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㉑] 참에, 하! 늘 ‘나라’ 다!

2025-10-20     김종길 다석연구자

신통변화는 참 신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큰 늘, ‘한늘’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무한한 공간에 영원한 시간입니다. 우리 머리 ‘위’에 있으니까, ‘한웋’입니다. 시간은 ‘늘’이므로 ‘한늘’입니다. 하늘이라는 말이 이 뜻을 포함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참 신입니다. 한량없는 ‘한’입니다. 한량없는 시간이 ‘늘’입니다. 항(恒)입니다. 늘이 ‘늘’입니다. 
- 『다석강의』에서

한 둥긂에 돌아가는 숨(弓弓乙乙)!

하늘이 땅을 억눌러 번갈던 때는 끝났다. 그런데 왜 새로운 때는 오지 않는가? ‘높임’은 누르고 ‘낮춤’은 들어야 새 길이다. 그 길을 가야 때가 온다. 스스로 ‘낮춤’이 된 자리에 저절로 ‘터’ 되어 열리리라.

새 하늘 길(天道)은 활 벌림(張弓)에 있다. 노자 늙은이는 77월(章)에 그리 밝혔다. 하늘 길은 그 활(弓)이요, 그 활에 궁궁(弓弓)이다. 길 나니 하나요, 하나 나니 둘이다. 길이 나야 하나다. 하나 없이는 둘이 설 수 없다. 시위 거는 길에 하나다. 그 하나에 한 둥긂이 일어선다. 그믐에 뜬 달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이다.

연담 이운규(蓮潭 李雲圭). ?~?)로부터 영동천심월을 말머리 화두를 받은 일부 김항(一夫 金恒. 1826~1898)은 말머리를 크게 깨치고 정역(正易)을 지었다. 주역(周易)이 사람의 변역지리(變易之理)라면, 정역은 하늘의 변역지리다. 앞하늘(先天)이 뒷하늘(後天)으로 돌아가는 새 우주의 소용돌이 ‘숨’을 바로 세웠다. ‘흰’에 그늘이 서고, ‘그늘’에 ‘흰’이 서듯이.

이제 땅하늘에 ‘흰그늘’이다. ‘흰그늘’에 산알 숨이 솟는다!

둘 나니 셋이요, 셋 나니 잘몬(萬物)이다. 셋은 씨알이니 온갖 것들을 세우는 ‘세웃’이다. 그 ‘세웃’이 곧 잘몬(萬物)이다. 그 잘몬의 ‘그늘’을 지고 ‘흰’을 품에 안아야 한다. 놓아둔 활을 쓸 때는 뒤를 앞으로 당겨서 품에 안는다. 그래야 궁궁(弓弓)이 ‘맞둘’로 한 둥긂(一圓)이 된다. 텅 비어 뚫린 둥긂이다. 비어 뚫린 그 둥긂이 ‘온숨(正易)’으로 고르다.

온숨이 한꼴의 ‘올숨’(理氣)이요, 바른 숨이다!

궁궁은 없극(無極)으로 한 둥긂이다. 가없는 둥긂에 돌아가는 숨이 곧 큰극(太極)이니, 좋음이 큰 둥긂에 있다. 바로 그것이 이재궁궁(利在弓弓)이다. 『용담유사(龍潭遺詞)』 권34의 ‘궁을십승가’를 살펴야 하리라. 궁궁(弓弓), 궁을(弓乙), 양궁(兩弓), 을을(乙乙), 을을궁궁(乙乙弓弓)은 같은 말이다. 글자 그대로는 활(弓)과 십간(十干)의 두 번째(乙)를 뜻한다.

한 둥긂에 속알 돌리는 가온찌기가 올발라야 좋은 것이다. 땅구슬 지구(地球) 가온에 ‘불숨’이 돌고 돌아야 좋지 않겠는가. 사방팔방을 품에 안고 시방(十方)으로 돌아가는 ‘불숨’. 온씨알이 ‘불숨’을 틔워야 ‘늘’(常)을 이룬다.

활 벌림은 빈탕(虛空)을 크게 벌리는 일이다!

빈탕은 집집 우주가 짱짱하게 숨 돌려 돌아가는 길이다. 궁궁을 이룬 자리는 ‘때빔’(時空)이 하나로 뛰넘는 자리다. 그 자리가 ‘늘’이다. 하나 가득 밀고 썰되 다함없이 되는 ‘세웃’(三:人)이 솟는다.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匱化三)이다.

 

그림1) 2016년 12월 3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 장면이다. 이후 촛불은 응원봉으로 이어지면서 ‘빛의 혁명’을 이끌었다. 이 빛의 혁명이 궁궁을을이리라. 사진출처 : 아주경제(2016.12.4.)

노자 늙은이는 53월(章)에 “큰길(大道)이 너무도(甚) 맨(夷)”이라 했다. 다석 류영모는 ‘이’(夷)를 우리말 ‘맨’으로 풀었다. 왜 ‘맨’일까? ‘맨’은 ‘맨첨’에서 볼 수 있듯이 ‘첨’보다 앞에 있으므로 비어 없는 ‘없’을 뜻한다. 이(夷)는 ‘동이’(東夷)를 뜻한다. 또 이(夷)는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비롯이다. 궁궁을을은 텅 비어 돌아가는 자리가 아닌가. 그래서 ‘맨’이라 한 것이다.

궁궁을을은 ‘무름’(弱)이다. 부드럽고 무른 것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
물은 부들무릇하다.
예술은 부들무릇해야 한다.
그래야 쉼 없이 흐른다.

운삼사성환오칠일묘연(運三四成環五七一妙衍). 크게 돌아가는 그 길을 옮기어 보니 셋이요, 셋에 네모를 둘러치고 그 위로 고리를 이루니 원방각(○□△)으로 다사리 이룬 오롯한 하나라는 말이다. 그 하나는 ‘ᄒᆞ실’로 늘 고이 노닐 뿐이다. ‘다사리’ 이룬 오롯한 하나로 고이 노니는 세상이 ‘다시 개벽’이다.

하늘․땅․사람이 하나로 솟나 뚫려야 길을 가진다!
씨알들이 솟나 뚫어 솟구쳐야 한다!
길 가진 나라를 여기로 당겨 지금 세워야 한다!

얼 홀림에 새하늘이 열린다!

‘미’(美)와 ‘술’(術)은 오랫동안 따로 있던 말이다. 19세기에 그 말이 붙어서 ‘미술’(美術)이 되었다. 그 뜻은 ‘술수 부리는 샤먼’이다. 없는 데에 ‘있’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서양의 ‘아트’(art) 짓거리가 꼭 닮았다. 그런데 속뜻도 그럴까?

예술(藝術)은 또 어떤가? 본디 예술은 기예(技藝)와 학술(學術)에서 ‘예’와 ‘술’을 따 붙여서 만든 말이다. 그 말들이 품은 뜻도 다양해서 ‘아트’(art)로만 읽혀서는 오래된 뜻의 깊이를 잡아 쥐기 힘들다. 예술의 몸은 예(藝)가 본디 뜻하는 ‘심다, 기예, 궁극’의 생태성[심다], 창조성[기예], 철학성[궁극]의 술수(術數)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미학 말머리로 가득하다.

 

그림2) 시베리아 옛 퉁구스 샤먼은 사슴뿔 관을 쓰고 북을 치며 굿을 펼쳤다. 그림은 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니콜라스 비천이 출간한 『북동 타타르지(Noord En Oost Tartarye)』(Witsen, 1692;1705)에 실린 것이다. 그림 밑에는 “퉁구스 땅의 샤먼 또는 악마 사제”라고 적혀 있다.

예술이란 ‘예’의 생태성 ․ 창조성 ․ 철학성이 ‘술수’로 드러나는 실체로서의 ‘환’(幻)이라고 할 수 있다. 술수(術數)와 환의 사슴뿔은 도교의 방술[方術:방사(方士)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옛 중국에서는 선인(仙人), 방사(方士), 술사(術士)를 모두 ‘참사람(眞人)’이라 했다.

20세기 서구 모더니즘의 유입으로 동아시아의 예술은 작품에서 ‘품(品)’과 예술에서 ‘예(藝)’만 강조하였다. 짓고 일으키는 ‘작(作)’과 꾀를 내는 ‘술(術)’은 괴이하게 생각하거나 그저 홀리는 따위로 몰아버리는, 그러니까 유물론으로서 ‘물건(品)’이라는 ‘예’의 물성에 사로잡힌 꼴이 되었다. 초현실과 비현실의 샤먼 미학은 완전히 저급하고 저속한 것 따위의 ‘굿짓’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얼 홀림의 ‘술(術)’ 없이 어떻게 예술의 판타지가 가능하고 영(靈)의 교감이 가능할까? 술수는 21세기에 다시 호명해야 하는 창조술(創造術)의 다른 이름이요, 공자가 그토록 싫어했으나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들머리에 강조한 ‘괴력난신’[怪力亂神: 괴이(怪異)와 용력(勇力)과 패란(悖亂)과 귀신에 관한 일이라는 뜻으로,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이르는 말]의 바른 이름이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서구의 아트(art)를 내려놓고 동아시아의 술수를 소환해야 한다! ‘때빔’(時空)의 서슬에 올라타야 한다. 서슬 퍼런 칼날이 날벼락으로 쏟아지는 들깨움 없이는 ‘뒷하늘’도 없고 ‘다시 개벽’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롯이 그 길을 가고 오는, 그 가오는 사이사이사이에 새 말머리가 피어올라야 한다.

갈라치기로 쪼개는 온갖 것들을 끊고 넘어서서 새 하늘을 열어야 한다!

속알에 무지개 번개가 만다로 핀다!

부처를 달리 부르는 말에 여래십호(如來十號)가 있다. 그 중에 여래(如來)가 있고, 선서(善逝)가 있다. ‘여래’는 잘 온 이요, 여실히 온 이요, ‘참’(眞如)에서 온 그이다. 본디 있는 그대로의 ‘참나’가 온 것이다. 저절로 ‘있’이요, 스스로 ‘있’을 그저 맨첨의 ‘있’이라 하니, 그가 여기로 다시 ‘옴’(來)을 일러 ‘있다시 온’이라 하는 것이다. 이 땅에 씨알로 깬 우리는 그 ‘있다시 온’을 이미 알짬으로 가졌다.

‘선서’는 잘 간 이요, 피안(彼岸)에 잘 돌아간 이요, 깨닫고 깨달아 그 세계에 잘 이른 그이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로 잘 간 ‘참나’다. ‘예’는 여기요, ‘옛’은 저기다. ‘예’하는 깜빡 사이에 ‘옛’이 된다. ‘옛다시 가온’은 예의 것을 다 잘 여의고 돌아갔다는 뜻이다. 돌아갈 때는 씨알을 다 여의고 가야 한다. 영글어 푹 익어야 여읜다.

예 다다른 ‘있다시 온’으로 깨어 곤두서야 한다!

술수 부림의 예술은 애도를 넘어 선 자리다. 말이 끊어진 자리다. 수다한 말을 끊어야 넘어 설 수 있잖은가! 글도 마침표를 찍어야 새 글월을 쓸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니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끊고 넘어 선 그 자리, ‘있다시 온’에 다다른 ‘옛다시 가온’이다. 이승의 삶을 여의고 돌아간 이들이 다시 오시는 자리다. 오늘을 여의고 어제로 돌아간 이들이 다시 오시는 자리다. 그 자리에 ‘늘삶’이 있다.

가신 이들이 오신다. 오신 자리에 ‘늘삶’이 숨 돌린다. ‘늘길’에 나죽지 않아야 ‘참나’다. 늘 나고 나는 나다. 늘 나고 나는 ‘늘나’는 오래 오래다. 옳단 길과 그른 길은 ‘늘길’이 못된다. 옳고 그르고, 그렇게 갈라친 길이니까. 그러므로 ‘하! 늘나라’여야 한다. 산일름(生命)의 알맹이로 산알 튼 몸에 하늘이 솟는다.

 

그림3) 산스크리트어 만달라(Maṇḍala)는 ‘본질’을 뜻하는 만달(Maṇḍal)과 ‘소유’를 뜻하는 라(la)가 더해져 이뤄진 말로 ‘본질의 것’, ‘본질을 소유한 것’, 또는 ‘본질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뜻. 불교의 본질은 ‘보리’(菩提), 곧 ‘깨달음’이기 때문에 만다라는 부처의 깨달음 경지(境地)를 상징화하여 ‘신성(神聖)한 단(壇)’이라는 형태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 중 밀교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에 두고 여러 부처와 보살을 배치한 그림을 만다라고도 한다.

모심이요, 숨결이니 그 나라는 머물지 않는 지금 여기다!
예술은 숨을 돌려 나죽지 않음을 짓고 일으켜야 한다!

‘길’(道)은 벼락 사슴뿔 머리로 가고 오는 늘이다. 가고 오는 늘은 돌고 도는 궁궁을을이다. 가온 그 한복판에 찍고 지키는 하늘 숨이다. 지금에 여기가 ‘얼빛’ 솟는 자리로 가온찌기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다. 머무는 바 없이 천만경계에 마음을 내야 한다.

새싹이 돋고, 이슬이 맺히고, 꽃잎이 나고, 얼이 깨고, 감아 도는 빛이 터지는 세계는 얼마나 찬란한가! 솟고 솟아서, 오르고 올라서, 곧이 곧장 올바로 선 것들이 다시 맺히고 환하게 열려 휘몰아 내리는, 돌고 돌아가는 이 중묘지문(衆妙之門)의 ‘밝돌’을 보라. 돌돌 돌아가는 길의 ‘다사리’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모두 다 말하게 하고, 모두 다 살리어 내는 ‘다사리’의 한울 뜻을 알음알이로 ‘알맞이’해야 한다. 제 것, 제 잇속만 차리는 그 저로만 살지 않는 ‘늘삶’의 저 이룰 나위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늘땅이 길고 오랠 나위 있는 건 오롯이 스스로 저절로의 있는 그대로 열린 길을 따르기 때문이다.

참(眞)에, 하늘나라다!
참(眞)에, 하! ‘늘나라’ 다!
참(眞)에, 하! ‘늘’ 나라다!
참(眞)에, 하! ‘늘나’ 라다!
참(眞)에, 하! 늘 ‘나라’ 다!

속알이 그림씨로 이루어지는 그때는 그 씨가 무엇이든지 이미 꾸민 씨앗이다. 그림에 온갖 이름이 비롯한다. 그 이름을 놓아야 ‘없’에 든다. ‘없’에 들어야 ‘비롯’이 야물어 보인다. 저 없이 솟은 깨끗한 바탈(本性)을 보는 것이다. 비로소 하늘 길에 소소소 숨이 솟는다. 속알 빈탕에 무지개 번개가 만다라로 핀다.

솟는 것이 아름답다. 땅에서 솟고, 물에서 솟고, 나무에서 솟고, 사람에서 솟고, 하늘에서 솟는 그 모든 것들의 솟구침이 어여쁘다.

내 마음에 네 마음이다!

나 ‘오’(吾)는, 다섯 ‘오’(五)에 입 ‘구’(口)다. 다섯 ‘오’(五)는 위 하늘(一)이 아래 땅(一)에 맞붙어 ‘맞둘’로 섰는데, 얼줄(§:經)이 하나로 용오름 오르내리며 올발라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섯을 ‘다사리’라 한다. 다 살리고 다 말하게 하라는 뜻.

다섯(五)에 입(口)이 하나로 올바른 나(吾)!
하늘땅에 얼줄이 올발라 말숨 트인 나(吾)!
올바른 나로 올발라 말숨 트이면 크게 깨인다(悟)!

이 말뜻은 모두 다 살리고 모두 다 말하게 하는 글월 줄(五)을 우주 샤먼이 검빚(神託)을 받아 검얼(神靈)의 숨말 트듯, 땅하늘을 하나로 여는 것이다. 마음이 땅하늘로 텅 비어 돌아 찼으니, 입에서 그 얼줄(經) 말씀이 말숨으로 스멀스멀 새 나온다.

그러니 오심(吾心), 그러니까 ‘내 마음’(吾心)이란 땅하늘이 숨 돌리며 한 꼴로 돌아가는 빈탕의 텅 빈 우주마음(悟)이다. 그 속에 저졸로 돌아가는 땅하늘 은하가 가득가득이다. 남과 구별할 때 쓰는 ‘나’(我)와 달리 ‘나’(吾)는 있는 그대로 얼숨 돌아가는 오롯한 나를 이를 때 쓴다. 땅하늘 사이에 하나로 우뚝 솟은 나!

 

그림4)육도를 윤회하는 중생과 중음 기간의 중생(六道四生中中有情衆), 수륙 판화의 부분. 육도의 세상이 하나의 마음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출처 :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 “[깨달음의 미학] 22. 육도윤회도(2)”, 현대불교 2023.11.25.

너 ‘여’(汝)는, 물 ‘수’(水)에 계집 ‘여’(女)다. 계집은 ‘집에 계시는 님’이니 높여 부르는 말이다. ‘계’는 땅하늘에서 가장 높은 이다. 낮잡아 쓰는 말이 아니다. 기지배, 지지배, 가시내, 가시나로도 불리기도 하는 어여쁜 우리말이다.

물(水)에 계집(女)이 하나로 올바른 너(汝)!
땅하늘에 가장 높자리로 계시는 너(汝)!

이 말은 허난성(河南省)을 흐르는 강물 여수(汝水)에서 왔으나, 물(江) 건너 사람을 부를 때 ‘너’(汝)로 불렀다. 너나 사이에 강이 있다. ‘너’를 부를 때 그 소리는 반드시 물을 건너야 닿는단 이야기다. 그러므로 ‘네 마음’(汝心)은 내(吾) 그리운 소리가 물을 타고 건너가 흐르는 마음이다.

“내 마음에 네 마음”이라는 말은 우주샤먼이, 혹은 얼 깬 ‘솟난이’가 검빚(神託)을 받아 빈탕의 하늘로 하나가 된 ‘내 마음’이 곧장 물을 타고 건너 가 흐르는 ‘네 마음’이란 이야기다. 나는 너로 흐르는 하나 마음이다!

그런데 왜 곧장 ‘네 마음’이 아닌, 물머리를 타고 건너 스며야 하는 마음일까? 나는 왜 너로 흘러야만 할까?

2021년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는 11개 나라 35개 연구기관이 참여해 “트랜스유라시아어 기원(우리가 흔히 ‘알타이어’라 부르는 말뿌리)”을 연구한 논문을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연구진은 역사 언어학과 고고학, 고유전학 3개 분야 데이터를 토대로 교차 검증하고 분석한 결과, 트랜스유라시아어족 말뿌리는 초기 신석기 시대인 약 9천년 전 랴오허강(遼河) 일대에서 기장 농사를 짓던 농부의 언어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기장은 벼농사 이전부터 재배한 잡곡이다. 그러니 우리말 뿌리는 유목민이 아닌 랴오허강 농부의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림5) 2021년 독일 막스플랑크 인류사연구소는 11개 나라 35개 연구기관이 참여해 “트랜스유라시아어 기원”을 연구한 논문을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했다. 이 논문은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등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는 트랜스유라시아어의 발원지가 랴오허강 유역이라고 밝혔다. 그곳은 옛조선(古朝鮮)의 땅이다. 출처: 네이처

아주 오래 오래 앞, 새 돌그릇 쓴 때(新石器時代)로부터 갈라진 말들이 여러 갈래로 흩어지면서도 하나로 함께 이어진 말가지들이 있었다. 이 말가지로 첫 말뿌리를 찾았다.

여름질(農事) : 밭. 씨뿌리다. 심다. 키우다. 경작하다. 땅을 파다.
씨앗 : 기장 씨. 피
먹거리 담기 : 발효. 갈다. 부수다. 으깨다.
옷 짓기 : 바느질하다. 옷을 짜다. 직조기로 짜다. 돌리다. 옷감을 자르다.
집짐승 : 돼지. 개.

우리 겨레 말뿌리는 랴오허강 언저리(流域)에 살았던 농부들의 말에 있었다. 이 말뿌리에서 이어진 말가지가 노자 늙은이 ‘참알줄’(道德經)의 자잘한 그물코를 이룬다. 글월을 깊게 파고들다가 가끔씩 깜짝 놀라는 생각불꽃 하나는 그가 여름질하는 어미아비의 아들딸로 자랐고, 동이족(東夷族) 신화를 배워 깨쳤으며,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의 글줄(經)을 줄줄 꿰고 있단 사실이다.

그이는 2,600년 앞에 쓰던 말글로 글월을 짓고 뜻을 심었으니 옛조선(古朝鮮)이 떠오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글씨 하나하나에 심은 뜻을 살펴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열어 갈 ‘다시 개벽’의 씨가 여기 있다.

참에, 하! ‘늘나’ 라다!

나라 국(國)은 지나치기 쉬운 글씨다. 이 글씨꼴은 하늘(ㄱ)과 땅(ㄴ)이 에둘러(□) 지키는 여름질 삶을 보여준다. 에워 쌀 위(□)는 갑골문에 동그라미(○)로도 나타난다. 논밭에서 여름질하며 살아가는 온씨알(百姓)의 삶을 에둘러(城) 지키는 것이 나라 아닌가. 사람도 지키고 하늘땅도 그 삶을 지켜준다. 이때 나라(國)는 작은 나라다. 큰 나라는 지나(支那)의 ‘나’(那)로 썼다.

나라(國)는 작아야 한다. 작게 이루되 한늘을 크게 품는 것이다. 몸에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은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하늘을 섬기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야 저절로 큰이(大我)가 되고 큰다스림(大國)를 두지 않겠는가. 어머니 엄마는 그런 나라를 두어 길고 오래 보고자 했다. 그러니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언제나 작은 물고기(鮮) 끓이듯 해야 한다.

옛조선의 서울(都邑)은 아사달(아씨땋)이다. ‘아사’는 처음이요, 아침이요, 작음이다. 선(鮮)이란 글자도 ‘앗’(아낌)으로 작다는 뜻이니, 작은 물고기로 풀린다. ‘달’은 산이요, 터다. 시인 정진명은 만주어 아사달을 ‘왕궁이 있는 도시’로 풀었다. 궁궐이나 누각을 ‘아사리’라 하기 때문이다. 또 몽골어로 물을 ‘어스’라 하는데 이것을 달과 더하면 아사달이 된다. ‘물가에 있는 도읍’이란 뜻이다. 박병식은 ‘아사’를 빠른 때요, 밝은 곳으로 풀었다. 단군(檀君)의 ‘단’(檀)은 ‘밝달’로 밝은 곳이지 않은가!

그러니 옛조선은 쑹화강에서 랴오허강까지 강 언저리 밝은 터에 아사달을 세운 첫 나라다. 아사달이란 이름에는 또 원방각(○□△)이 하나 한 꼴로 이룬 큰극(太極)이 숨어 있다. 아(○)는 하늘이요, 사(△)는 사람이요, 달(□)은 땅이니, 아사달은 하늘사람이 연 땅이다.

하늘이 길을 가지고 세상에 다다름은 길을 세상에 닦아서 그 속알로 사람을 널리 아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큰길은 너무도 맨(夷)”이라 하지 않았던가. 가없이 넓고 밑없이 큰길의 너름이다. 그 길 너름을 알아차리면 속알이 엇바꿔 돌아가는 큰극(太極)의 숨 돌림도 시나브로 알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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