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을 넘어 외교와 학술로 확장하라

이재명 정부는 인수위라는 준비단계 없이 곧바로 국정을 시작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내각 구성과 긴급정책 등을 집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5년 국정과제 체계를 동시에 종합정리하고 있다. 이 글은 국정기획위원회가 정리하고 있는 K-이니셔티브 정책의 방향성과 구성에 대해 보완이 필요한 지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필자는 민들레에 게재한 지난달 칼럼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한 K-이니셔티브 비전의 의의를 중간지대 국가 정체성에서 발원한 소프트파워 자산이 세계적 문명전환의 시기에 새로운 기회를 포착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지난 칼럼에서는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구체적인 정책방향에 대한 평가나 제언까지는 언급하지 못했다. 국정기획위원회의 최종보고서 완성은 대략 8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이 글이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K-이니셔티브 구상은 한류의 성공과 이를 가능케 한 한국 사회의 독특한 경험을 국가전략의 자산으로 재구성하겠다는 포부를 담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K-이니셔티브의 방향을 살펴보면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정책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K-이니셔티브의 핵심 비전을 다시 점검하고, 산업을 넘어 외교 및 학술 영역으로 확장할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산업, 외교, 학술의 세 영역의 균형적 접근이 이루어질 때, K-이니셔티브는 단순한 경제성장 전략을 넘어 21세기형 선진 문화국가의 전략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수상자 간담회를 마치며 참석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칸국제영화제 학생부문(라 시네프) 1등상을 수상 허가영 영화감독,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코망되르'를 수훈한 조수미 성악가, 김 여사, 이 대통령, 토니상 6관왕을 석권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박천휴 작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연출한 김원석 감독, '로잔발레 콩쿠르'에서 우승한 박윤재 발레리노,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 2025.6.30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가 3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파인그라스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수상자 간담회를 마치며 참석자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칸국제영화제 학생부문(라 시네프) 1등상을 수상 허가영 영화감독,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코망되르'를 수훈한 조수미 성악가, 김 여사, 이 대통령, 토니상 6관왕을 석권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박천휴 작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연출한 김원석 감독, '로잔발레 콩쿠르'에서 우승한 박윤재 발레리노,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 2025.6.30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산업 중심의 K-이니셔티브,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선거 과정에서 이재명 대선 후보 직속으로 설립된 'K-이니셔티브 위원회'는 대한민국의 미래 성장을 위한 21개 아젠다와 8개 기반전략 분과를 구성한 바 있다. 위원회는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위기를 경제성장의 한계, 지역 및 계층 불균형, 세계적 기술패권 경쟁의 심화 세 가지로 파악하고, 주로 산업정책 위주로 구성된 아젠다를 발표했다. 또한 이와 별도로 ‘K-문화강국 위원회’가 운영되어 세계 ‘5대 문화강국’으로의 도약이라는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문화콘텐츠 산업과 푸드, 뷰티, 관광 등 K-컬처의 발전을 위해 문화재정을 대폭 확대해 국가적 지원을 강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기조와 방향성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큰 문제점은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정책에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과 산업정책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안팎의 위기상황과 AI혁명이라는 경제 대전환의 시기에, 정부와 기업이 손을 맞잡고 추진하는 산업정책의 수립은 매우 긴요한 과제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산업 중심 성장 전략을 ‘K-이니셔티브’라는 이름 아래 포괄하는 것이 이 구상의 본래적 취지에 부합하는지는 의문이다. 각종 산업 분야의 성장정책이 너무 넓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K-이니셔티브 본래의 의의와 가치를 실현해야 할, 다른 분야의 정책이 들어가야 할 공간을 잠식하거나 무시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백범의 문화국가론을 다시 생각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의 꿈을 현실로 만들자고 했다. 이를 위해 문화산업 분야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통해 문화콘텐츠의 세계 표준을 다시 쓰고 대한민국을 글로벌 소프트파워 5대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고 천명했다. 백범의 문화국가론은 이재명 대통령이 K-이니셔티브 비전을 수립하는 데 결정적 영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백범일지>의 맨 마지막에 장에 나오는 ‘내가 원하는 나라’의 첫 단락을 다시 한번 의미해 보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백범의 문화국가론의 핵심은 도덕과 정신문명에서 앞선 문화 선진국의 비전이다. 제국주의 침략의 최대 희생자였던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가 제시한 새로운 국가의 길은 단순히 부국강병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범은 높은 도덕과 문화 수준을 겸비하여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인류의 모범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소망했다. 이 글이 쓰인 1943년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너무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도 하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음미해보니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국가발전의 비전을 정확하게 제시한 탁월한 통찰이었다. 백범의 꿈이 지금 K-이니셔티브라는 비전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K-이니셔티브 구상은 김구의 철학을 좁은 의미의 문화산업 정책으로 축소하고 있다. 한류의 원동력은 단순히 산업적 측면 성공만이 아니라, 한국이 겪어온 격동의 현대사, 분단과 전쟁,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이 농축된 결과다. 이 과정에서 한국적 고유문화와 외래의 서양문화가 서로 뒤섞이면서 창조해낸 ‘융합문화 정체성’이 한류의 핵심 자산이다. 따라서 백범이 꿈꿨던 문화국가는 산업성장을 넘어서 인류에 대한 정신문명적 기여로 확장될 때에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K-이니셔티브 구상의 요체가 되어야 한다.

K-이니셔티브, 외교정책과 긴밀히 연동되어야

K-이니셔티브의 실질적 확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외교정책과의 유기적 연동이다. 오늘날의 세계질서는 미국 단일 패권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문명 질서가 모색되는 대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은 중간지대 국가로서 지정학적 충돌의 최전선에 놓여 있으며, 그만큼 안보적 불안과 외교적 압박에 휘말릴 위험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위기를 능동적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존 외교·안보 정책의 관성을 과감히 탈피하여 좀 더 창의적이고 다변화된 외교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한미관계든 한중관계든 남북관계든 모두 기존의 익숙한 접근법에서 벗어나 창의적·주동적으로 이슈를 만들어가야 한다.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는 동맹외교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그 반대급부로 중국에 대한 과잉 기대의 역편향에 치우쳐서도 곤란하다. 다시 말해, ‘친미냐, 친중이냐’식의 이분법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아야 한다. 실용주의적 국익을 최우선에 두고 사안별로 친미와 친중을 선택적으로 구사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슈에 따라서는 미·중 갈등 국면에서 중재자 또는 조율자의 역할도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한국 외교의 주동성과 창발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외교지형의 다변화 역시 K-이니셔티브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과제다. 기존의 관성대로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4대 강국에 집중된 외교로는 국익을 극대화하기도,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국제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기도 어렵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협력 대상이 새롭게 부상하는 글로벌사우스 진영 국가들이다. 이들과의 협력 강화는 단지 자원확보나 시장개척을 넘어, 앞으로 전개될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모색할 때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한국이 이들 국가와의 협력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강점은 분명하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경제선진국으로서 글로벌노스 국가 진영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 진영의 대다수가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가진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던 반면, 한국은 그와 정반대의 경험을 가진 국가다. 한국은 글로벌노스 국가 중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겪고 개발도상국을 거쳐 단기간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글로벌노스와 글로벌사우스 양 진영 모두에 일정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이중정체성’ 국가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은 양 진영을 잇는 가교국가로서의 외교적 잠재력을 지닌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양 진영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이처럼 중간지대적 성격을 지닌 국가의 가교국가 및 중재자 역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이 이러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경제 발전의 경험,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류라는 문화적 자산은 강력한 소프트파워 자원이 될 것이다. 한류의 성공은 문화적 자산을 넘어서 외교 전략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며, K-이니셔티브는 그 연장선 위에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한국학 융성으로 ‘K-학술’과 병행해야

K-이니셔티브의 확장과 지속적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과제는 한국학의 대대적 육성에 기반한 ‘K-학술’이다. K-이니셔티브의 지속가능성과 국제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산업과 문화 중심의 실천적 성과뿐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학문적 기반 구축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K-학술’에 대한 전략적 지원 없이, K-이니셔티브 구상의 장기적 비전이 공고히 자리잡기는 어렵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한국학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을 통해 학술한류를 육성해야 한다.

최근 한국의 학술역량도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글로벌 지식계의 변방 주변부와 소비지에 머물렀던 관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제는 서구이론의 수입에 의존하는 학문적 식민성의 굴레를 벗어나, 한국이 축적한 고유의 역사적 경험과 역동성을 주체적으로 이론화하는 노력을 더욱 배가해야 한다.

학술한류의 방향성은 한국이 축적한 고유한 역사적 경험, 예컨대 식민지 경험, 분단과 전쟁, 민주화와 산업화의 동시 달성, 한류의 성공 등을 학술적으로 이론화하고, 그것을 세계 학계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K-이니셔티브는 산업 중심의 성장 프레임을 넘어서 한국적 지식과 가치의 세계적 확산, 나아가서 세계사적 문명전환의 시대에 한국의 기여와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재명 정부의 K-이니셔티브는 단지 경제성장을 위한 산업정책의 구호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류의 성취를 계기로, 한국이 문화선진국으로서 문명사적 기여를 모색하는 비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산업이라는 실행축에 더해, 외교라는 전략적 확장축, 학술이라는 사상과 이론의 기반축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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