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싸울 거라는 윤, 교화 가능성 제로
그렇다면 괴물을 낳은 체제 재검토해 봐야
계엄사태 이후 대통령 윤석열에게 ‘확신범’이라는 수식어가 달린 기사의 헤드라인을 여럿 보았다. 12월 12일 발표된 윤석열의 대국민 담화문, 그리고 전 국방부 장관 김용현의 옥중 입장문 등을 보면 ‘확신범’이라는 수식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경우는 앞으로 다시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확신범’이라는 단어는 미디어 등에 꽤 자주 등장하는 법철학적 개념이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의 용어라서 오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특히, 일반인들은 ‘자신의 행위가 옳다는 확신 하에 위법행위를 저지른 경우’를 통틀어 ‘확신범’이라 칭하기도 하고, 때로는 ‘처음부터 위법행위를 할 목적이 확실한 경우’를 ‘확신범’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보통 행위자를 더 강하게 비난하기 위해 ‘확신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더 강력한 처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는 하는 것이다.
대부분 잡범 아닌 중대 범죄자여서 더 위험한 확신범
학계에 정립된 확신범의 정의는 “행위자가 정치적, 종교적, 또는 윤리적 확신에 의하여 행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여 현행 실정법에 위배되는 행위를 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의무’이다. 이 ‘의무’는 단순히 ‘자신이 옳다는 확신’ 또는 ‘위법행위의 목적’과는 다르다. 이 ‘의무’는 정치·종교·윤리적 확신에 의해 생겨난, 일반인과는 다른 ‘특수한 의무의식’이라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절대적 구속력을 가지는 것이다. 즉, 만약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종교적 확신범이라면 신으로부터의 이탈을, 비종교적 확신범이라면 인격의 실체상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의 법철학자인 라드브루흐는 확신범의 경우 ‘도덕적이지 않은 자’가 아니라 ‘다르게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형벌의 목적, 교화 또는 위협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반적인 형벌의 목적 – 교화 또는 위협 - 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그저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치 전쟁포로를 다루듯 감금해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 형법의 기초를 닦은 엄상섭 선생은 확신범에 대해서 “현실적 질서를 유지함에 필요한 한계에서만 그의 자유를 제약하고 행동을 억제함에 그쳐야 할 것”이라면서 확신범을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처우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즉, 형법학에서 확신범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는, 행위자가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따른 의무를 이행한 것이어서 그를 과연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의문이 있는 경우이다.
물론, 확신범이라는 개념은 학술적인 의미를 가질 뿐 실무상 확신범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그 어떤 나라에서도 확신범이라고 하여 처벌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그들에게 적용되는 죄명은 형법전에서 가장 중하게 처벌하는 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엄상섭 선생에 따르면, “그들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확신’에 기인하여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그 성질상 집단적, 전파적이며 그 결과는 개별적인 경우에도 보통 살인 등의 중대범죄로 나타나는 것이고, 집단적일 때에는 국가나 사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내란죄, 반역죄 등을 구성하게 되므로 국가와 사회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로 인하여 부득이 가혹한 형벌로 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확신범 중에 소위 잡범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위험하다.
윤석열의 확신은 도덕적 추론의 결과일까, 직관에 의한 것일까
그런데 확신범들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도저히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특수한 의무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의무에 따라 행동한 것이라,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다. (이미 말했듯이 어디까지나 학계의 논의에 불과하다. 현실법정에서는 언제나 여지없이 처벌당한다.)
전제가 되는 문제는 도덕적 판단의 본질이다.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합리적인 이성에 의한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이 더 크게 작용할까, 아니면 주로 도덕적 정서에 의해 작동되는 도덕적 직관(moral intuition)이 더 크게 작용할까.
도덕적 판단을 이성에 의한 도덕적 추론에 의한 것으로 보고, 확신범이 순전히 도덕적 추론을 통해서만 특수한 의무의식에 이른 것이라 본다면 확신범은 일반 범죄자와 다르게 취급될 이유가 없다. 이성적 추론에 의하면 도덕적 확신은 비판적인 심사를 받아야 하는 잠정적인 진리 내지 가치에 불과하므로 잘못된 도덕적 확신이 있더라도 이성적 추론과정을 통해 적법행위로 나아갈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병역법 위반 사건에서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상의 결정이 적법행위로 나아갈 동기의 형성을 강하게 압박할 것이라고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적법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실제로 전혀 불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대법원 2024. 7. 15. 선고 2004도2965 전원합의체 판결)”고 판단하여 이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진화윤리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도덕적 판단은 합리적인 이성에 의한 도덕적 추론보다는 주로 도덕적 정서에 의해 작동되는 도덕적 직관에 의해 더 크게 좌우된다고 보고, 여러 연구와 실험 결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확신범은 일종의 ‘도덕적 격정범’으로 볼 수 있어 면책될 여지가 존재하게 된다. 도덕적 직관을 개인의 본성이라 보고, 그 본성이 어떤 특수한 자극을 받아 증폭되면 도덕적 격정이 일어나게 되는데 확신범은 그와 같은 도덕적 격정에 따라 행위를 한 것이라 애당초 이성으로 자신의 행위를 통제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황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과잉방위가 기대불가능성으로 면책되는 것과 유사한 법리적 구조로 확신범도 면책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교화 가능성 없는 확신범을 낳은 정치체제는 어찌 할까
각설하고, 단순히 두 사람이 발표한 담화문이나 입장문만 가지고 판단하여 보면 윤석열이나 김용현은 둘 다 확신범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두 사람은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이 국가적 비상상태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는데, 그 판단은 정치적 확신에 기반한 것이며 대통령, 그리고 국방부장관으로서 반드시 이와 같은 국가적 비상상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무의식을 가지고 계엄에 나아갔다. 계엄이 6시간 만에 해제되고, 검경이 내란 및 직권남용 혐의로 수사를 시작하고,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들끓고 있는 지금도(!) 두 사람의 위와 같은 의무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탄핵소추된 대통령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고, 전 국방부 장관은 ‘구국의 정’을 논하고 있다. 이들은 감옥에 가더라도 자신들의 행위를 반성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을 되돌려 다시 12월 3일이 된다 해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추가될 수 있을 뿐.
이들을 처벌하는 일은 우리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명하다. 하지만 그들 개인에 대한 처벌이나 교화의 측면에서는 형벌이 별 의미가 없는 일일 수 있다. 처음부터 헌정 질서에 따르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면, 반성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아직도 부실하기 그지없어 그런 자들을 걸러내기에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반성해야 하고, 현재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깊이 고찰해보아야 한다. 이미 탄핵 당하는 대통령이 두 번이나 나왔으니 현재의 정당체제와 선거제도 하에서는, 전체 집단으로서의 국민의 선택은 잘못될 확률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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