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의 한글철학' 연재를 시작하며
두루 꿴 동서양 종교와 사상 바탕으로
꿰뚫어 풀어낸 우리 말글의 철학
한글이 소리글자 아닌 뜻글자라는,
하늘땅과 육서의 원리가 배어있다는 사실
“나는 참나라는 ‘하나’의 증인이다.”
“‘없’을 내가 말하는데, 수십 년 전부터 내가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머리가 맘대로 트이지 않았다. 나는 없에 가자는 것이다. 없는 데까지 가야 크다. 태극에서 무극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 류영모
다석 류영모
참 깬 이가 있었다. 참을 깨고 참에 들어 참이 된 이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참의 벼락으로 그림자 없고 연기(緣起) 없는 참의 불꽃을 터트렸다. 나날이, 오늘에 오늘로 이제 ‘여기살이’하면서 바뀌고 뒤바뀌면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변화무쌍의 ‘늘길’(常道)에 위없는 맨 꼭대기를 열고 밑없는 맨 꽁무니를 텄다. 위없는 맨이요, 밑없는 맨이니 아주 시원하게 텅(虛) 비어 빈(空) 그 빈탕이 나고 나고 없이 나는 ‘나없’(無我/非我)의 참나(眞我)이리라.
참(眞)은 빈탕의 텅 빈 ‘없’(無)이 가득 그득이다. 그 ‘없’에 산김․산숨(生氣)이 반짝거린다. 반짝이는 산알의 빛이 연기(緣起)다. 이것저것 그것의 ‘것’은 없다. 이에 반짝이는 저요, 저에 반짝이는 그일 뿐이다. ‘이저’(此彼)는 그저 하나(홀)로 반짝일 뿐이다. 그러니 홀에 ‘서로’의 씨알이 하나로 휘감아 반짝이며 홀로 돌 뿐이라고 해야 하리라.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는 그렇게 홀로 반짝이는 삶을 살았다. 그 삶을 이어 말씀의 ‘말숨’ 쉬면서 한글로 철학하기를 수행했다. 그이는 그 수행을 ‘알맞이’라고 했다. 제 몸의 알(知)을 캐어 제 맘에 맞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맘이 몸에 한 꼴로 ‘뫔’이니, 몸맘이 따로 놀지 않았다.
하늘의 맨꼭대기와 땅의 맨꼭문이를 앎.
땅의 맨꼭문이와 하늘의 맨꼭대기를 봄.
비롯도, 이로 비롯오 마치기도 이에 맟.
- 『다석일지(1권)』(홍익재, 1990), 1959. 5. 28.
다석은 1890년 3월 13일에 나서 90년 10월 21일을 살고 1981년 2월 3일에 돌아갔다. 그는 2008년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아시아 최초로 열린 제22회 세계철학대회(7.30.~8.5.)에 그의 제자 함석헌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소개되었다. ‘철학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철학대회는 1900년 파리 창립대회 이래로 세계 150여 개국 3천 명 이상의 철학자들이 5년마다 모여서 다양한 철학적 주제를 탐구하고 관점을 교환하는 인문학 향연이다. 서울대회의 주제는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이었다.
당시 한국조직위원회 의장 이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우리의 전통사상은 농경시대까지만 유효하고, 산업문명 시대부터는 ‘수입’한 서양철학에 의존해 왔습니다. 농경시대를 지나고부터 우리의 고유 철학은 ‘빈칸’인 셈이죠.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을 앞두고 이제까지의 서양철학을 서양이 아닌 동양에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새 시대에 인류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문명을 꾸려갈 것인지를 전망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한국인, 나아가 동양인이 외래 사상을 수용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위한 사유(思惟)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새 역사의 주인공으로 발돋움하는 거죠.”(『신동아』, 2007년 9월호)라고 말했는데, 우리 철학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찾은 이가 다석 류영모와 씨알 함석헌이다.
다석은 사는 동안 오산학교 교사(1910~12)와 교장(1921)을 지냈고, 도쿄 물리학교에서 1년을 수학했으며, 3․1운동 자금을 몰래 보관한 것이 적발되어 그를 대신하여 아버지 류영근이 서대문형무소에 105일간 수감 되었다. 1942년에는『성서조선』필화사건에 연루되어 57일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삶보다 그를 세계철학대회에 ‘철학자’로 소개하게 한 까닭은 그가 1928년부터 1963년까지 35년 동안 YMCA의 연경반(硏經班)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1955년부터 1974년까지 20년 간 『다석일지』를 쓰면서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어 밝히는 한시와 한글 시조를 3천수 가까이 남겼다는 점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밝혀 놓아서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 말글로 꿰뚫었다니, 과연 어떻게 꿰뚫었을까?
아뜨만(ātman)/아나뜨만(anātman)은 없이 계신다. 다석은 노자 늙은이(老子)의 글에 빗대어 “있단 없고, 없단 있어, 번갈며.”(2장)로 말을 힘껏 돌렸다. 여기에 ‘서로’는 없다. 그저 ‘있없’(有無) 한 꼴이 홀로 번갈아 갈 뿐이다. 또 “돌아가는 이 길 가 움직이오./ 므른 이 길 가 쓰오./ 셰상의/ 몬이 있에 남./ 있이 없에 남.”(40장)으로 움직여 돌렸다. ‘돌아가는’의 ‘가’는 하늘아(․)를 써야 한다. 그래야 쉬지 않는다. ‘몬’은 먼지․티끌의 우리말이다. 돌아가는 길이 가면서 움직일 뿐이다. 곧 ‘참나’는 텅 비어 없이 돌아가는 산김․산숨(生氣)의 반짝임이다. 늘 반짝이며 숨돌리는 ‘참나’야말로 변하지 않는 ‘참올’(眞理)이다. 홀에 ‘서로’의 씨알이 하나로 휘감아 반짝이며 홀로 돌아가는 숨줄(生命)이 ‘올’이다. ‘올바름’의 그 올!
이에 반짝이는 저, 저에 반짝이는 그
이 저 그가 하나로 얽혀 반짝반짝 올바로
올에 텅 빈 참나, 없이 솟아 돌 돌 돌
한글 철학자
『다석강의』(현암사, 2006) 책날개와 책등에는 다석을 소개하는 이런 글귀가 있다. “천문․지리․서양철학․동양철학․불경․성경 등에 능통한 대석학이요 현자(賢者)요 한글 철학자”(책날개), “선생은 우리말의 발음과 어원에서 본래의 뜻과 비의(秘義)들을 밝히고 살려 내어 고전 해석에 활용하였고, 잊어버린 우리말들을 되살려 쓰도록 가르치셨다.”(책등)
지금까지 다석은 기독교 신학에서 주로 연구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기독교 사상가로 보는 관점이 크게 느껴진다. 말로는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어서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고 하면서도 결론은 언제나 ‘기독교’로 몰아간다. 기독교는 ‘다석철학’의 종착역이 아니다. 그가 예수를 큰 스승으로 모신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를 신으로 믿은 것은 아니다. 그는 부처도 노자도 단군도 스승으로 모셨고, 심지어는 그와 더불어 훈민정음을 깨우친 학산 이정호도 스승 삼았다. 더불어 배우고 깨쳐서 알맞이로 이바지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가 스승이요, 길벗(道伴)이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世宗, 1397~1450), 복음서를 다시 쓴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진리파지(眞理把持)의 길을 간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 기일원(氣一元)의 철학을 구축한 장재(張載, 1020~1077), 기일원론을 완성한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丹齎 申采浩, 1880~1936), 비․씨․몬(虛․種․物)으로 우리말 철학의 시원을 밝힌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1878~1951),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 1864~1930), 『역해종경사부합편(譯解倧經四部合編 全)』을 펴낸 단애 윤세복(檀崖 尹世復, 1881~1960)을 좋아하고 존경했으며, 희랍철학․인도철학․중국철학․한국철학(특히 삼일철학)은 물론이요, 수학․천체물리학․중세국어학에 두루 밝았다. 세종의 『훈민정음』,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불경』, 힌두교의 『바가바드 기타』, 『중용』, 『도덕경』을 자주 읽었다. 그 중 『반야심경』, 『도덕경』, 『중용』은 순우리말로 풀어 놓았다. 또한 그는 우리 중세국어의 문법 체계를 독파하여 훈민정음이 소리글자만이 아니라, ‘뜻글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다석은 우리 말글에 하늘땅(天地)의 뜻이 깃들어 있는 것을 살펴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시조의 운율을 따르되, 문장부호를 써서 뜻을 크게 함축시켰다. 말의 재미를 글로 놀릴 때는 이어적기와 끊어적기를 써서 이 뜻 저 뜻이 하나로 숨어들도록 하였다. 하나는 벼릿줄이요, 하나를 풀면 반드시 여럿의 그물코였다. 한자를 만드는 여섯 가지 원리를 육서(六書)라 하는데(상형, 지사, 회의, 형성 네 가지는 글자를 만드는 방법이고, 전주, 가차는 글자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그는 한글에도 그런 원리가 있다고 보았다. 육서의 원리로 한글의 닿소리와 홀소리를 살폈다. 그리고 그렇게 살핀 뜻으로 글을 짓고 글꼴을 만들었다.
연재를 시작하는 까닭
다석은 1981년 2월 3일에 숨돌렸다. 가고 가고 오고 오는 가오는 가온(中) 자리, 가고 옴이 없는 자리, 그저 돌 돌 돌 숨돌리는 자리, ‘있없’ 한 꼴의 그 자리로 돌아간 지가 44년이 되었다. 그 뒤로 많은 책들이 쏟아졌으나 『다석일지』의 한글 시들은 제대로 옳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어적기, 끊어적기, 문장부호, 훈민정음, 중세국어를 모두 활용했고, 게다가 우리말로 말놀이하면서 뜻글로 심어놓은 글꼴은 도무지 풀어지지 않았다. 육서의 원리까지 한글에 적용해서 한글철학을 수행했으니 누가 그 뜻을 다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글쓴이는 1995년 이후로 그의 한글철학 원리를 따져 물었다. 올해는 그의 철학을 홀로 배워 온 지 30년이 되었다. 다석과 더불어 『훈민정음해례본』을 풀어낸 학산 이정호의 책과 민세 안재홍의 논문, 그리고 1949년에 출간된 『삼일철학-역해종경사부합편』(대종교총본사, 개천4406)을 비롯해 그가 쓴 여러 글과 어록을 깊이 살펴서 한글철학의 원리를 알아차렸다. 알음 앓이가 깊었으니 알맞이의 기쁨은 더할 나위 없었다. 알(知)을 맞이하는 기쁨이겠으나, 한글에 심어놓은 ‘뜻알’이 툭 터지는 순간의 깨달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나는 ‘뜻알’ 깨 캐내는 나날을 ‘늘’로 이어서 살았다.
‘늘’(常)은 바뀌고 뒤바뀌고 끊임없이 달라져 가는 ‘됨짓’(變化)이다. 이 ‘됨짓’이야말로 결코 바뀌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 ‘못됨’(不變)이다. ‘늘’의 ‘됨짓’은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나날의 생생화화(生生化化)다. ‘늘’은 나날의 씨인 ‘빛숨’을 받아 저 스스로 그러니까 저절로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숨빛’의 마음을 짓고 일으킨다. 온 우주에 있는 온갖 몬들을 짓고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산뜻’(生意)이다. 빛숨에 숨빛을 환히 밝히며 온갖 몬들을 짓고 일으키는 산뜻이 ‘늘’이고, 이제 여기로 가오는 ‘늘’의 한 가운데의 가온(中)에 없이 계시는 참맘(眞心)이 돌고 돈다. 없이 나고, 없이 솟고, 없이 계시는 한아(大我), 다석이 말하는 ‘참나’다.
다석의 ‘오늘살이’는 몸맘얼을 닦아가는 삶이었다. 그는 저녁 한 끼를 먹는 일식(一食), 무릎을 꿇고 앉는 일좌(一座), 가난한 이들에게 어진 나눔을 실천하는 일인(一仁), 말씀을 터 말숨을 나누는 일언(一言), 줄곧 뚫려 솟구치는 일오(一吾)의 삶을 살았다. 위에 정리한 얼개는 그런 몸맘얼 닦기가 삶에 얼마나 촘촘히 녹아들었는지를 보여준다. 몸맘얼 닦기로 깨친 생각들은 고스란히 한글 시에 담겨 있다.
그러므로 뜻글의 한글은 우리 철학의 ‘빈칸’을 채우는 심오한 열쇠다. 다석의 한글철학은 21세기 새로운 차축시대(Achsenzeit)의 길을 여는 가능성이다.
새로운 길
길은 하루하루 자신을 스스로 가르쳐 익히고 깨닫는 닦아감(修行)이요, 저절로 익고 영글어 뚝 떨어질 때 드러나는 환한 열매의 씨알로 여물어 가는 돎이다. 여물고 여물어 다 익고 영근 열매는 알짬(精)으로 시원하게 비워진다. ‘오늘살이’로 닦고 닦아야 하는 것은 ‘닦아남’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닦아났어도 나날이 밑을 터 열어야 새로워진다. 매이지 않아야 스스로 저절로 하루하루 높속알(上德)이 되고, 스스로 저절로 높오르는 ‘높’이 된다. 스스로 저절로 아래가 터 되는 일이다. 길은 가고 갈수록 날로 덜어진다. 저절로 아래가 터 되는 ‘깊힘’(深淵力)이 크고 커서 텅 비워지기 때문이다. ‘깊힘’이 커야 세상을 짚고 일어설 수 있다.
‘참나’는 처음부터 든 적이 없어 나지 않는다!
하늘땅(ㄱㄴ)이 돌아가는(ㅁ) ‘마음’은 가(行)로 돌고 나(吾)로 돌아가는 ‘마’의 ‘옴’(眞言) 욈이다. 옴마니반메훔! 욈 하나로 늘 돌이켜 거꾸로 스스로를 비춰야 한다(回光返照). 나 잘난 없는 낮춤(謙遜)이요, 더 잘난 없는 모심(侍)이 방(房)에 스스로 있을 뿐이다. 외짝 문(戶)은 안에서 열린다. 날로 더하면 그 문이 뚜렷하고, 날로 덜하면 그 문이 없어진다. 문이 뚜렷하면 벽에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고, 문이 없어지면 벽도 없어서 세상이 다 훤하다. 종종 외짝 문이 크게 뚜렷하거든 화들짝 깨야 한다. 세상 온갖 것을 싸잡아 배워서 날로 더하니 좀 안다고 깝죽거리며 지게문(戶)을 대문(大門)으로 보는 꼴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다석 류영모의 한글철학을 맛보자!
-용어해설-
늘길 : 다석은 노자 1장의 상도(常道)를 우리말 ‘늘길’로 풀었다. 가도(可道)는 ‘옳단 길’로 풀었는데, 길(道)이란 옳고 그름의 가름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바뀌고 달라지는 ‘늘길’에 있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말이 ‘늘’이다. ‘늘’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다.
맨 : 사전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나 경지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다석은 태초(太初)를 ‘맨첨’이라 했다. 처음보다 앞서 있는 무극(無極)에 ‘맨’의 뜻이 있다.
없이 있는, 없이 계시는 : 다석철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신은 없이 계신다. 신성으로 언급되는 모든 말들에 적용된다. 참나, 얼나, 한아, 하늘, 하나, 한울, 한얼…….
산알 : 봉한학설에서 글쓴이가 가져온 것이다.
김 : 다석은 기(氣)를 ‘김’이라 했다. ‘숨’, ‘힘’으로도 풀어썼다.
알맞이 : 다석은 철학(哲學)을 ‘알맞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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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