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레 논설실장

세상만사를 긴급성과 중요성을 기준으로 나누면,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긴급하고 중요한 것, 중요하지만 긴급하지는 않은 것, 긴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것, 긴급하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말입니다.

이 가운데 미디어가 가장 주목하는 세상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항목인 긴급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한반도에 드리우고 있는 전쟁 위기 같은 사안이 대표적이겠죠. 뉴스 가치로 보자면 위에 분류한 순서대로 뉴스를 다루는 것이 정상입니다. 긴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은 아예 미디어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가끔 정신 나간 기자들은 ‘대통령이 개를 끌고 출근하는 것’과 같이 긴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버젓이 뉴스로 내보냅니다. 그러니 기자들이 조롱받고 언론이 신뢰를 잃는 것이겠죠.

그건 그렇고 제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디어의 냉대입니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첫 번째에만 집중하는 나머지 두 번째의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사안들을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냐?’라는 우스갯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태도입니다. 시간적인 요소를 빼놓고 보면, 아마 두 번째 사안 가운데 우리네 삶에 훨씬 크고 깊은 영향을 주는 것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광주문화방송>이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해, 새해까지 이어가고 있는 ‘한글 이름’ 쓰기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몇 해 전부터 여러 방송사가 한글날 하루만 텔레비전 수상기의 오른쪽 위에 회사 이름을 한글로 적는 일회성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것만 해도 안 하는 것보다 장하다고 할 수 있지만, 뭔가 속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크지 않은 지역의 방송국인 <광주문화방송>이 대담한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1976년 순 한글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를 창간한 한창기 씨는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라는 글에서 방송사들의 국적도 논리도 없는 영어 이름 사용을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미국은 자기 말의 앞 글자를 따서 ABC니, NBC니, CBS니 하고 쓰지만, 우리나라 방송은 뭣도 모른 채 자기 이름을 영어로 바꾼 뒤 다시 영어 앞 글자를 따서 KBS(한국방송), MBC(문화방송)하고 부르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일본의 NHK가 영어로 그렇게 쓰는 것은 ‘日本放送協會(니혼호쇼교카이)’라는 제 나라말 이름을 영어 소리대로 따서 쓴 것이니, 일본 흉내 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본 흉내도 제대로 내지 못한다고 꼬집은 것이지요. 그리고 방송이 수만 명의 대중에게 국어를 순화하자고 외치기에 앞서 제 이름부터 제대로 쓰는 게 중요하다고 일갈했습니다.

<광주문화방송>이 한창기 씨의 그런 문제 제기에 46년 만에 진지하게 응답하고 나섰으니, 한국 방송사 아니 한국 언론사의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중시해 제가 대표를 맡고 있는 ‘좋은 기사 연구 모임’에서 지난해 12월 15일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이름 표기, 그 의미와 과제’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미리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내 취재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연합뉴스>가 사전에 알림 기사를 내보냈을 뿐 단 한 곳의 언론사도 취재를 오지 않았습니다. <광주문화방송>의 어머니 회사라고 할 수 있는 <문화방송>조차 외면했습니다. 우리나라 미디어들이 정말 중요하지만 긴급하지 않은 기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아니 그 중요성을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1896년 서재필 선생이 순 한글 신문 <독립신문>을 낸 뒤 80년 만인 1976년 한창기 씨가 순 한글 가로쓰기 잡지인 <뿌리깊은나무>를 냈습니다. 또 그로부터 12년 뒤 순 한글 가로쓰기 신문 <한겨레신문>이 탄생했고, 1995년부터는 <중앙일보>가 순 한글 가로쓰기를 이어받으면서 지금은 모든 미디어가 순 한글 가로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한글을 창제한 이래아직도 수많은 ‘최만리’들이 사회 곳곳에서 저항하고 있고 그래서 때로는 역사가 뒤로 가는 것도 같지만, 이렇듯 한글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넓고 깊게 생활 속에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이름 시도가 방송계에 굳게 똬리를 틀고 있는 신화 깨기의 의미가 있다면서, 앞으로의 과제로 다른 방송사들과 연대하고 시청자의 욕구와 필요를 더 정확하게 파악해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광주문화방송>은 일단 1월 중순의 설날까지 한글이름을 계속 쓰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장기적인 종합방안을 마련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시민의 관심입니다. <광주문화방송>의 시도는 중요하지만 긴급하지는 않은 일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다른 방송사와 신문사가 관심을 갖지 않고 보도도 하지 않고 있다고 짐작합니다. 하지만 시민은 미디어와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미디어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말고, 우리의 삶에 길고 넓고 깊게 영향을 줄 만한 사안에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주문화방송>이 하는 의미 있는 일이 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그래서 모든 방송들이 자신의 정체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이 맡은 중요한 몫입니다.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광주문화방송>의 외롭고 의로운 행동을 격려하고 지원하고 응원해 주길 부탁합니다.

저도 이번 <광주문화방송>의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칼럼의 문체를 입말과 일치되도록 ‘했습니다’체로 바꿨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했다’ 체로 쓰는 미디어의 칼럼 문체가 고압적이고 시건방져 보인다는 지적이 의외로 많더군요.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문체라는 겁니다. 제가 이번에 문체를 ‘했습니다’ 체로 바꾼 것도 어찌 보면, <광주문화방송>의 한글 이름 표기가 가져온 긍정적인 ‘나비 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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