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쪽이 추진한 OCI그룹과의 통합 무산

한미사이언스 주총서 통합 반대 형제쪽 승리

모녀쪽 승기 잡고도 소액주주 반란에 결국 패배

“절차적 정당성 떨어지고 주주가치 제고에 부정적”

“한미약품 그룹과 OCI그룹이 통합하면 과연 시너지가 날까?” 지난 1월 12일 오후 장이 끝나자마자 두 그룹이 통합 계획을 발표했을 때 곧바로 제기됐던 의문이다. 한미사이언스 창업자의 아들들도 모르게 창업자 아내와 장녀가 손잡고 OCI 측과 전격 합의한 결정이라 경영권 분쟁을 예고했다. 그 뒤 모녀 측과 형제 측은 3개월 가까이 공방을 벌였고 28일 승패가 났다.

이날 경기 화성시 라비돌 호텔에서 개최된 한미사이언스(한미약품 지주사) 정기 주주총회에서 고 임성기 창업자의 장남과 차남인 임종윤, 임종훈 형제 측이 주주 제안한 이사진 5명의 선임 안건이 모두 통과됐다. 이에 따라 임종윤, 임종훈 사장은 사내이사로, 권규찬 디엑스앤브이엑스 대표이사와 배보경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기타비상무이사로, 사봉관 변호사는 사외이사로 각각 선임됐다.

 

임종윤·종훈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가 28일 오전 경기 화성시 라비돌 호텔에서 열린 한미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의 제51기 정기 주주총회가 끝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24.3.28.연합뉴스
임종윤·종훈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가 28일 오전 경기 화성시 라비돌 호텔에서 열린 한미그룹 지주사 한미사이언스의 제51기 정기 주주총회가 끝난 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2024.3.28.연합뉴스

이로써 한미사이언스 이사진 9명 중 형제 측 인사가 5명으로 과반을 차지했다. 형제 측은 52% 안팎의 찬성표를 얻으며 출석 의결권 수 과반의 찬성표를 받아 사내이사 선임에 성공했다. 권 대표와 배 교수도 각각 51.8%의 찬성표를 얻었다. 사 변호사는 찬성표는 52.2%였다. 이에 반해 모녀 측이 밀었던 이사들은 모두 과반을 얻는 데 실패했다.

이날 주총은 오전 9시에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의결권 있는 주식 수를 확인하는 과정이 길어지며 주총 결과는 오후 3시 이후 발표됐다. 한미사이언스 주총은 한미약품 그룹과 OCI그룹 간 통합 계약 발표 후 치열했던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에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컸다. 임종윤과 임종훈 사장은 통합에 반대하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통합을 주도한 모친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 누이 임주현 부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여왔다.

주총이 열리기 전날까지만 해도 모녀 측은 약 43%의 지분을 확보해 형제 측보다 지분이 3%포인트가량 많았다. 대주주 중 한 명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12.15%)이 형제 측을 밀었으나 한미사이언스 지분 7.66%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모녀 측 손을 들어주며 흐름이 바뀌었다.

이번 경영권 분쟁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던 국민연금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는 지난 26일 회의를 열어 한미사이언스 주총에서 송 회장이 이끄는 한미사이언스 현 경영진이 추천한 임주현·이우현 사내이사, 최인영 기타비상무이사, 김하일·서정모·박경진 사외이사 선임 안건에 찬성하기로 했다. 이날 법원이 통합 계약의 주요 사항인 신주 발행에 대해 문제없다고 판단한 것도 모녀 측에 호재로 작용했다. 통합의 법적 불확실성이 해소된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모녀 측과 형제 측을 지지하는 지분 차이가 크지 않았던 게 변수로 작용했다. 소액주주의 의결권 행사 방향에 따라 우위가 뒤바뀔 수 있어 주총 결과를 예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유동적 지분이 16% 정도인데 이 중 5%만 의결권을 행사해도 결과가 바뀌기 때문이다.

예상을 깨고 형제 측이 승리하면서 한미약품과 OCI 통합 계획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주총 직후 OCI그룹은 통합 중단 방침을 전했다. OCI홀딩스는 “주주분들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통합 절차는 중단된다”고 밝혔다.

고 임성기 창업자가 설립한 한미약품은 한국 제약업체 중 신약 연구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몇 안 되는 기업이다. 그 결과 수조 원대 기술 수출에 성공하기도 했다. OCI는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가 주력 사업으로 한미약품과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두 그룹은 시너지가 있을 것이라며 통합을 정당화했다. 통합 후 각자 경영을 유지하되 제약과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모두 보유한 더 큰 그룹으로 성장한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러나 계획안을 보면 지분 교환과 유상증자 등을 통해 통합을 추진한 지배주주들이 얻을 이익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데 비해 시너지 효과에 대한 내용은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다. 이들은 OCI그룹 지주사인 OCI홀딩스가 한미사이언스 지분 약 27%를 7700억 원에 인수하고 송 회장과 임 부회장 등 한미사이언스 주요 주주도 OCI홀딩스 지분 약 10.4%를 취득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통합이 끝나면 OCI홀딩스가 한미사이언스의 최대 주주에 오르고 임 부회장 측은 OCI홀딩스의 개인 1대 주주가 된다.

통합을 통해 임 부회장 등 한미약품 총수 일가는 수천억 원대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수 있고 한미약품에 투입할 연구개발 자금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지배주주로서 경영권을 지킬 수도 있었다. OCI그룹도 경영권 프리미엄 없이 한미사이언스를 중간 지주사로 둘 수 있게 된다. 통합에 수천억 원대 자금이 투입되지만 수조 원대 자산을 보유한 한미약품 그룹을 인수하는 것은 '남는 장사'다.

지난 2022년 인수한 부광약품 실적 부진 등 신사업인 바이오 부문을 키울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한미약품이 보유한 기술과 역량을 활용하면 바이오 사업에서도 큰 성과를 낼 기회가 생긴다. 두 회사 통합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에서 OCI그룹에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임종윤 사장 등 형제 측은 통합 발표가 나온 직후 강하게 반발했다. 임 사장은 언론에 보낸 메일을 통해 통합 반대 여론전을 펼쳤다. 그는 “한미약품 그룹이 OCI그룹에 사실상 종속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거래를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후 5년간 지금의 체제를 바꾸지 말라”는 부친의 유언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OCI와 통합 결정을 철회하고 1조 원 투자 유치를 통해 바이오 의약품 수탁 개발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는 경영 방침을 천명한 바 있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한미타워에서 열린 OCI그룹 통합 관련 기자회견에서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사장(오른쪽)과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이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2024.3.25. 연합뉴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송파구 한미타워에서 열린
OCI그룹 통합 관련 기자회견에서 임주현 한미사
이언스 사장(오른쪽)과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이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2024.3.25. 연합뉴스

한미약품 창업자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양쪽 모두 주주 친화와 주주가치 제고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서로 지배력을 높이려고 했던 이전투구일 뿐이다. 통합을 추진했던 모녀 측은 연구개발 투자와 상속세 마련을 위한 형제 측의 자금 조달 대책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모녀 측 역시 밀실 협상을 통해 통합을 발표했고 임 부회장 등 경영진의 능력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한국ESG평가원은 지난 25일 한미사이언스 주총에 상정된 이사 선임 안건에 대해 형제 측 주주제안에 찬성을 권고했다. 그 이유로 “모녀 측이 주도한 OCI와 통합 계약은 절차적 정당성이 떨어지고 사내이사로 추천된 임 부회장과 이우현 OCI그룹 회장의 경영 능력도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기업가치와 주주가치 제고 측면에서 형제 측의 제안에 찬성하는 게 합당하다고 본 것이다. 주총에 참석한 소액주주들도 평가원 의견에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통합 불발 소식에 28일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9%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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