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조성렬 북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우리 국민들 가운데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웃국가로서 경제적, 인적 교류가 활발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가운데 가치를 공유한 일본과의 다방면에 걸친 협력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안 양국 관계의 개선 노력은 과거사의 벽에 부딪혀 좌초되곤 했다.

양국 정상이 몇 차례 만나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에 합의했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이유는 과거사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못한 데 있다. 과거사 문제의 출발점은 바로 일본이 식민지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일 관계 정상화에서 돈이나 사과는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며 식민지 불법성을 일본이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관철해야 할 핵심적인 원칙이다.

지금까지 일본정부는 ‘고노담화’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했고, ‘무라야마 담화’에서 전쟁범죄에 대해 사죄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은 한·일 정상이 만나 식민지 지배에 따른 한국 국민의 손해와 고통에 대해 사죄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이 선언조차 식민지 불법성에 대해 명확히 하지 않고 미봉해 버렸다. 국내에서도 식민지 불법성을 학계나 정치권, 시민사회에서 주장했지만 이를 사법적 판단으로 뒷받침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 불법성을 법령의 해석·적용의 최고 권한을 가진 최고법원의 권위를 통해 확립한 것이 2012년 5월의 대법원 판결과 2018년 10월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다. 대법원 판결들은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문제를 사례로 다룬 것이지만, 식민지 합법성을 전제로 내린 일본법원의 판결이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충돌한다면서 식민지 불법성을 사법적으로 뒷받침한 역사적인 판결이다. 이 판결은 식민지 지배가 불법적이므로 일본 전범기업이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이에 불복할 경우 강제이행을 위해 일본기업의 국내자산을 현금화하라는 것이다.

식민지 불법성을 부인해 온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이 한·일간 외교합의를 깬 것이라며 ‘국제법 위반’ 프레임으로 한국 정부를 공격해 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강제동원피해자 문제가 한·일 청구권 협정이 다루지 않은 별개 문제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한국 사법부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정작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것은 사법부 독립성이 불완전한 일본식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민주화 이후 엄격히 삼권분립이 이루어진 한국에서 정부가 대법원 판결에 대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이해 못하거나 못하는 척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대법원 판결과 상치되는 합의를 일본과 해줄 수는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만약 그럴 경우엔 격렬한 국민의 저항을 각오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12년 5월 대법원이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우리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며 강제동원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자, 박근혜 정부가 이를 전원합의체에서 뒤집기 위해 양승태 대법장과 ‘상고심 법원’ 설치를 조건으로 야합을 시도했다. 결국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쳐 ‘사법농단 사건’으로 비화되어 양승태 대법원장은 구속되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기업 배상과 일본 정부 사죄 없는 중첩적 채무인수 방안은 실효성 없어

현재 우리 정부가 강제동원피해자 문제의 해법으로 내놓은 것이 이른바 ‘중첩적 채무인수’ 방안이다. 기존의 ‘대위변제’ 방안은 피해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폐기되었다. ‘중첩적 채무인수’ 방안은 행정안전부 산하의 공익법인인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 전범기업의 채무를 인수해 대신 갚아준다는 것이다. 이 해법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도 가능하다는 국내 판례에 근거한 것으로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재단의 배상금 대리 지급에 대해 채무자(가해자) 전범기업이 동의할 것인가, 둘째 재단의 보상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두 가지가 여전히 과제로 남는다.

첫째, 국내에서 발생하는 채권-채무 관계라면 제3자가 대신 부채를 갚아준다고 할 때 채무자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배상금 대리 지급에 채무자(전범기업)가 동의한다는 것은 식민지 불법성을 전제로 한 대법원 판결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나서서 동의하지 못하도록 말릴 가능성이 높다.

둘째, 일본 전범기업들이 돈을 내지 않는 대신에 일본 청구권 자금의 지원으로 성장한 포항제철 등 한국기업들이 기부금을 내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가해자인 일본 정부의 사과도 없고 전범기업들의 배상금 납부도 없이 피해자인 한국 측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굴욕외교라는 점에서 강제동원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한국 국민들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피하기 위해 현재 거론되는 실행방안은 한국기업의 돈은 전경련 이름으로, 전범기업의 돈은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의 이름으로 재단에 기부금을 내되 돈의 성격(배상금, 보상금, 위로금 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편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기존 선언을 존중한다는 간접방식을 취함으로써 추가적인 사과는 피한다는 것이다.

‘중첩적 채권인수 방안’에 대해 일본에서도 우려가 나왔다. 일본 국가기본문제연구소는 기고문을 통해 세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채무자와 인수인이 계약을 맺거나 출자해야 하는데 이 경우 대법원 판결을 인정하는 게 된다. 둘째는 재단의 대체변제에서 배제된 다수의 강제동원피해자들(근로자·군인·군무원)이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셋째, ‘식민지 불법성에 따른 배상금 지급’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여전히 미실현된 채로 남게 된다. 따라서 이 해법은 윤석열 정부에서만 유효하고, 차기 정부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의 국제법 위반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와 같은 보완책이 과연 대법원 판결에 부합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베 정권에 들어와 기존 담화들을 부정해 껍데기만 남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유효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식민지 불법성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또한 전범기업들이 명시적으로 동의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채 게이단렌을 통해 성격 불명의 기부금을 재단에 납부할 경우 전범기업의 ‘배상금 지급’으로 볼 수 없다. 한국은 배상금, 일본은 위로금 등으로 각자 해석하도록 맡긴다면 이는 대법원 판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전경련이든 게이단렌이든 재단에 기부금을 낼 때 그 돈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한·일 과거사 문제의 해법과 관련해 로버트 푸트남 미 하버드대 교수의 양면게임(Two-Level Game) 이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국가 간 협상에 앞선 국내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적 동의를 얻는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고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 여기에 끼워맞추기 식으로 요식적인 행사와 절차만 마친 채 일본과 합의에 나선다면 결국 일본의 요구에 끌려가는 굴욕외교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제2 위안부 합의 사태를 막고 대일 굴욕외교를 피하기 위해서는 긴 안목에서 국민적 동의(좁게는 피해자의 동의)를 얻는 노력을 지속하면서 식민지 불법성의 ‘원칙’을 견지하며 일본과의 외교협상에 나서는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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