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⑫] 아오(⋅), 하늘이 열리다

2025-08-11     김종길 다석연구자

이 글은 바로 앞에 실은 ‘히읗’과 이어서 읽어야 깨우침이 크다.

말머리에 가져와 쓴 글을 소리내어 읽으면 “사람 가온데 하늘 땅 하나”(위), “사람 하늘 땅 들어 맞춘 하나 한”(아래)이다. 「천부경(天符經)」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을 다석이 한글로 풀었다. 닿소리에 하늘아 하늘 숨(⋅)를 넣었으니 그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 하늘아로 쓴 닿소리는 하늘 숨이 끝없음이요, 쉬지 않음이요, 크게 돌아가는 돎이다.

다석은 문장부호를 넣어 글이 여러겹의 깊이를 갖도록 하였다. 문장부호에 따라 풀어서 읽으면 이렇다. “사람 가온데, 그 줄곧 뚫린 자리에 그대로 숨 돌리는 하늘땅이다. 그러니 사람하늘땅(人天地)은 하나다.”(위), “사람에 그대로 하늘땅이다. 사람 속에 하늘땅이 들어 맞춘 하나이니 가없이 크고 크다.”로 풀린다. 앞글 열한 번째에 ‘ᄒᆞᄂᆞᆯ’, ‘ᄒᆞᄂᆞ’, ‘ᄒᆞᆫ’을 자세히 풀어 놓았으니 다시 살펴 볼 일이다.

사람이 임자다

흥미롭게도 「천부경(天符經)」은 ‘사람’을 임자(主語)로 내세운다. 다석이 ‘천부경’(天符經)을 ‘ᄒᆞᆫᄋᆞᆯ 댛일쪽 실줄’이라 했듯이, ‘댛일쪽’의 맞쪽은 사람이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이때 사람은 오직 인간(人間)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다섯 번째 글에서 “셋: 씨알, 사람”을 풀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셋은 씨알, 사람이다. 사람이 씨알이다. 사람은 사ᄅᆞᆷ이요, 살알이요, 산알이다. 씨ᄋᆞᆯ이 낸 씨앗이 사람(生命)이다. 사람은 싱그레 온 벙그레이다. 싱싱 벙그러졌다. ᄋᆞᆯ은 한 우주로 온통이요, 씨앗은 낱 우주로 온통이다. 한 우주가 싱그레 벙그레 낱 우주를 내었다. 그 우주를 이제로 여기에 세웠다. 곧 씨알사람이다. 셋을 ‘세웃’이라고 한 까닭이다. 하늘에 땅이, 땅에 하늘이 맞붙은 자리에 씨알사람이 움직움직 솟았다. 줄줄 줄곧 내린 하늘이 땅에 움쑥 드니 산숨(生命)이 불쑥 깨어났다. 땅에 하늘이 들어서 숨 돌아간다. 움쑥불쑥 숨 돌리는 숨돌(氣運)이다. 산숨이 솟으니 하늘땅이 다 깨어 돈다. 하나둘셋이 한꼴 하나로 돌아가는 돌아감이다. 셋이 참(眞)이다. 셋참이 하나로 돎(三眞歸一)!”

 

그림1)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의 NIRCam이 잡아낸 우리은하 구상성단 NGC 6440. ‘NGC 6440’은 지구에서 궁수자리 방향으로 약 2만 8000광년 떨어져 있다. 구상성단은 수만~수백만 개의 항성이 구형으로 모여 있는 천체이다. 사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이 보석같이 반짝인다. 우리은하 안에만 구상성단이 약 150개가 있다. 저렇게 반짝이는 항성이 씨알이요, 산알이다. 산 사람의 몸은 있는 그대로 반짝이는 뜨거운 불숨(恒星)이다. 땅구슬 몯돌(地球)은 속에 뜨거운 불숨을 가졌다. (https://sputnik.kr/news/view/7879. 2025.8.10.현재시점)

다석은 ‘나’라는 사람을 ‘곰팡이 한 알갱이’에 비유했다. “묵은 떡 덩어리에 낀 곰팡이 한 알갱이 같은 나라는 존재인데 내 속에 으뜸인 하나에서 나온 이상한 것, 바른 것, 근본인 것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씨다. 이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이 삶의 지상목표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 하느님의 씨를 싹틔운 사람이라고는 몇 안 된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그저 곰팡이 노릇만 잘하면 된다. 그러면 몯돌 지구는 건강하다. ‘몯돌’은 생명을 모두 한데 모아서 돌아가는 지구를 뜻한다.

하느님의 씨는 내 속에 으뜸이 하나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긋’이다. 다석은 “참과 긋은 그 크기다 다르다. 참은 가장자리 없는 무한대이고 긋은 자리만 있고 없는 점과 같다. 그래서 ‘긋’(點)이라 한다. ‘긋’의 ‘ㄱ’은 하늘이고 ‘ㅡ’은 땅이고 ‘ㅅ’은 사람이 합쳐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읏(ㅅ)으로 솟아 오르는 생명의 자리에 늘 하늘 숨(⋅)이 있다.

사람 가온데 하늘땅이니, 사람하늘땅(人天地)은 하나다. 사람에 하늘땅, 곧 ‘사람 속에 하늘땅을 들어 맞춘 하나가 크고 크다’(人中天地一)의 뜻은 다석철학의 고갱이랄 수 있다. 이 고갱이를 잘 알아차려야 한다. 하늘이 먼저가 아니다. 땅도 먼저가 아니다. 생명이 먼저요, 사람이 먼저다. 하늘은 없이 계심이요, 땅은 있이 없음이요, 사람은 있없이 반짝이는 한꼴이다. 수운은 사람이 ‘모신 하ᄂᆞᆯ님’(侍天主)이라고 하였다. 해월은 1897년 4월 5일에 향벽설위(向壁設位)를 향아설위(向我設位)로 바꾸었다. ‘없는 넋에게 베풀라’가 아니라, ‘있는 나에게 베풀라’는 뜻이다. 그 나가 참 오롯한 생명이요, 사람이다.

다석을 공부하는 이들은 다석철학(혹은 다석사상)과 기독교사상을 다르게 보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못하거나, 아예 안하려고 드는지 모르겠다. 어떤 글들은 억지로 짜 맞춘 흔적이 쉽게 눈에 띈다. 형이하(形而下)․상대(相對)․나(我)는 그릇되고 나빠서 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형이상(形而上)․절대(絶對)․얼(靈)은 옳고 좋아서 그것만을 따라야 한다고 힘준다. 과연 그럴까? 나는 죽어야만 할까?

태극에서 무극에로

하늘도 땅도 사람 속에 들어 맞춘 하나다. 본디 그렇게 태어났다. 그런데 그 하나의 씨알을 깨우지 못하니, 형이하(形而下)․상대(相對)․나(我)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사람 속에서 하늘땅이 둘로 돌아간다. 이 말은 하늘도 땅도 사람 속으로, 아니 사람 속에 들어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걸 뜻한다. 하나를 잃은 것이요, 잊은 것이다. 중생(衆生)은 중생(重生)을 해야 한다. 뭇사람은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뭇사람 가운데 가장 어긋나 있는 사람이 인간일 것이다. 다석은 ‘좀나’(小我)에서 ‘큰나’(大我)로 솟나라고 했다. 큰나는 얼의 나다. 곧 얼나(靈我)다. 얼의 새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끝끝내 ‘없는데’(無極)까지 가야 한다.

이제살이는 늘 지금을 사는 것이요,
여기살이는 늘 이땅을 사는 것이요,
오늘살이는 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나날이 늘 지금 여기를 뛰넘어 사는 삶이 거듭나는 삶이요, 하늘땅이 땅하늘로 숨 돌리는 하나 한꼴의 사람이 줄곧 뚫린 형이상(形而上)․절대(絶對)․얼(靈)의 나다. 그 나가 참나요, 큰나다. 살아서 스스로를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집집 우주다.

그림2)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석가모니 고행상(苦行像)이다. 파키스탄 국보 1호, 크기는 850x535x200mm, 제작 시기는 2~3세기, 재료는 편암(片岩)이다. 싯다르타가 6년의 고행 끝에 열반에 들 때의 조각상이다. 고행은 스스로의 바탈(本性)을 태우는 과정이다. 몸은 장작이요, 맘은 들숨날숨의 바람이다. 다석은 하루 한끼를 먹으면서 바탈태우를 이어갔다. 조각의 기단(基壇)을 잘 보라. 불꽃 하나가 타오르고 있다.

맨 앞에 쓴 첫 글월 「참 깬 이」 앞머리는 두 개의 ‘다석어록’이다. 거기 두 번째에 “없는 데까지 가야 크다. 태극에서 무극에로 가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 철학의 결론이다.”라는 말이 있다. ‘참 깬 이’는 말 그대로 ‘참에 깸’(眞覺)이었을까? 아니다. 글쓴이는 바탈 깸(本覺)이요, 맨첨 깸(始覺)이요, 끝끝내 깸(究竟覺)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이는 “가온찍기야 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찰나 속에 영원을 만나는 순간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하늘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며 가온찍기가 인생의 핵심이다. 그러나 깨닫는 가온찍기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끝끝내 표현해 보고 또 표현해 보고 나타내 보고 나타내 보여야 한다. 내가 내 속알을 그려보고 내가 참나를 만나보는 것이 끝끝내이다.”(1956)라고 힘주었기 때문이다. 끝끝내 깬 자리, 그 자리가 곧 ‘없는데’(無極)이다. 한마디로 ‘없’이다.

다석은 1968년 10월 30일에 「천부경(天符經)」을 풀었다. 1963년 12월에 일으킨 「천부경」 풀이는 5해 동안 이어졌다. 마지막 여섯 번째 풀이는 다석철학의 집대성이라 할만하다. 「천부경」의 맨 아랫 문단 풀이를 보자. 다석이 한글 풀이에 적용한 문장부호를 원문에 그대로 적용하면 이렇다.

본심(本心). 본태양(本太陽) : 앙명(仰明) :
인중(人中) : 천(天) ․ 지(地). 일(一) ―
― 인(人) : 천(天) ․ 지(地). 중(中) : 일(一) : 일(一)
― 종(終) ․ 무(無) : 종(終). 일(一).

다석이 손글씨로 쓴 한글은 그림3)과 같다. 가장 중요하게 살펴야 하는 것은 하늘아(⋅)다. 소리내어 읽어 보자. “밑둥 맘. 밑둥 해 뚜렷 밝아/ 사람 가온데 하늘 땅 하나 ―/ ― 사람 하늘 땅. 들어 맞춘 하나 한/ ― 마침 없 끝. 하실.”이다. 뜻풀이는 위에서 했으니, ‘가온데’라고 읽은 글씨를 보자. 기윽니은 가운데에 점 하나를 찍은 ‘가온찍기’ 글꼴이다. 찍어야 ‘가온찌기’라고 했다. 가온찌기는 ‘함없 함’(爲無爲)의 나날이다. 곧 ‘없에’(無爲) 든 삶이다.

 

그림3) 다석이 1968년 10월 30일에 푼 한글 천부경이다. ‘밑둥 ᄆᆞᆷ’이라 했다. 밑둥에 돌아가는 참나의 마음. 그 참나의 마음은 또한 뚜렷이 밝은 ‘밑둥 ’다. ‘ᄆᆞᆷ’과 ‘’에 하늘아가 있으니 그 맘과 해는 쉬지 않는다. 끝없고 밑없고 가없다. 그리고 ‘ᄉᆞᄅᆞᆷ ᄀᆞᆫ’라 했다. 끝없고 밑없고 가없이 밝은 ‘ᄆᆞᆷ’과 ‘’를 가진 ‘ᄉᆞᄅᆞᆷ’이요, 그 ‘ᄉᆞᄅᆞᆷ’의 ‘ᄀᆞᆫ’에 ᄒᆞᄂᆞᆯ 땅이 ‘ᄒᆞᄂᆞ’란다. ‘ᄒᆞᄂᆞ’는 늘 내고 낳고 되고 이룸이 끝없다는 뜻이다.

하늘아(⋅)

하늘아 제자(制字)의 기원(起源)을 보자. 학산 이정호가 정리한 것이다. “탄(呑)자의 중성(中聲) ⋅는 제자해에 ‘⋅는 혀가 오그라지고 소리가 깊으니 하늘이 子에서 열린 것이다. 모양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다’라고 하여 ⋅는 그 소리가 혀를 오그리고 목구멍의 깊은 곳에서 나므로 하늘이 자(子)에서 열림에 비유(譬喩)하고, 목구멍은 초성 후음(喉音) ㅇ의 경우와 같이 (子) 수(水)인 동시에 하늘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형상을 본떠서 그 자형(字形)을 둥글게 탄환(彈丸)과 같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형상은 얼른 보기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찬란(燦爛)함과 천광운영(天光雲影)의 배회(徘徊)함을 볼 뿐이오, 가없는 넓은 들이나 끝없는 높은 봉우리에서 보기전에는 그 둥근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둥글다고 하는 것은 실상(實象)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상(意象) 또는 심상(心象)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실상(實象)이건 의상(意象)이건 간에 상(象)에는 틀림없고, 그 모양을 본떠서 둥글게 만든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역시 초성(初聲)의 경우와 같이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하늘아의 역학적 의의(易學的 意義)는 무엇일까? 학산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상기 제자해에 ‘하늘이 자(子)에서 열린다’는 말이 있다. 하늘이 자(子)에서 열린다 함은 도대체 무슨 소린가. 관견(管見)으로는 위에서 누누(累累)히 언급한 바와 같이 후부(喉部)는 구강오행(口腔五行)의 수(水)에 해당하고, 수(水)는 또한 만물생성(萬物生成)의 기본적인 요소이므로 하늘과 같다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 水(물)에서 만물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말하여 ‘천개어자’(天開於子) 즉 하늘이 자(子)에서 열린다고 하였으나, 십이지(十二支) 중에서 자(子)는 일수(一水:生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하늘을 그릴 때에 초성에서는 ㅇ과 같이 둥근 고리를 그리고, 중성에서는 ⋅와 같이 둥건 점(點)을 그렸으니, 이것이 또한 좋은 대조라고 생각된다. 태극도설에는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 하고 계사(繫辭)에는 ‘역유태극’(易有太極)이라 하였으니, 다 같이 하늘의 이치(理致)를 그렸으되 ㅇ은 그 무극면(無極面)을, ⋅는 그 태극면(太極面)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해에도 ‘천지(天地)의 이치(理致)는 하나의 음양(陰陽)과 오행(五行) 뿐이라’하고 또 ‘무극(無極)의 진리(眞理)와 음양오행의 정기(精氣)’라 하였으니 여기 하나(一)와 진리는 다 같이 태극의 리(理)를 말한 것이다. 상기 계사의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라고 한 것과, 태극도설의 “무극(無極)이며 태극(太極)이니…양(陽)은 변하고 음(陰)은 합하여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를 낳으니 다섯 기운이 순차(順次)로 퍼진다”고 한 이론(理論)과도 합치(合致)되는 것으로, 모든 중성(中聲)의 시초(始初)인 ⋅는 이치로는 태극(太極)이요, 실체로는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음양과 오행이 나타내는 방위생성수(方位生成數)로는 천오생토(天五生土)의 자리(位)니 하도(河圖)로는 오토(五土)이며 간지로는 무진(戊辰)에 해당한다. 한편 모든 한자의 근원인 丶(주)도 한 점에 불과하며 그 뜻도 또한 한 점에 머물러서(住) 천하만민(天下萬民)을 비취고 가르치는 ‘주’(主)라는 것이다. 십일중성(十一中聲) 제자(制字)의 제일(第一) 기본형(基本形)이다.

다석은 『새벽』(1955.7월호)에 실은 「제소리」에서 “⋅ㅣㅡ ― 셋에 대하여”를 말한다. “모든 것이 천(天)에 원(元)하고 시(始)하고 환(還)하는 원만(圓滿)을 법(法)받아 권점(圈點)으로 아오(AU)를 찍다. 먼저 하늘을 원(圓:ㅇ)으로 정하시 안 하였나? 하는 물음은 나오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은 우리글의 독특성(獨特性)입니다. 하늘에 대하여 아들된 우리의 발전대원만(發展大圓滿)을 그려 지시(指示)하는데 쓸 필요도 자음(子音)에 씨운 것입니다. 하늘을 원형시(圓形示)한대도 대원시(大圓示)는 못하는 것이고, 하늘은 첫이라는 뜻을 보이는 데는 차라리 점(點)으로 하고 원만(圓滿)의 뜻을 권점(圈點)이라는 데 둔 것입니다. 권점(圈點)은 우리 것⋅ 비점(批點) 丶 배씨(梨種子形)는 한자의 것, ⋅아형(芽形) ‘요드’는 히브리 것이라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자음(子音)의 ㅇ은 공위(空位)를 표하는 것이라는 학설은 취(取)ㅎ지 않습니다. 우리 후음(喉音) ㅇㆆㅎ 삼층단(三層段)은 분명 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림4) 학산이 그린 중성입체도(中聲立體圖)이다. 맨 위는 아오으이, 가운데는 아어우오, 아래는 여야요유를 탑에 빗대어 그린 것이다. 학산은 중성입체도를 일명 ‘정음탑’(正音塔), 혹은 관음탑(觀音塔)이라고 했다. 다석은 정음교(正音敎)라고 했으니, 학산과 다석의 한글사랑을 익히 알만하다.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多寶塔)를 평면도로 그리면, 학산이 그린 중성입체도의 부분과 상당히 닮았다.

‘ᄆᆞᆷ’이 마음 닦음

‘나’는 나날이 잠깨어 참 하나로 솟나야 ‘늘길’(常道)에 이른다. 하늘땅이 돌아가는 땅하늘 사이 이제 예 여기 다다른 ‘온끝’에 곧이 서야 한다. 다다른 ‘온끝’에 홀로 ‘끗’을 사르고 살라야 ‘없’ 그 자리 맨 처음에 닿는다.

끗 : ‘끝’으로 ‘긋’에 이른 말이 ‘끗’이다. 끝, 그 끄트머리에 솟은 ‘끗’이다. 나날이 ‘온끝’에 홀로 솟아 사르는 것이 곧 ‘끗’이다.

긑 : ‘긋’으로 ‘끝’에 이른 말이 ‘긑’이다. 긋, 그 끄트머리로 잇는 ‘긑’이다. 나날이 하늘 일름(命)을 받아 솟는 것이 곧 ‘긋’이다.

‘긋’을 이루어 ‘끗’으로 서야 ‘끝’이다. ‘나’는 한 점 솟구치는 ‘긋’이요, 그 자리에 곧이 선 것이 ‘끗’이요, ‘끗’으로 ‘끝’을 내니 ‘ᄆᆞᆷ’이 터져 환하다.

다석은 ‘맨 첨’이란 두 글씨를 푼 적이 있다. ‘맨’이 참 묘하다면서 낱낱이 따져 물었다. 기윽니은(ㄱㄴ)을 더한 꼴 미음(ㅁ). 미음 ‘ㅁ’은 모름, 먹음, 므름, 말 등의 첫소리다. 입술소리 미음에 사람을 뜻하는 ‘ㅣ’를 내리긋고 하늘아가 그 뒤를 민다. 미음 ‘ㅁ’에 ‘ㅏ’가 붙으니 ‘마’다. 사람(ㅣ)이 다시 한 번 끌어 붙이니 ‘매’다. 니은을 받침으로 붙인 ‘맨’은 ‘맨 탕’이라고 하듯이, 아무 것도 섞이지 않은 오롯한 하나다.

‘첨’은 참이다. 참이니 그것을 ‘첨’이라 한다. 그래서 ‘맨 첨’은 참 말씀의 ‘첫끗’이라 하겠다. 또 말씀의 ‘말’은 하늘아가 사람의 뒤를 밀어 ‘ㅏ’인데, 거기에 입술소리 미음(ㅁ)이 달렸다. ‘마’에 살아 움직이는 꼴 리을 ‘ㄹ’이 붙어 ‘말’이 된다. “맨 첨에 말씀이 계시니라.”거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매”(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을 살필 것)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제소리로 말을 써야 참사람이다.”[다석 류영모, 『다석일지-다석 류영모 일지(제4권)』(홍익재, 1990), 618쪽을 참고해서 풀었다. 따옴표는 글쓴이 한 것이다.]

“맨 처음에 ‘없’이 있었을 것 같다. ‘없’하면 참으로 엄숙한 것이다. ‘없’은 나도 안다하고 지내버릴 수 없다.”

첫 글 머리띠에 ‘맘 닦음’이라 했다. 무슨 말일까? 무엇을 어떻게 닦아야 할까? 다석은 ‘맘’과 하늘아가 든 ‘ᄆᆞᆷ’을 가셔서 쓰자고 했다. “‘맘’과 ‘ᄆᆞᆷ’을 가려서 쓰고 싶다. ‘맘’이란 아직 상대적인 세상에 욕심을 붙여서 조금 약게 영생하는 데 들어가려는 것이다. ‘ᄆᆞᆷ’이란 모든 욕심을 다 떼어 버리고 자신을 세워 나가겠다는 것이다.”

다석은 여래(如來), 곧 ‘참올(眞理)’로부터 그 ‘참올’을 따라서 이제 여기 다다른 ‘참나’가 ‘있다시 온’이라 했다. 본디 참 그대로 온 꼴이니 불교에서 말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참된 ‘얼낯’이다. 하나 그대로 그 ‘있’이 다시 왔으니 그 ‘있’을 나죽지 않는 첫 씨알의 ‘참꼴(眞身)’이라 하는 것이다.

‘참꼴’은 본디 참 그대로 온 한 꼴로 ‘ᄆᆞᆷ’이다. 하늘아가 크게 돌아가는 우주 빈탕이다. ‘참꼴’을 잃으면 ‘맘’이다. ‘ᄒᆞ고ᄌᆞᆸ(欲望)’에 사로잡힌 ‘싶뜻(欲心)’이 ‘ᄆᆞᆷ’을 가렸다. ‘참꼴’은 하나로 ‘있’이다. 그것은 둘로 쪼개지지 않고 나죽지도 않는다. ‘맘 닦음’이란 ‘ᄒᆞ고ᄌᆞᆸ’에 가려버린 ‘ᄆᆞᆷ’을 다시 돌이켜 찾는 일이다.

 

그림5) 몯돌 지구(地球)에 살고 있는 생명들은 이어이어 이어가는 나선형의 시간을 산다. 소용돌이 삶이다. 있없이 반짝이는 삶이다. 우주 빈탕에 한 줄기 생명줄로 살고 있다. 크게 보면 지구살이요, 작게 보면 모든 생명체들의 살림살이다. 이 모든 것들이 본디 하나로 한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늘 있는 그대로 ‘있다시 온’의 삶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欲望:ᄒᆞ고ᄌᆞᆸ)이 이 한꼴의 삶을 죽이고 있다.

‘ᄆᆞᆷ’은 하늘에 속한 마음이니, 참 그대로 온 맨 첨 씨알이다.
‘맘’은 세상에 속한 마음이니, 닦고 깨달아 본디 ‘ᄆᆞᆷ’ 그대로를 되찾는다.
오롯한 ‘ᄆᆞᆷ’ 씨알을 나날이 깨야 ‘제나’가 죽고 ‘참나’로 산다.

사람들은 본디 그대로 온 ‘참꼴’을 잃고 산다. 다석은 “내 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알인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 것”이라 했다. 하나 그대로 온 ‘참꼴의 씨알’(獨生子)을 믿고 밑을 터 저 스스로 ‘ᄆᆞᆷ’을 깨야 한다. 그이가 바로 ‘얼나’다. 하늘땅에 죽음이 없듯이 ‘참꼴’도 죽음이 없다. 사람들이 ‘ᄆᆞᆷ’을 잃고 ‘맘’으로 사니 죽음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제 잇속만 차리는 ‘제나’에 매여 사는 까닭이다.

“하느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가 죽어 하느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들리고, 알음알이가 뚫려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있다시 온’이가 참 그대로 ‘없’에 돌아가는 걸 ‘옛다시 가온’이라 한다. 참 그대로 오신 ‘있다시 온’에 참 그대로 돌아간 ‘옛다시 가온’으로 늘 없이 있어야 하리라. 그래야 없이 있는 ‘참나’에 빛이 솟고 힘이 나고 숨이 돌지 않겠는가. ‘참나’는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늘 그 자리다. 늘 그대로다.

“나는 모든 것들 위에 비치는 빛이다. 나는 모든 것이다. 나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고 모든 것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무토막을 쪼개 보라. 내가 그곳에 있다. 돌을 들추어 보라. 그러면 그곳에서 너희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오쇼․류시화 옮김, 『도마 복음 강의』(청아출판사, 2008), 592쪽. 예수의 열다섯 번째 말씀이다.]

“본래 없는 이것을 있다고 하고 싶다. 본래 없는 것만이 참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래 없는 것이 바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ᄆᆞᆷ’은 하늘땅 기윽니은(ㄱㄴ)이 돌아가는 미음(ㅁ) 두 개가 위아래로 있다. 그 사이에 하늘아가 콕 박혀서 산알(生靈)을 돌린다. 크게 숨 돌리는 그 자리. 바로 그것이 ᄒᆞᄂᆞᆯ님의 씨알이요, 홀로 난 ‘참나’다. 하늘 씨알이 나날로 솟나야 한다.

 

그림6) 하늘아(⋅)는 숨 쉬는 몯돌 지구(地球)를 닮았다. 지구는 모든 것이다. 속에 뜨거운 불숨을 돌리며 태양을 쫓는다. 몯돌에 곰팡이처럼 살아가는 나는 생각 하나로 전 우주를 품는다. 빈탕의 마음을 가진 까닭이다. 그렇게 없이 있는 존재로 살아야 참삶이 넉넉하다.

‘옳․올’을 타고 홀로 ‘왼짓’을 펼쳐야 한다. 그래야 가온이 열린다.

다석은 “어쩐지 나는 수십 년 전부터 마음을 허공 같다고 생각한다. 허공은 저 위에 있는 것인데 맘을 비우면 허공과 같을 것이다. 우리 맘을 비우면 하느님 나라도 들어온다.”라고 했다. ‘맘’을 ‘ᄆᆞᆷ’으로 비우는 것이 ‘맘 닦음’이다. ‘ᄆᆞᆷ’에 빈탕(虛空)의 하느님 나라가 들어온 것이 ‘ᄆᆞᆷ’이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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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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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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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노빈 지음, 『신생철학』, 제일문화사, 1974(증보판은 학민사에서 2003년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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