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자의 투표 권리와 의무, 그리고 '능력'에 대해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명재 에디터
이명재 에디터

선거전은 무엇보다 말과 말의 경쟁이며 싸움이다. 그래서 실언과 망언으로 인한 설화(舌禍)가 선거의 향방을 적잖게 좌우한다. 언론들에 의해 실언으로 비판받는 말들 중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투표 말고 쉬어라”는 발언이 있다. 여당인 국힘당의 현수막에까지 인용돼 공격받는 이 말은 지난 14일 이 대표가 세종특별시를 방문했을 때 나왔다. "지금까지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가 정치 잘하고 나라 살림 잘했다고 보면 가서 열심히 2번을 찍든지, 아니면 집에서 쉬시라"라고 그는 얘기했다. 이 말은 자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기권을 하라는 말로 해석됐고, 지난 2004년 총선 때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과 같은 ‘망언’으로 규정돼 많은 비판을 받았다.

선거전에서 극단적으로 해석 악용되는 말들

정치의 언어는 선거전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해석되고 악용된다. 앞뒤가 잘리고 비틀어지며 단편적으로 인용되며 증폭된다. 그 같은 선거전에서의 말의 위험을 생각할 때 이 말은 일단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앞서 '2찍 발언' 논란과 겹쳐 더욱 키워진 이 발언은 어떤 의도였든 간에 거두절미돼 그 전제는 사라지고 한마디만 토막으로 남는 것의 한 예를 보여준다. 상대 당이나 언론은 이에 대해 맹공을 퍼붓고 두고두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빌미를 줬다. 특히 그의 말이 보수언론을 비롯한 언론으로부터 집중표적이 되고 포화를 맞는 상황이라는 면에 대한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표의 말은 깊이 생각해 볼 근본적인 점들을 제기한다. 그의 말은 민주주의제에서의 선거의 의의와 함께 그 취약성에 대해, 정치인의 말에 대해 제기하는, 투표권을 갖는 주권자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 대표가 만약 “투표 말고 쉬어라”가 아닌 "투표하려면, 어떻게 하라"고 했다면 실언이라는 비판을 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즉 배제와 부정이 아닌 권유와 참여로 이끄는 말이었다면 비판과 공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선거는 축제를 벌이는 것이므로 그 잔치에 초대하는 언어가 필요했다. 그 잔치에 함께 어울리게끔 매력과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인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의 말을 전체로서 보자면 그가 얘기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도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듯하거니와 그가 유세장에서 얘기하는 많은 말들은 사실 그 같은 투표자의 ‘의무’에 대한 요구였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권자로서의 투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능력’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인천 미추홀구 한 유치원에서 인천시선관위 주최로 열린 '4월 10일 엄마 아빠 투표해요' 어린이 모의사전 투표체험에서 한 어린이가 투표함을 들여다보고 있다. 2024.3.12 연합뉴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인천 미추홀구 한 유치원에서 인천시선관위 주최로 열린 '4월 10일 엄마 아빠 투표해요' 어린이 모의사전 투표체험에서 한 어린이가 투표함을 들여다보고 있다. 2024.3.12 연합뉴스

투표는 흔히 권리이자 의무라고 얘기된다. 헌법이 권리로서 투표권을 부여한다면 그 헌법이 지향하는 한 사회의 발전은 투표를 의무로서 부과하고 있다. '권리이자 의무'. 많은 기본권에 적용되는, 매우 자명해 보이는 이 말은 그러나-또 그렇기에- 그만큼 '낭비'되고 남용되고 있다.

흔히 의무적인 면의 한 근거로서 드는 것이 투표 비용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가장 최근의 큰 선거인 2022년 지방선거를 치르는 데는 8028억 원이 소요됐다. 그러나 이는 최소한으로 계상된 비용일 뿐이며 간접 무형의 비용을 포함한다면 적어도 그 몇 배의 돈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금전적 비용에 값하는 의무로서의 투표권 행사만을 얘기한다면 이는 의무에 대한 절반의 얘기에 그친다.

어떤 의무이건 그 의무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그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참정권으로서의 투표의 권리이자 의무도 역시 투표할 수 있는 능력을 요한다. 자격만으로는 안 되는 투표의 능력이다.

맹목의 투표는 주권 행사가 아닌 포기

주권자의 지위는 자격으로서 주어지는 게 아니고 능력으로서 획득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적잖은 수고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국힘의 대변인은 “국민에게 '투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선거의 의미 훼손이자,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데 앞장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나 만약 기권이 학습과 수고를 기울였는가에 대한 자문을 거쳐 내려진 결과라면 그 기권은 투표 이상의 참정이다. 그것은 무관심으로서의 포기가 아니며 공동체의 현실에 개입할 자격과 능력을 스스로에게 묻고 그 행사의 자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다. 그러므로 그것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투표보다 더욱 적극적인 의사표시일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의 투표가 무엇에 대한, 무엇을 위한 투표인가에 대해 기울여야 할 최소한의 수고 없이 행사하는 맹목의 투표는 주권의 행사가 아닌 오히려 내팽개치는 것이며 포기다. 투표 참여로써 투표의 권리를 값싸게 처분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투표권 확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성인에게 1표의 권리가 주어지는 보통선거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20세기 중반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에는 재산을 가진 이들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인 미국의 독립선언은 만인의 평등을 얘기했지만 참정권에서는 일부 백인 남성, 그것도 재산을 가진 이들로만 국한했다. 이들의 논리의 전제는 분명했다. 재산을 가진 이들이라야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정부와 사회를 보존하려는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21세기인 지금에는 재산의 유무를 기준으로 한 투표권의 제한이 얼마나 잘못됐는지에 대해선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다만 그 같은 관념의 바탕에 놓인 인식을 지금에 맞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 ‘지켜야 할 무엇’이 있는 이들이 그가 속한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관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지키려는 것’을 재산이라는 단순 기준으로 획일화하지만 않는다면 한 사회는 지키려는 것이 많아질수록, 지키려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지속성을 높이며 더욱 튼튼해진다. 노동계급과 여성 등의 투쟁의 성과였던 투표권의 확장은 곧 인간의 확장이며 사회의 확장이었다. 그것은 사회를 지켜야 할 이유, 투표 참여로써 그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이유를 재산뿐만 아닌 더욱 다양한 배경과 동기에서 제공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지켜야 할 각자의 이유와 동기를 찾는 것, 그것이 다양해질수록, 저마다 타당한 근거를 가질수록 그것이야말로 주권자의 투표권의 의미와 효력을 더욱 분명하게 해 준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유형의 재물만이 아니라 유형의 가치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을 봐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의무가 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능력이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둘레를 넘어선 공동체의 이익과 장래를 함께 봐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에 갇히지 않는 눈과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 능력이 ‘민주’이자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에 맞는 주권자의 자격과 능력 갖추기이다.

선거는 구성원 각자가 이 사회에 대해 갖는 저마다의 의무와 참여의 이유와 동기를 서로 나누는 장이다. 각자가 '동굴'에서 나와 '광장'에서 만나는 것이다. 각자의 동기와 수준에서 투표할 이유를 서로 간에 얘기하고 연결하는 마당이다. 선거는 각각의 개인들을 다른 공동체 동료들과 접속하며,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 주는 계기다. 그렇지 않다면 선거는 민주주의와 사회의 성숙과 발전의 촉진이 아닌 후퇴를 불러올 뿐이다.  

민주주의의 큰 역설 중의 하나는 그 훼손과 후퇴가 흔히 민주주의 그 자신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민주주의적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우리 사회는 지난 2년간 겪고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쉽게 지쳐버리는 제도다. 그 같은 민주주의의 자멸과 후퇴는 정치의 무능과 실패에 의해서이기도 하며, 국민들의 무관심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주권자의 학습과 수고를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참여에 의해서도 초래된다.

정치인이 해야 할 말, 유권자가 들어야 할 말

선거에 의해서 뽑히는 국회의원들을 ‘머슴’이라는 자칭 타칭으로 흔히 부른다. 그러나 국민에 대한 낮은 자세의 헌신과 봉사를 주문하는 이 말이 단지 무조건 국민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이라는 의미로만 쓰인다면 그것은 정치에 대한 비하이며, 정치인을 비루한 일로 만들어 버린다. 정치인은 시민들을 때로는 반걸음 뒤에서, 그러나 때로는 반걸음 앞에서 이끄는 일인 것이다.

선거전에서 많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듣기 좋은 말을 하며 뭐든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런 감언의 말들은 먼저 진정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자아내는 것이지만 그보다 정치인과 시민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 더욱 큰 문제가 있다. 정치와 시민 간의 관계는 상호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거는 국민이 요구하고 정치가 받아주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지금 어느 정당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듯 뭐든지 공짜와 헐값으로 내준다는 식의 세일 좌판이 아니다. 그런 말들은 결국 자신들이 국민들에게 내준 것 이상으로 돌려받으려 하는 결과를 낳게 돼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 같지만 실은 국민들이 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가 유세장에서 자주 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는 이 말에 이어 국회의원 후보자들은 ‘국민들의 도구이며 방편’이라는 얘기를 덧붙이는데 국민들로부터 환심을 사고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주권자들에게 정치인들을 도구와 수단으로 쓸 권리와 함께 그럴 수 있는 '주인의 능력'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주문과 요청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에 그의 "집에서 쉬어라"는 말의 이면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해석할 때 그의 이 말은 실언이 아닌 말로, 오히려 우리의 정치를 좀 더 정치답게, 선거를 더욱 선거답게, 주권자를 더욱 주권자답게 하자는 제안으로 받아들여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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