된 말로 뭐가 약(藥)이 되고 뭐가 독(毒)이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탈성장’에 소극적인 이유

나는 ‘탈성장(de-growth)’에 적극적이지 않다. 탈성장에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도 세계경제도 이미 ‘탈성장’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성장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도, 인구도, 도시도 『축소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을 비롯해 경제전문기관과 경제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토로한다. 성장시대는 끝났다고.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2%에 불과하다고. 그렇다면, 탈성장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포스트성장시대에 걸맞은 삶의 변이, 제도적 변이를 실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스스로 변이가 되어야 하는 아닐까?

"어차피 흙수저, 이번 생은 망했어요" 올 초에 읽은 신문기사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웅웅거린다(매일경제신문, 2025.03.12). 청년들은 본능적으로 감각한다. 이번 생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포스트성장시대, 부와 권력이 극단화된 시대라는 것, 계층이동을 가능케 하는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것을. 안쓰러운 점은 또 다른 삶을 사유할 힘마저 끊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 같은 기성세대가 그들에게 스스로 변이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9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생태문명도시 토론회'
9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생태문명도시 토론회'

새로운 질서의 앞자락이냐 끝자락이냐

나의 감각으로는 기후문제도 마찬가지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미 ‘기후변화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올 여름에도 절절하게 경험했다. 이를테면, ‘포스트기후변화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후변화에 적응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적응과 변이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농민들은 농작물 재배지의 북상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고, 동식물들의 생물학적 변이가 보고되기도 한다.

 

영화 '어쩔 수가 없다' 포스터
영화 '어쩔 수가 없다' 포스터

기후행동의 무게 중심이 ‘기후변화 저지’에서 ‘기후변화 적응’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념형 투쟁에서 실존형 쟁투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박찬욱의 신작 영화 제목처럼, “어쩔 수가 없다.” 비록 영화에서는 생명의 본능으로 ‘옛 질서의 마지막 끝자락’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지만, 또 다른 생명의 본능으로 ‘새로운 질서의 앞자락’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순천만의 철새들.
순천만의 철새들.

‘생태문명도시 순천’이라는 변이

내가 생태문명도시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명전환을 위한 새 문명의 변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순천시라는 실제의 지방도시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문명도시’라는 말은 작년에 순천 시와 순천 시의회가 기초자치단체 중에서 전국 최초로 제정한 ‘순천 시 생태문명 실천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조례’에 적시되어 있는 용어다. 제1조에 명시되어 있다. “제1조(목적) 이 조례는 순천 시 정책 및 행정 전반에 생태문명 실천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순천 시가 지속 가능한 회복력 있는 생태문명도시로 전환할 수 있도록 지원함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조례에 의하면, 순천 시는 “생태문명도시의 비전과 기본방향을 수립”하게 되어 있다.

이 조례의 배경에는 순천만 국가정원의 대성공과 ‘생태경제’의 잠재력 확인이 있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순천 시장의 결단일 수도 있고, 순천지역 시민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우발성의 형식'으로 활동하시는 그분의 뜻일 수도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생태문명도시'라는 말이다.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말이 사회적으로 소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문명도시'는 순천 시의 새로운 자기 정체성 진술이다. 물론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다른 정체성 진술과 경합을 해야 한다. 금새 말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순천 시는 조례를 통해 '생태문명도시'라는 표현을 했고, 나에게 그것은 순천이라는 도시의 무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생태적 문명전환', 혹은 '생명가치가 실현되는 문명전환'을 열망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꽉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닐까.

더욱이 생태문명과 생태문명도시는 순천 시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사실 내가 살고 있는 전북도에서는 일찍이 2021년 '생태문명 조례'가 만들어졌다. 그 이름도 어마어마하다. 놀랍게도 생태문명 '선도' 조례다. 2021년 서울에서는 서울 시와 서울교육청이 함께 '생태문명-전환도시 서울 선언'이 발표되었다. 전북도의 조례는 그 이듬해에 도지사가 바뀌면서 사문화되었고, 서울 시의 선언도 그저 선언으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생각도, 어떤 말도, 어떤 물체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다. 다만 잠재화될 뿐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축소되는 세계. 사이
축소되는 세계. 사이

지방소멸, 새 문명 태동의 ‘적소’

생태학 교과서에 의하면 생물들이 번성하는데 알맞은 적절한 서식지가 있다. 생태적 적소(適所, ecological niche)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문명사적 대전환기에도 사회적 변이들이 출현하기에 적절한 장소도 있지 않을까? 산불 직후의 숲과 같은 곳 말이다. 기존의 질서가 허약해진 곳, 기존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곳, 기존의 지배종이 사라지고 있는 곳이 역설적으로 변이 발생의 적소 아닐까.

‘지방소멸’이라며 전국이 아우성이다. 지역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인구감소는 불가피하다. “어쩔 수가 없다.” 이제 지방자치단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사회적 변이를 생산한다. ‘정주인구’ 대신 ‘생활인구’ 개념을 발명하고, 주택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대도시 청년들을 모셔온다. 아마도 머지않아, ‘인구 수’가 아니라 ‘생물 수’로 지역을 재정의하는 때가 올 것이다.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변방에서 태어난다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생겨난다’는 경구는 문명전환기의 금과옥조다. 예컨대, 근대문명의 질서와 시스템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지방도시들은 지금 소멸 위기에 처해 있지만, 동시에 ‘혼돈의 가장자리’로서 문명전환의 적소가 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삶, 새로운 생각, 새로운 경제체계와 새로운 정치체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도시들이 적소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이중성’ 때문이다. 지방도시는 도시이면서 농촌이고 농촌이면서 도시다. 이미 순수한 농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도시라고 하기엔 뭔가 ‘촌티’(?)가 난다. 에코와 디지털이 동시에 작동되고, 유목성과 정착성이 교차한다. 어여쁜 전원주택과 날렵한 고층아파트가 불균형의 균형을 생산한다. 고즈넉한 들녘과 들판을 가르는 고속도로가 공존한다.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공생한다.

이도 저도 아니다. 대도시도 아니고 농산어촌도 아닌 지방 소도시들은 애매하다. 규모가 다르긴 하지만, 내가 생활하고 있는 정읍도 내가 활동하고 있는 순천도 애매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곳에서 제3의 새로운 어떤 것이 창발된다.

‘조례-정치’, 새문명 태동의 작은 열쇠

그리고 새로운 질서, 혹은 제3의 것을 출현시키는 촉진자들이 있다. 새로운 문명을 제도화하는 장치들이 있다. 열쇠라고 말해도 좋겠다. 자치단체의 조례가 그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순천 시의 ‘생태문명 활성화 조례’가 그렇고, 전북도의 ‘생태문명 선도 조례’가 그렇다.

조례란 “지방자치단체가 법령의 범위 안에서 해당 단체의 사무에 대해 지방의회의 의결을 거쳐 제정하는 자치법규”이다. 지방자치단체의 필요에 따라 지역 상황에 맞춰 제정하는 일종의 법률이다. 다만, 권리 제한이나 의무 부과, 벌칙을 정할 때는 반드시 상위법의 위임을 받아야 한다.

사실 순천시의 ‘생태문명 활성화’ 조례나 전북도의 ‘생태문명 선도 조례’는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법규들이다. 국가 차원에서 논의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자치단체들은 나름의 독특하고 재미난 조례들을 만들어왔다. 그중에는 아주 황당한 조례도 있지만, 그 역시 제도적 변이의 잠재력으로 보아야 한다.

생태적 문명전환과 관련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2021년과 2022년 ‘춘천 생명 서밋’을 진행했던 강원도 춘천 시의 경우가 생각난다. 춘천 시는 그 당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생명에 대한 새로운 생각, 생명을 모시는 새로운 생활,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생산”을 논의했고, ‘춘천, 생명을 재생하다’라는 주제로 비전 선포식을 열기도 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순천이나 전북도와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관련 조례의 제정 여부다. 제도화를 하지 못한 것이다. ‘도시의 언어’로, ‘정치적 서사’의 형식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다.

작년 제주특별자치도는 멸종 위기에 놓인 제주 남방 큰돌고래를 보호하기 위해 돌고래에게 인간과 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생태법인’ 관련 입법을 위한 토론을 전개한 바 있다. 그리고, 현재 제주특별법 개정안에 이를 반영하여 입법 심의과정에 있다. 그런데, 작년 논의 과정에서 생태법인을 상위법 없이 조례로 먼저 만들 것인가, 아니면 법률을 만들고 이에 의거해 조례를 제정할 것인가 쟁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론은 ‘법률 먼저’였다. 혹 상위법과 관계없이 조례를 먼저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제주도의 남방 큰돌고래 생태법인 입법과 관련해 태스크포스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번 토론회에서 토론자로 참석했던 ‘법 예술가’ 김영준 변호사가 ‘전환자치조례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조례-정치’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집중적으로 다루면 좋겠다. ‘전환자치조례연구소’의 적극적인 활동을 응원한다.).

 

연합뉴스TV
연합뉴스TV

새 문명의 태동, 이번에는 순창이다

기후재난을 통해, AI의 폭발을 통해, 트럼프의 미국을 통해 경험하고 있듯이 우리는 이미 근대문명 이후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문명전환'이라는 구호가 아니라,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과 서사와 시스템을 발명하는 일이다. 실험하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문명담론과 관련해 최근 내 머릿속 키워드가 살짝 바뀌었다. '문명전환'에서 '새 문명의 태동'으로. 순천에서 그 가능성을 관찰한다. 국회토론회를 통해 생태문명도시의 잠재력과 연결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생태문명도시와 순천과 국회토론회는 또 다른 지역에서 새문명의 신호를 고대하게 만든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토론회의 발제와 지정토론이 끝나고, 청중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전라북도 순창에서 활동한다고 했다. 중년의 여성이었다. 전북생명평화포럼 운영위원이란다. 새로운 형식의 연결을 제안했다.

“도시라는 단어 말고 다르게 말할 수는 없을까요? 명확한 경계가 없는 것이 생태일텐데, 행정구역으로 자르고 시작하기보다 좀더 다르게 상상하고 꿈꿔볼 순 없을까요. 옵시디언이라는 메모앱처럼 언제든 누구든 주체나 중심이 될 수 있는 그 중심이 뭔가를 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 이를테면 시민 하나하나가 실행점인데, 볼펜 끝에서 잉크가 나오듯이 그 실행점이 의도를 가질 때 그 의도와 실행이 적절하도록 하는 거, 그런 건 없을까요?”

춘천과 순천, 그리고 이번에는 ‘순창’이다. 20년이 넘은 세계사회포럼의 슬로건이 여전히, 아니 오늘 특별히 효능감이 있다. "Another World is Possible"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