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말로, 동갑내기 셰익스피어를 애먹인 천재
29년 짧은 생애에도 영국문학계 뒤흔들어
구두장이 아들로 케임브리지 입학한 파격
운 맞추지 않은 대사로 영국 연극사 큰 획
신성모독 발언도 서슴지 않은 급진 사상가
말로 사후에야 세익스피어 본격 창작 활동
구두쇠 아버지와 천재 아들
1564년, 영국 캔터베리의 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1564~1593)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구두나 만드시지만, 나는 시대를 만들어보겠다.'
물론 당시 갓난아기가 그런 웅대한 포부를 가졌을 리 만무하지만, 훗날 그의 행적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흥미롭게도 말로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는 동갑내기다. 둘 다 1564년생이라니, 이는 마치 하늘이 영국 문학계에 "너희들이 이제 제대로 된 걸 보여달라"며 던진 쌍둥이 선물 같다. 다만 한 명은 29년을 살고, 다른 한 명은 52년을 살았으니, 인생의 길이만큼은 하늘이 불공평했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든 첫 번째 파문
말로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구두장이 아들이 명문대에? 이는 당시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이 청년, 대학에서도 범상치 않은 행보를 보였다.
졸업 즈음인 1587년 대학 당국이 말로의 학위 수여를 거부하려 했다. 이유인 즉슨,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해외로 떠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놀랍게도 추밀원(여왕의 비밀 자문기구)이 직접 나서서 "말로는 여왕 폐하를 위해 훌륭한 봉사를 했다"며 학위 수여를 지시했다.
아, 그러니까 말로는 대학생 시절부터 이미 스파이였다는 뜻이다. 21세기식으로 표현하면 '이중전공: 문학과 첩보활동'이었던 셈이다.
런던 무대를 뒤흔든 혁신가
우여곡절 끝에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말로는 런던으로 향했다. 그리고 1587년경 <탬벌레인 대왕>(Tamburlaine the Great)으로 연극계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이 작품은 영국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다.
왜냐하면 말로가 '무운시'(blank verse)라는 기법을 대중화했기 때문이다. 운이 맞지 않는 오행시라니, 당시 사람들에게는 마치 "노래인데 멜로디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법은 자연스러운 대화체를 가능하게 했고, 훗날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중얼거릴 수 있게 한 바탕이 되었다.
말로의 대표작들을 보면 그의 야심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포스터스 박사>(Doctor Faustus, 1592경): 영혼을 팔아서라도 지식과 권력을 얻고 싶어 하는 학자 이야기. 당시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주제였다. 신을 거스르는 인간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니! 이는 마치 조선시대에 '임금님도 사람일 뿐이다'라는 연극을 올리는 것과 같았다.
<몰타의 유대인>(The Jew of Malta, 1589경): 복수에 눈이 먼 유대인 상인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보다 앞서 유대인 캐릭터를 다뤘지만, 말로의 버전이 훨씬 더 극단적이고 잔혹했다.
<에드워드 2세>(Edward II, 1592경): 동성애자 왕의 몰락을 다룬 역사극. 21세기에도 민감한 주제인데, 16세기에 이런 걸 무대에 올렸다니 그의 배짱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위험한 사상가, 위험한 시대
말로는 단순히 극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가였다. 그의 발언들을 보면:
"종교는 단순한 정책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남색쟁이였고, 사도 요한은 그의 애인이었다."
"성경을 쓴 이들은 무지했다."
와우, 이런 발언들을 16세기 영국에서 했다니! 당시는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의 딸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가 다스리던 시대로, 종교적 갈등이 극심한 때였다. 가톨릭을 믿다가 들키면 참수형이고, 신성모독 발언을 하면 혀를 뽑히는 형벌을 받았다. 말로는 이런 위험천만한 발언들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마치 "나는 화약고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다"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의문투성이 죽음
1593년 5월 30일 데프트퍼드의 한 여관에서 말로는 칼에 찔려 죽었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식사비 다툼이 벌어져 잉그럼 프라이저(Ingram Frizer)라는 자가 정당방위로 말로를 죽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구멍투성이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정부 요원: 프라이저, 니컬러스 스케레스(Nicholas Skeres), 로버트 폴리(Robert Poley) 모두 정부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타이밍이 너무 절묘: 말로가 신성모독 혐의로 추밀원에 소환된 지 열흘 만에 죽었다.
상처 위치가 이상: 이마에 2인치 깊이로 칼이 박혔다고 하는데, 이는 우발적 다툼보다는 계획적 암살에 가깝다.
너무 빨리 매장: 시신이 발견된 지 하루 만에 매장됐다.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보면, 말로의 죽음은 '감옥에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발표된 제프리 엡스타인(Jeffrey Epstein, 1953~2019)만큼이나 의심스럽다. 아마도 정부가 위험인물 말로를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사고사 연출 살인'인 셈이다.
셰익스피어의 스승이자 라이벌
말로가 없었다면 셰익스피어도 달랐을 것이다. 말로가 개척한 무운시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말로의 <몰타의 유대인>이 없었다면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도 없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말로가 죽은 후 셰익스피어의 창작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실제로는 말로였다'거나 '말로가 죽은 척하고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본다.
계급상승의 모델
구두장이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런던의 유명한 극작가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이는 재능이 있으면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재능의 주인이 29세에 칼에 맞아 죽어, 그 희망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검열의 강화
말로의 급진적 사상과 의문스러운 죽음은 당국으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게 만들었다. 이후 영국의 극작가들은 더욱 조심스럽게 붓을 들어야 했다. 말로는 의도치 않게 '언론 통제의 강화'라는 반대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의구심의 씨앗
말로의 신성 모독적 발언들이 비록 그의 죽음을 불러왔지만, 이미 뿌려진 의구심의 씨앗은 사라지지 않았다. 17세기 영국의 종교적 회의주의와 합리주의 발전에 말로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혜성
크리스토퍼 말로는 마치 혜성 같은 인물이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고는 금세 사라져버렸지만, 그 빛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29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이룬 것들을 보면 놀랍다. 영국 연극의 형식을 바꾸고,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주고,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고, 정부의 비밀업무까지 수행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멀티플레이어'의 원조다.
물론 그의 삶이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신성모독 발언, 의심스러운 정치적 활동, 그리고 폭력적인 죽음까지. 하지만 바로 그런 위험하고 모순적인 면들이 말로를 더욱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다.
만약 말로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 연극의 황금시대를 이끌었을까, 아니면 더 급진적인 행보로 결국 처형대에 섰을까? 이는 영원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크리스토퍼 말로라는 이름은 영국 문학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살아있는 전설'은 될 수 없었지만, '죽지 않는 전설'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