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서 4년만…일본 국가 연주는 처음

이도훈 외교 차관, 손경식 경총 회장 등 참석

윤석열 정부 한덕수 총리, 박보균 장관도 전력

이재명 "대일 저자세·굴종 외교의 치욕적 장면"

정의당도 "정부, 전범국가 뻔뻔함에 장단 맞춰"

서경덕 교수 "참으로 통탄할 일…명백한 결례"

이도훈 외교부 2차관이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들어서고 있다. 2023.2.16. 연합뉴스
이도훈 외교부 2차관이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들어서고 있다. 2023.2.16. 연합뉴스

서울 한복판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리셉션이 열리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까지 처음으로 연주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계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와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독도 영유권 등을 둘러싼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 굴욕 외교와 맞물려 비판 여론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기류다.

주한 일본대사관은 지난 16일 오후 서울 남산 주변 한 호텔에서 국내 인사들을 초청한 가운데 나루히토(德仁) 일왕의 생일(2월 23일) 기념 리셉션을 열었다. 일왕의 생일을 일종의 국경일로 기념하는 일본은 매년 세계 각국에서 재외공관 주최로 주재국 주요 인사 수백 명을 초청해 연회를 개최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으로 한동안 중단됐다가 한국에서는 2018년 12월 이후 4년 2개월 만에 치러졌다. 나루히토 일왕이 2019년 5월 즉위한 이후로는 한국에서 처음 열린 생일잔치인 셈이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외교부에서 통상 양자관계를 담당하는 1차관이 참석해 왔지만, 올해는 조현동 1차관이 한미일 외교 차관 협의회 차 미국을 방문 중이어서 이도훈 2차관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을 비롯해 정·관·재계 인사 상당수가 행사장을 찾았지만 전체 참석자 명단은 알려지지 않았다. 행사장 내에는 한국인들의 일본 여행을 유도하기 위해 일본 지방자치단체를 소개하는 부스도 다수 마련됐다고 한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들어서고 있다. 2023.2.16. 연합뉴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이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들어서고 있다. 2023.2.16. 연합뉴스

행사가 진행된 호텔 앞에서는 시민단체들이 항의 목소리를 냈다. 활빈단 홍정식 대표 등 5명은 호텔 정문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일왕 생일파티를 중단하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펼치고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호텔이 있는) 남산 중턱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등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읽고 소금과 고춧가루 등을 뿌리기도 했다.

일본 우익 성향 일간지 산케이신문은 온라인판인 16일 자 <특보: 기미가요를 처음 연주, 한국에서 천황 탄생일 리셉션…일·한 정상화로 한걸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날 행사장에 기미가요가 흘렀다고 상세히 보도하며 윤석열 정부의 '지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반일 감정 때문에 예년에 국가를 트는 것을 미뤘으나 지난해 출범한 윤석열 정권이 대일관계 개선을 지향하고 일본 정부도 삐걱대는 양국 관계를 벗어날 호기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일본대사관 관계자는 그동안 행사에서 기미가요를 틀지 않은 것에 대해 산케이신문에 "참석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해왔지만, 과도한 면도 있었다"면서 "대사관 주최 행사에 국가 연주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 속에서 이번에 당연한 모습으로 하자고 해서 한국 국가와 함께 기미가요를 틀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 앞에 한 시민단체가 축하연 개최를 규탄하며 바닥에 고춧가루를 뿌린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2.16. 연합뉴스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 앞에 한 시민단체가 축하연 개최를 규탄하며 바닥에 고춧가루를 뿌린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2.16. 연합뉴스

그러나 '당신의 시대'를 뜻하는 기미가요의 노랫말은 일왕의 치세가 영원히 이어지길 기원한다는 점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대표적 상징물로 꼽힌다. "당신의 시대는/ 천대에 팔천대에/ 작은 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생길 때까지"라는 내용으로 일왕의 치세가 8천 대까지 무궁하기를 기원하는 가사다.

나라를 잃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해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한국 입장에서는, 게다가 침략과 수탈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로 인해 끊임없이 2차 가해를 겪었던 시민들로서는 남산 밑에서 외교부 차관까지 참석한 가운데 기미가요가 울려 퍼진 상황을 용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산케이신문은 또 "한국에서는 일왕 생일 기념행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친일파'로 비난받는다"면서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과거 이 행사에 참석했다가 인사청문회에서 논란이 됐던 사례를 소개했다.

실제 지난 2022년 5월 2일 박보균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는 '친일' 의혹 등 박 후보자의 역사관이 주요 쟁점이 됐었다. 박 후보자는 2013년 주한 일본대사관 주최로 열린 일왕 생일잔치에 참가했던 사실을 두고 비판이 거세자 "일왕 생일잔치는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를 비판하기 위한 르포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취재차 참석한 것"이라며 "초대장을 받지 않고 들어갔다"고 주장했으나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주한 일본대사관에 따르면 초대장 없이는 입장할 수 없는 행사였고 언론사에도 비공개로 해 기자들 출입을 막았기 때문에 박 후보자가 거짓 증언을 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한덕수 국무총리 역시 같은 시기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2013년도 무역협회 회장이던 시절 역대 무역협회 회장 중 처음으로 일왕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던 일을 두고 야권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한 총리 후보자는 "지금도 그 행사에 가는 게 옳았다고 생각한다"며 "과거사로 인해 우리의 경제나 미래가 발목을 잡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해 더 큰 질타를 받았다. 이해식 민주당 의원이 "무역협회가 1946년에 생겼는데 회장 중 어느 누구도 일왕 축하연에 참석한 적이 없고 유일하게 후보자만 참석했는데 그게 '옳았다'는 것이냐"고 따져 묻자 한 후보자는 곧장 "제가 '옳았다'는 표현을 쓰진 않았다"고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잡아뗐다.

 

(도쿄 UPI=연합뉴스) 2일 오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고쿄(皇居)의 규덴(宮殿)에서 열린 신년맞이 행사에서 나루히토 일왕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쿄 UPI=연합뉴스) 2일 오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고쿄(皇居)의 규덴(宮殿)에서 열린 신년맞이 행사에서 나루히토 일왕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같은 전력을 가진 국무총리와 문화부 장관을 둔 윤석열 정부에서 이번에 또 일왕 생일 축하연에 외교부 차관을 보내 기미가요까지 연주된 행사장에서 축사를 하도록 하자 야권은 "치욕적 장면"이라며 강도 높게 성토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0일 국회 본청 당대표회의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일왕 생일 기념식이 열렸는데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기미가요가 사상 처음으로 연주됐다고 한다"며 "윤석열 정권의 대일 저자세·굴종 외교를 상징하는 치욕적인 장면"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지금이 1945년 해방되기 전 일제시대인 것 같다"면서 "대한민국의 굴욕과 굴종을 전제로 하는 양국 관계 정상화에 동의할 수 없다.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는 가해자인 일본의 진솔한 사죄와 반성, 그리고 책임의 인정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윤석열 정부는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강제동원·수출규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주권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체통을 지키도록 요구한다"며 "주권자인 국민을 우롱하는 행태라는 점을 직시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의당 위선희 대변인은 17일 국회 소통관 브리핑에서 "반성 없는 역사,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전범국가의 뻔뻔함에 장단을 맞추는 한국 정부에 말을 잃었다"며 "강제동원 배상에 관련해 진척된 것이 없고 위안부 피해자분들께도 사과하지 않았는데 양국 관계가 언제 '한걸음' 걸어갔단 말이냐"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한걸음은 역사에 대한 반성과 진실한 사과라는 기반 위에서만 걸을 수 있다. 현 정부의 한일 관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반국민, 반역사적"이라며 "정부는 속도전을 그만두고 근원적인 문제 해결부터 나서라"고 촉구했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19일 페이스북에서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서 '기미가요'가 흘러 나올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이번 일을 주최한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 진정으로 한일 관계 개선을 원했다면 기미가요를 연주하지 말았어야 했다. 주재국 국민들의 정서를 무시한 처사는 명백한 '외교적 결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기미가요는 일본 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본 교육위원회는 일부 교사가 기미가요 기립 제창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정직시키거나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는 징계 처분을 내려 큰 비판을 받았다"고 소개하며 "내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한국 국민들은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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