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⑭] 세상을 짚고 일어설 발

2025-08-25     김종길 다석연구자

검소한 저녁 한 끼를 챙기고(一食),
늘 조용히 앉아서 생각을 피워 올리고(一座),
말씀으로 ‘말숨’ 쉬면서 뜻을 세우고(一言),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어진 나눔을 베풀고(一仁),
줄곧 뚫린(中庸) 마음으로 하나를 깨닫는다(一悟).
- 다석 류영모의 삶살이

삶은 사람이 늘 땅하늘 하나로 돌아가는 마음 바탕을 가지고 하루하루 여는 살이다. 가온찌기의 ‘늘살이’다.

동서양의 철학을 “ᄒᆞ실(一). 너나․없:비롯(始․無:始)”으로 꿰뚫었던 다석 류영모는 ‘오늘살이’로 그 삶을 살았고 그리 산 삶살이를 ‘오! 늘살이’라고 외쳤다. 그러니 그이는 늘 늘살이의 ‘늘삶’에 참이 있다고 힘주었다.

‘삶잘가진이’(善攝生者)는 ‘늘삶’을 고디(貞:神)로 세우고 곧이 곧장 가는 이다. ‘늘삶’의 고디가 곧 참이요 길이리라. ‘늘삶’은 늘 나고 내는 삶이다. 늘 솟고 솟나는 삶이다. 늘 나고 내야 솟을 수 있고, 늘 솟고 솟나야 한복판을 뚫을 수 있다.

‘삶가짐’(攝生)은 ‘삶기름’(養生)과 조금 다르다. ‘삶기름’이 몸과 맘을 탈 없이 튼튼하게 하여 오래 살기를 꾀하는 것이라면, ‘삶가짐’은 쥐어 잡아 굳게 지키는 것이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를 스스로 굳게 지켜가야 한다. 그것이 ‘삶잘가진이’의 살아감이다.

나 살고 들어 죽는다(出生入死)

열 사람 있으면, 살아가는 이들이 셋이다. 살아가는 이들은 하루하루 삶의 숨·김(氣)을 힘껏 깨 캐 내 산다. 살고 살려고만 하는 바퀴를 굴려 삶을 돌린다. 들숨이 있고 날숨이 있고 멈숨이 있듯이 날마다 삶을 돌려 살아가는 것이다. 삶을 돌려서 사는 이들에게 하루하루는 나고(出) 내는(生) 삶이다. 저가 저를 낳고 저가 나서 저를 이루는 삶이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저를 낳고 내어 사는 삶은 힘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죽음은 언제나 찾아온다.

 

그림1) 공주시 갑사 소장의 불족도 탁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목판 가운데 상태나 체제가 가장 양호한 것 가운데 하나다. ‘석가여래유적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열 사람 있으면, 죽어가는 이들이 셋이다. 죽어가는 이들은 하루하루 삶의 숨·김이 버겁고 헐겁고 무겁다. 살고 살려는 바퀴가 다해서 굴려도 잘 굴러가지 않는다. 들숨은 거칠고 날숨은 깊고 멈숨이 길다. 삶이 점점 잦아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삶이 다하여 죽어가는 이들에게 하루하루는 들고(入) 드는(死) 듦이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들고 드는 그 듦에 산숨(生氣)은 없다. 산숨이 없으니 곳곳이 다 죽을 터다.

열 사람 있으면, 나(生) 움직여 죽을 터로 가는 이들이 또 셋이다. 하루하루 나고 나도 삶의 숨·김이 버겁고 헐겁고 무거운 사람들이다. 삶을 살려고 죽음 힘을 다해 바퀴를 굴린다. 바퀴가 굴러가도 들숨이 거칠고 날숨은 깊고 멈숨 또한 길고 길다. 삶이 헉헉거리면서도 굴리기를 멈추지 않으니 곳곳이 죽을 터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살기로만 움직이는 ‘하고픔’(欲心)에는 온살림이 없다.

열에 한 사람, 오롯이 다 열려 열린 오직 한 사람 ‘삶잘가진이’는 얼·숨·김(氣)이 하나로 숨 돌아가는 솟나 가온이다. 몸·맘·얼이 늘 가온찌기로 돌고 도니 으뜸 숨(元氣)이 용오름 회오리로 솟구쳐 시원시원한 ‘한늘’(宇宙)을 열지 않겠는가!

한늘 열린 삶은 ‘참삶’이다. 바로 이 ‘참삶’이 ‘삶잘가진이’의 늘살이다. 예수의 삶이 그랬고 붓다의 삶이 그랬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바로 살 줄 알았고 말을 아는 사람이었으며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기쁜 것인지 슬픈 것인지 잘 모르고 살았다. 이들은 으뜸 말과 으뜸 삶 사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다석 류영모는 『다석일지』(제4권) 345쪽에 이렇게 썼다(작은따옴표는 글쓴이가 붙인 것이다. 글에 인용된 시는 일지에서 찾아 원문 그대로를 실었다).

 

그림2)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는 한 끄트머리며 하나의 점이면서 하나의 끝수이기도 하다. 땅 밑의 싹이 하늘 높이 태양이 그리워서 그그하고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 ‘긋’이요, 그것이 터 나와서 끄트머리를 드러낸 것이 ‘끝’이요, 끝이 나왔다고 ‘나’다. 석가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뽐내며 ‘나다’하는 것이 ‘나’요, 이 나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는 점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끝수가 많은 ‘한끝’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렇게 표현해 본다.

이긋제긋 이제긋이요 ㅣㅓㅣ예 예긋이오니
고디고디 ᄀᆞᅟᆞᆫ찌기 끗끗내내 디긋디긋
이긋이 첫긋맞긋야 인제 몰릅거니와
-『다석일지』(제1권, 280쪽), 1956.11.12.

한 금을 내려 그은 줄은 ‘이’라고 발음하며 영원한 생명줄을 말한다. 영원한 생명이 시간 속에 터져 나온 한 순간이 ‘이긋’이요, 그것이 공간으로 터져 나와 육체를 쓰고 민족의 한 끄트머리로 나온 것이 이 세상에 터 나온 나라고 하는 ‘제긋’이고, 이 육체 속에 정신이 터져 나와 가장 고귀한 점수를 딸 수 있는 가치가 ‘이제긋’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과 인간의 긋이 모여 영원한 이가 공간 속에 나타나 이어 계속 나타나 이것이 이어져서 예 이 땅에 예 예어 나가는 내가 한 점 광명 긋이오니 고디 곧장 오르고 또 올라 내 속에 있는 고디(神)를 살려내어 내 속에 가온찌기, 내 속에 가장 옹근 속알(德)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깨닫고 나오는 가온찌기가 가장 소중하며, 자각은 한 번만 할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계속 자각하기 때문에 끗끗내내 자각하고 또 자각하여 종당은 땅위에 하늘 뜻을 드디고 실천하는 디긋디긋 철인들이 되어서 이긋이 태초의 맨첫긋과 종말의 맨마지막 맞끝이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을 이 인제 임을 머리에 인() 하늘의 아들들은 겸손하게 머리 숙여 모른다고 하지만 그 모르는 속에 참 앎이 있지 않을까.”

길(道)을 몸에 닦아서 그 ‘참몸’(眞身)을 가지고 몸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길 올바로 잘 세운 몸은 결코 밑동이 빠지지 않는다. 다함 없는 밑동이므로. 길 올바로 잘 안은 몸도 결코 속알을 벗어나지 않는다. 늘 속알이 참(眞)하여 ‘높속알’(上德)이므로. ‘길올’(道理) 잘 세움은 ‘높임’이요, 길올 잘 안음은 ‘깊힘’이다. 스스로 가르치고 스스로 닦아서 깨닫는 ‘높임’에 ‘깊힘’이 솟구쳐 올라 올바른!

하늘땅사람을 물어 알고(知),
하늘땅사람 물음 알을 불리고(智慧),
하늘땅사람 물음 불림을 크게 풀어 화들짝 틔우는(明)
하나 한울은 둘 땅을 활짝 연다.

둘 땅이 그렇게 셋 씨알을 열고, 셋 씨알이 또한 그렇게 넷 누리를 열고, 넷 누리가 다섯 다사리로 솟아 열어젖힌다. 그 과정은 다 똑같다. 스스로 묻고 오래 불리고 크게 풀려야 위가(웋) 환히 열린다. 여섯 이음, 일곱 이룸, 여덟 여닫음, 아홉 아우름, 열 엶, 백 온, 천 즈믄, 만 골, 억 잘, 조 울에 이르는 열다섯 꼭대기에 솟은 ‘맨’(夷:弓弓)이다. 바로 이것이 ‘높임’의 몸 닦음이다.

가온으로 돌아가는 등걸의 밑동 맘은 밑동 해로 뚜렷이 밝다. 그 밝달 사람 가운데 하늘땅이 하나로 돈다.(本心, 本太陽: 昻明: 人中: 天地, 一)

몸맘얼을 밀어 밀고(修行),
몸맘얼 밀음을 믿고(忠信),
몸맘얼 밀음 믿음을 크게 밝혀(明)
밑을 터 여는 몸은 몸맘을 꿰뚫는다.

그렇게 밀고 믿고 밑을 터 여는, 밀음 믿음 밑음으로 ‘얼 닦기’하여 맘몸으로, 뫔으로, 몸얼로 깊어져야 한다. 몸(제나)의 다섯 밑을 터 맘(맘나)에 이르고, 맘(맘나)의 다섯 밑을 터 얼(참나)에 이르고, 얼(참나)의 다섯 밑을 다 트고 열어야 ‘가온찍기’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 ‘깊힘’의 얼 닦음이다. 숨 하나 오롯하게 돌아가는 가온찌기야 말로 궁궁을을(弓弓乙乙)의 커긋(太極)이요, 다시 개벽의 이재궁궁(利在弓弓)이리라.

하나는 늘 내고 되고 이루며 돌아가는 ‘ᄒᆞ실’이다. 여기저기거기 어디에나 있으면서 하지 않음 없이 다 하시는 님이다. 텅 비어 빈 빈탕으로 있다. 쪼개진 바 없는 ‘너나’는 하나로 없(無)이니 비롯(始)이다. 이름 없(無名)에 하늘땅이 솟아서 비롯된다.

숨 하나 오롯하다.(一. 始ㆍ無: 始)

‘높임’은 스스로 저의 ‘낮힘’을 키워야 올라갈 수 있다. ‘깬앎’(意識)은 깨어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한울에서 울까지 하나하나 오롯이 온통으로 그 올 다스림(理致)을 꿰고 뚫어야 줄곧 솟구칠 수 있다. 하나하나마다 반드시 다 알아야 알아지고 그다음이 열린다.

하늘땅사람 셋을 물음, 물음이 서면 하늘땅사람의 셋 물음을 불음, 불음이 불림으로 높아지면 하늘땅사람의 셋 앎이 풀어진다. 물음 불음 풀음의 셋이 잘 돌아 풀려 열리면 그 다음 위로 솟난다. 잘 돌아 풀리기 위해서는 깬앎을 위한 배움 실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음에서 배움 실천 이해, 불음에서 배움 실천 이해, 풀음에서 배움 실천 이해가 다 풀려야 다음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물음 불음 풀음이 ‘높임(솟구침)’을 위한 ‘낮힘’이다. 낮힘을 키우고 솟구쳐 ‘높임’이 열리면 아래 낮힘은 늘 저절로 열려 알아진다.

‘깊힘’은 아래가 저절로 터 됨으로써 열린다.

아래가 저절로 터가 되기 위해서는 ‘몸성히’ 닦음, ‘맘놓이’ 닦음, ‘바탈태우’ 닦음을 해야 한다. 몸맘얼 닦기다. ‘낮힘’이 깬앎을 알아 솟는 것이라면, ‘닦음’은 터 비우는 것이다. 비우고 비워야 저절로 아래가 터 된다. 빈탕으로 텅 비우고 비워야 등걸의 밑동처럼 옹골차게 든든해진다. 그래야 저절로 열린다. ‘깊힘’은 깊어지면서 넓어지는 것이다. ‘깊힘’을 닦는 것은 몸맘얼을 밀어 밀고, 몸맘얼이 밀어져 믿어지면, 몸맘얼을 터야 한다. 밀기만 하면 믿어지지 않고, 밀어 믿기만 하면 우상이 된다. 믿어지면 밑을 터 비워야 한다. 밀음 믿음 밑음으로 돌아야 그 다음이 열려 비움이 커진다. 몸에서 맘으로 맘에서 얼로 깊어져 올바른 참이 다 열리는 것은 바늘 끝에 이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높임’으로 키워 솟구친 만큼 스스로 저절로 아래 터가 열려 ‘깊힘’에 가 닿기 위해서는 배우고 익히는 알음앓이를 꾸준히 해야 하고, 마음 챙김의 몸맘얼 닦기를 쉬지 않아야 한다.

 

그림4)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의 부분, 국보 제83호, 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잘 세움은 곧이 솟은 섬(貞)이요, 높임이며, 늘 뚫려 솟날 솟난이(王)다.
잘 안음은 아래 터 열린 너름(普)이요, 깊힘이며, 등걸 밑동의 참나(眞我)다.
깬앎(意識)의 ‘높임’ 길과 깨달음의 ‘깊힘’ 길이 하나로 휘돈다.
나선으로 휘돌며 점점 솟아 크게 열리는 집집 우주에 길이 환하다.
가없는 속알이 밝아 세상 온갖 것들을 맑게 꿰뚫는다.

보아 보는 봄(觀)의 우주 우물 속 어머니 어미 온통이다. 내고 내고 내고 솟고 솟고 솟는 낮힘에 감ᄒᆞᆫ 어미 홀로 그늘을 지고 볕을 품에 안는다. 내고 내는 검얼(神靈)의 엄(玄牝)이요, 그 엄의 비어 빈 가득가득(充滿)이요, 그 가득가득에 돌아가는 숨돌(氣運)이요, 숨돌이 푹늘(襲常)로 야물어 갈 때 길을 몸에 닦는다.

하고픔을 덜고 또 덜어서 ‘함없’(無爲)에 이르러야 한다. 길(道)은 늘 일없음(無事)으로 하지 않음이 없는 길이다.

일없다!
일없는 그 자리!
빈탕한데!

억지로 하는 일이 없어야 함(爲)이 올발라진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없’으로 하는 일이다. ‘없’(無) 하나가 춤추듯 숨 돌려 모든 일을 한다. 그러니 없이 있을 다 한다고 말해야 옳은 말이다. 없은 집집 우주의 숨 하나가 가득 가득 돌아가는 돎이요, 비고 비어서 텅 텅 빈 빈탕이 솟구치는 ‘곧있곧빔’(卽有卽空)의 ‘참숨’(眞氣)이다. 모든 눈앞의 ‘꼴짓’(現狀)이 곧 그대로 바뀌고 또 바뀌어 돌아가니(易) 다 빔(空)이지 않은가!

 

그림5) 태국 아유타야 유적지에 있는 ‘왓 차이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의 목 없는 불상들.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불상이다. 그런데 이 사진은 흥미롭게도 하늘이 머리로 보인다. 빈탕의 텅 빈 하늘이 머리가 되었다.

녘, 易, 해질녘, 해달이 돌아가는 고요한 숨의 빈자리, 해달이 서로 갈마들어 하나로 있는 자리, 둘 다 없는 그 자리, 아침놀의 자리, 울돌목의 그 자리에 깨 캐 낸 ‘참나’(眞我)는 안팎이 없는 집집 우주에 오롯한 홀로, 홀 하나, 외짝 지게문조차 사라진 늘(常)의 마음자리에 솟은 하나, 그 하나 마음에 녘(易)이 숨 돌리며 숨줄(易經)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니, 마음 집 부수고 그저 없긋(無極)의 빔(空)이 솟아 돌아간다.

이름 없에, 하늘땅이 비롯!
없에, 숨어 이름 없는 길이 있!
그 없이 있는 길을 가!

세상살이의 온갖 배움은 배우고 배울수록 날로 더한다. 더하고 더하는 일은 ‘싶음’(欲望)의 ‘낮힘’(下力:賤)을 키우는 일이다. 써먹기부터 하려는 배움의 낮힘이 커지면 저 스스로를 자꾸 높이려고 한다. 노자 늙은이 39월(章)에 “높임(貴)은 낮힘으로서 밑을 삼고, 높(高)은 아래로 터 됐음이여”라고 했다. 써먹으려는 낮힘을 밑 삼으니 저를 앞세워 ‘제뵘이’(自見者)가 되고, 저를 앞세워 ‘제옳건이’(自是者)가 되고, 저를 앞세워 ‘제봐란이’(自伐者)가 되고, 저를 앞세워 ‘제자랑이’(自矜者)가 된다. 제뵘이, 제옳건이, 제봐란이, 제자랑이는 착하지 않다. ‘길가진이’(有道者)의 ‘늘삶’(常生)은 저 없이 스스로 저절로 있는 그대로 가는 삶이다.

우리말 ‘늙은이’의 ‘늙’에는 ‘늘’과 ‘늑’이 더불어 있다. 길의 참뜻은 이제 예 여기의 ‘늘’(常)에 있고, 주역(周易)의 지천태(地天泰)로 푸는 ‘늑’은 잘 통해서 고루 짓고 기르는 저절로를 뜻한다. 땅 아래 하늘 숨이 깃들어 돌아가는 꼴이다. ‘늙’은 그러므로 늘 잘 통해 돌아가는 저절로가 아닌가. 늘삶의 있는 그대로 가는 삶을 가고 가야 늙은이가 된다. 그러므로 늙은이는 아름답다. 그에게 숨은 길이 있다. 그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늙은이 없는 세상은 얼마나 슬프고 끔찍한가.

‘참알줄’(道德經)의 길(道)은 늙은이(老子)에 있다!
속알(德)이 익고 영글어 툭 떨어지는 자리에 길의 ‘흰빛’(恍惚)이 환하다!
‘곧있곧없’(卽有卽空)에 터진 ‘흰그늘’(日影)의 ‘살알’(生靈)을 모시라!

길은 하루하루 스스로를 가르쳐 익히고 깨닫는 닦아감(修行)이요, 저절로 익고 영글어 뚝 떨어질 때 드러나는 환한 열매의 씨알로 여물어 가는 것이다. 여물고 여물어 다 익고 영근 열매는 알짬(精)으로 시원하게 비워진다. 오늘살이로 늘 닦고 닦아야 하는 것은 ‘닦아남’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닦아났어도 나날이 밑을 터 열어야 새로워진다. 매이지 않아야 스스로 저절로 하루하루 높속알(上德)이 되고, 스스로 저절로 높오르는 ‘높’(高)이 된다. 스스로 저절로 아래가 터 됐음이다. 길은 가고 갈수록 날로 덜어진다. 저절로 아래가 터 되는 ‘깊힘’(深淵力)이 크고 커서 텅 비워지기 때문이다. 깊힘이 커야 세상을 집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

산알이 솟는 땅

홀소리 ‘ㅡ’는 땅(地)이다. 하늘아()를 하늘 숨이라 했듯이 홀소리 ‘ㅡ’도 땅 숨이다. 그냥 땅을 뜻하는 ‘ㅡ’가 아니다. 산알의 땅으로 ‘ㅡ’이고, 산알을 내는 땅으로 ‘ㅡ’이며, 산알이 솟는 땅으로 ‘ㅡ’이다.

다석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끄트머리며 하나의 점이면서 하나의 끝수이기도 하다. 땅 밑의 싹이 하늘 높이 태양이 그리워서 그그하고 터 나오는 것을 그린 것이 긋이요, 그것이 터 나와서 끄트머리를 드러 낸 것이 끝이요, 끝이 나왔다고 나다.”[「버들푸름」,『다석일지(4권)』(홍익재,1990), 345쪽]

앞글에서 글쓴이는 다석 류영모가 빗댄 ‘곰팡이 한 알갱이’를 풀었다. 그이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면 “곰팡이 한 알갱이 같은 나라는 존재인데 내 속에 으뜸인 하나에서 나온 이상한 것, 바른 것, 근본인 것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씨다.”라는 말에서 꿍꿍의 사슴뿔이 돋는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에서 나온 하느님의 씨를 싹틔워야 한다. 저절로의 힘으로 씨앗인 ‘’를 깨 캐 낸 것이 ‘한ᄋᆞ’다. ‘한ᄋᆞ’는 하나 하늘이요, 끝없는 우주다.

민세 안재홍은 한민족의 조상들이 “맨 처음에 발견한 세계관적 철리(哲理)”가 ‘비․씨․몬’(虛․種․物)이라고 하였다. 몸은 산알의 몬(物)이요, 맘은 빈탕의 비(虛)요, 얼은 반짝이는 씨(種)다. 곧 얼은 반짝반짝 빛나는 하느님의 씨다. 스스로 깨어난 예수붓다의 바탈(本性)이다. 살아가는 ‘몸몬’ 속 빈탕의 텅 빈 ‘맘비’가 크게 도는 자리에 하느님의 ‘얼씨’가 벼락번개로 솟구쳐야 ‘큰나’(大我)요, ‘참나’(眞我)이리라. ‘’는 스스로 그리워 그리는 말숨에 저절로 빅뱅한다. 크게 터져서 ‘몸’에 든 땅(ㅡ)이 하늘 숨() 하나로 들임 받는 ‘거듭남’(ㅣ)을 이룬다. ㅡ가 으로 뒤바뀐 ‘ᄆᆞᆷ’이다. ‘몸’이 ‘ᄆᆞᆷ’으로 열리는 때다.

땅(ㅡ)에 하늘()이 열린다(侍天主). 땅하늘에 사람이 곧다(ㅣ).
땅하늘(ㅜ)이 하늘땅(ㅗ)을 먹는다(以天食天). 하나 한꼴로 ‘웋’이다.
하늘땅 맞도는 가온에 땅하늘 맞돈다. 하나 한꼴로 ‘ᄆᆞᆷ’이다.
이제 땅이 하늘 숨이다.

 

그림6) 태국의 아유타야 유적지에 있는 ‘왓 마하탓(Wat Mahathat)’ 사원이다. 나무 뿌리에 감긴 불두상이다.

‘ㅡ’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자. 학산 이정호가 정리한 것이다.

‘즉(卽)’자(字)의 중성(中聲)인 ㅡ는 그 소리가 혀를 약간 뒤로 하고 구강(口腔)의 깊지도 얕지도 않은 데서 난다. 가 목구멍의 깊은 부위에서 나서 하늘이라면 ㅡ는 그 다음의 깊지도 얕지도 않은 데서 나서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해(制字解)에 “ㅡ는 혀가 조금 오그라지고 소리가 깊지도 얕지도 않으니 땅이 축(丑)에서 열린다”하고 이어 “모양이 평평(平平)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라”고 하였다. ㅡ는 땅의 평평(平平)한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으니 역시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에는 틀림이 없으나, 땅의 형상(形狀)을 얼른 보면 산천구릉(山川丘陵)과 백곡초목(百穀草木)이 달려 있을 뿐, 가없는 넓은 들이나 망망(茫茫)한 큰 바다에서 보기 전에는 그 평평(平平)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양이 평평하다’고 한 것은 역시 의상(意象)이라 하겠다.

‘ㅡ’의 역학적 의의는 이렇다. 이 또한 학산이 갈무리한 것이다.

ㅡ는 공평(公平)과 균형(均衡)을 의미한다. 계급과 인종과 피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동권(同權)임을 주장한다. 이것이 천지의 길이며 또한 겸도(謙道)인 것이다. “천도(天道)는 가득한 것을 이지러뜨려서 겸손한 데로 더하여 주고, 지도(地道)는 가득한 것을 변화시켜서 겸손(謙遜)한데로 흘려주는”데서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차이와 산이 솟고 못이 파인 격차(隔差)가 평(平)쳐지고, “많은 것을 쪼개서 적은 데로 더하여 주며 만물을 공평히 저울질하여 균평(均平)하게 나눠주는”데서 겸도(謙道)가 이뤄지는 것이다. 대개 만물이 고루지 않은 것이 만물의 뜻이라고도 하나, 이것은 장자류의 제물론을 반박한 말로서, 세정(細情)으로 논하면 대동중(大同中)에도 소이(小異)가 필요는 하지만, 그래도 무릇 이 땅 위에 명(命)을 탄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무엇일지라도 다 하늘 앞에 공평하고 사람 앞에 떳떳함은 이 ㅡ의 윤리(倫理)가 명시하는 바이다. 다음에 ‘지벽어축’(地闢於丑) 즉 땅이 축(丑)에서 열린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관견(管見)으로는 하늘이 이미 자(子)에서 열렸으니 인간이 생기기 전에 먼저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이 있어야 될 것이다. 그 터전이 땅이고, 그 땅이 바로 하늘이 열린 자(子:水)의 다음 차례인 축(丑:土)에서 열렸다는 것이다. 음양오행의 방위생성수(方位生成數)로는 지십성토(地十成土)의 수(數)이고, 하도(河圖)로는 십토(十土)이며, 간지(干支)로는 기축(己丑)에 해당한다.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정윤재 지음, 『다사리국가론-민세 안재홍의 사상과 행동 연구』, 백산서당, 1999
정윤재 지음, 『다사리공동체를 향하여』, 한울, 2002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서일, 「진리도설」, 『대종교중광육십년사』, 대종교총본사, 1971
윤노빈 지음, 『신생철학』, 제일문화사, 1974(증보판은 학민사에서 2003년에 펴냄)
대종교총본사, 『삼일철학-역해종경사부합편』, 개천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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