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⑧] 시읏(ㅅ), 뚝 떠 솟구치다
“그믐이나 초하룻날 밤에는 하늘에 그득한 밝은 별들을 볼 수 있다. 그때 우리 눈은 가까운 데서는 볼 것이 없다. 멀리 내다보는 우리 맘에는 어떤 정신의 빛이 별빛처럼 쏟아져온다. 그것이 진리의 얼이다. 석가가 샛별을 보고 진리를 깨달은 것이 그래서다.”
“제 속에서 우러나와야 된다. 제 바탈이거니 하고 걸어간다. 시켜서 되는 것 같으면 벌써 다 되었을 것이다. 5천년을 해도 안된 것은 제 속에서 우러나온게 아니고 시켰기 때문이다."
『다석어록』에서
시읏(ㅅ)은 싹이 움터 ‘세웃’으로 자라 솟았으니 그야말로 솟아 오르는 ‘↑’꼴로 ‘ㅅ’이다. 다석 류영모는 곧잘 시읏을 사람에 빗대었고, 때때로 ‘솟구침’의 뜻으로 썼다. 예컨대 ‘긋’을 풀어 말하는 그이의 말에서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다. 앞글에서 “‘긋’자의 가로 그은 막대기(ㅡ)는 세상이다. 가로막대기 밑의 시옷(ㅅ)은 사람이다. 가로막대기 위의 기윽(ㄱ)은 하늘에서 온 얼인데 그 얼이 땅에 부딪혀 생긴 것이 사람이다.”라고 했잖은가.
시읏을 생각할 때는 ㅅ(솟음), ㅈ(자람), ㅊ(치솟음)으로 떠올리면 된다. 솟고(ㅅ), 자라고(ㅈ), 치솟는(ㅊ) 생명이다. 치솟아야 무르익는다. 사람도 무르익어야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된다. 잘 익은 열매로 떨어지는 자리에 뚝 떠 솟구치는 얼빛이다. 이렇듯 우리말과 글로 하는 알맞이 철학은 이미 그것으로 크게 깨우치는 ‘얼덜’(恍惚)이다.
학산 이정호는, 시읏이라는 글꼴 ‘ㅅ’을 보면 마치 사람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까닭은 잘몬(萬物)이 다 열매 맺어 제 올바른 모습을 드러내는 가을 같기 때문이다. 가을은 흠 없이 무르익고 흠 없이 길을 이루고 또 참 뜻을 깨닫는 때가 아닌가. 사람도 그렇다. 늘 헤아려 생각하면서 올바르고 똑바르게 살려 하는 것이 바로 두 다리로 서 있는 시읏이니까. 머리를 위로 두고 두 발을 땅에 디뎌 똑 바로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말의 ‘스(立)’가 한자의 ‘츠(立)’과 같이 땅 위에 똑바로 서 있는 꼴(形狀)을 그린 것도 재미있다고 했다.
학산이 『훈민정음의 구조원리』에 밝힌 ‘역학적 의의(意義)’를 보도록 하자. “제자해(制字解)에 ‘이(齒)는 굳고 끊으니 오행(五行)의 금(金)이라. 소리가 부서져서 단련(鍛鍊)되는 것과 같다’하고, 이어서 시절로는 가을이요, 방위(方位)로는 서(西)요, 오성(五聲)으로는 상조(商調)에 해당한다. 여기서 ㅅ의 자형을 살펴보면 마치 사람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 같은 상(象)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란, 만물이 다 결실(結實)하며 제 올바른 모습을 들어내어 완전히 성숙하고 완전히 성도(成道)하는 가을과 같은 존재임을 말하여 주는 동시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 같이 아무렇게나 생각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악조(樂調)의 ‘상(商)’과 같이 상량(商量)하고 사유하여 올바르고 견고(堅固) 완실(完實)하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사람이 나면서부터 곧으니’ 머리를 위로 두고 두 발을 땅에 디뎌 90°로 직립하여 정천입지(頂天立地), ‘머리는 곧아야 하고 발은 무거워야 함’으로써 위로는 천시(天時)를 본받고 아래로는 수토(水土)를 따르는 온전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동시에, 이와 같이 함으로써 만이 인간의 존엄성과 고유한 인권과 완전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말의 스(立)가 한자의 츠(立)과 같이 땅 위에 똑바로 서 있는 형상을 그린 것도 재미있거니와 사람 삶 숨(息) 새(新) 싹(芽) 씨(仁․核) 솟는다(涌) 싱싱하다 씩씩하다 등의 말이 다 ㅅ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 ㅅ이 가을 쇠 사람과 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릇 생명적이고 발자(潑刺)하며 약동적(躍動的)인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아울러 짐직하게 한다.”라고 했다.
산알의 씨, 새숨의 삶
다석 류영모는 “몬(物) 자체는 청(淸) 부정(不淨)이 없다.”라고 하면서 “몬은 몬대로 절로 되고 놔두어야 한다.”고 되짚었다. ‘몬’은 있는 그대로의 ‘맨몸’일 따름이다. 맨몸에 든 바탈(本性)의 씨가 ‘앗’으로 깨질 때 ‘비’(虛)가 텅 열린다. 그 순간 정신의 빛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린다. 샛별 하나가 오롯하다. 이마에 한 눈이 크게 밝다.
본디 반짝반짝하는 산숨(生氣)의 텅 빈 비(虛)가 씨앗의 ‘앗숨’을 터 맨몸으로 있는 몬(物)에 샛별로 뜰 때 제5의 장소인 ‘ᄆᆞᆷ’이 화들짝 불숨을 돌리며 돌아간다. 맨몸이 산몸으로 들썩인다. 사이사이 ‘참알’(眞理)이 빛난다. 다석은 “우리의 느낌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면서 “뜻알, 몸알, 두레알, 나라알, 누리알, 빔알, 참알.”로 넓히면서 밝힌다. 이때 ‘알’은 앎(知)이 아니다. 알아차림(識)의 ‘알’이다. 덧붙여 그이는 “진리의식을 받아서 여느 사람(凡人)에서 전체 의식을 지닌 그리스도나 부처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도끼를 훅 던진다. 한마디로 ‘참알’(眞理)을 깨는 ‘산알’(生靈)을 받으란다. 다석의 ‘받음’은 수운의 ‘모심’과 다르지 않다. 받고 모시는 일은 ‘밖’(外)이 아니라 ‘않’(內:心)이다. ‘안’에 하늘 숨 ‘히읗’(ㅎ)을 튼 ‘않’. 예부터 ‘안’은 히읗을 끝소리로 가진 ‘않’이었다(히읗終聲體言).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덴버그는 『정겨운 장소에 머물고 싶어라』(1989)에서 ‘정겨운 장소(The Great Good Place)’란 제3의 장소라고 말했다. 거주하는 가정(제1의 장소)과 노동하는 직장(제2의 장소) 다음으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공동체 장소, 아무런 형식이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 바로 그곳이 제3의 장소인 정겨운 장소다. 올덴버그는 또 이렇게도 덧붙인다.
“제3의 장소는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집처럼 편안한 비공식적 공공장소이다. … 사람들과의 관계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곳,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의 중심을 탐색할 수 있는 곳, 영혼의 메시지를 느긋하게 받을 수 잇는 곳이다.”
제4의 장소를 수도원․성당․교회․절(寺刹)․교당(敎堂)이라고 생각해 보면, 제5의 장소는 마음에 저절로 샛별이 뜨고 우주 은하가 텅 비어 가득가득 반짝이며 돌아가는 ‘ᄆᆞᆷ’이다. ‘참알’의 ‘ᄆᆞᆷ’. 다석이 ‘웋로부터’ 온다고 되짚어준 ‘참알’의 빈 터요, 한가득으로 가없이 밑없이 하나를 이루는 ‘ᄒᆞᆫ’이기도 하다. 빛살의 소용돌이인 볼텍스 미음(ㅁ)이 위아래 한꼴로 돌아가는 한 가운데에 하늘 숨(․)을 쉬는 자리다. 얼에 ‘밝’이 내고, 맘에 ‘응’이 낳고, 몸에 ‘흥’이 돋는 자리다. 땅하늘이 휘돌아가는 신명(神明)이요, 땅하늘이 느끼어 꿰뚫는 감응(感應)이요, 땅하늘이 끝없이 움직이는 감흥(感興)이다. 몸한울 깊고 깊은 자리에, 맘가없이 열리니, 얼솟구쳐 오른다.
“우리 몸은 신이 머무는 성전이다.”
“하늘로 둔 머리요 땅을 딛고 선 발이다. 여기 이 내가 섰지만 이 선자리가 기가 막히게 묘한 자리다. 머리를 번쩍 들고 이 두 발로 곧이서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이 두 발로 딱 서서 염불하면 성불(成佛)할 것이다.”
-『다석어록』
모심이 솟는 곳, 저절로 거듭남이 일어나는 곳, 깊고 고요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는 곳, 두루 고루 온새미로 살아나는 곳, 얼나로 솟나고, 참나로 솟나고 거듭거듭 솟나서 ‘없’(無) 하나로 돌아가는 ‘있’(有)이 춤추는 곳, 그 ‘있있’(存在)이 그저 맨몸일 따름인 곳, 그곳이 제5의 장소다. ‘몸’에서 땅(ㅡ)을 쏙 빼버린 자리에 ‘ᄆᆞᆷ’이 난다. 그러니 붙닫힌 ‘몸’을 확 열어 제껴야 한다.
출생입사(出生入死)랬다.
나야 살지 들면 죽는다 ; 나날 솟나야 춤추지 기어들면 고꾸라진다!
숨 돌리는 ‘낮힘’에 땅너울
다석은 늘 한글로 알맞이 철학을 닦아 나갔다. 알음앓이하며 알음알이를 깨우쳐 간 날들은 홀로 나날 내고, 홀로 나날 낳고, 홀로 나날 돋는 ‘오늘살이’였다. 두루두루 몸 내니 몸이 성하고, 고루고루 맘 낳으니 맘 놓였다. 그 자리에 얼빛이 솟았다. 바탈태우다. 하늘로부터 받은 바탕(本性:天性)이 타오른다. 해맞이에 달맞이로 알맞이하는 배움이 시나브로 여물고 야물어가면서 야묾(妙)의 바탕을 내보인다. 맞둘 맞춤으로 맞이하는 벼락번개 사이에 없이 돌아가는 ‘늘’이 새나니 삶이 따로 없다. 사이사이사이가 오롯이 늘인 ‘늘살이’다. 이를만한 이름으로 솟은 ‘나날’에 그저 하나 둘 셋이다. 내고 낳고 돋는 나날이니 날마다 서슬 푸른 ‘참나’다. 나날 없이는 ‘참나’가 솟지 못하리라.
올은 사람사람사람이 늘 땅하늘 하나로 돌려 돌아가는 마음 바탕에 하루하루 용오름 타고 오르내리는 춤이다. 눈 감은 몸에 눈 뜬 맘이 오르내린다. 뜬 맘이 감은 몸을 휘감아 ‘밝’을 틔운다. 맘에 든 들숨으로 맨 아랫자리 터의 ‘깊힘’ 속 맑은 하늘을 돌리고, 맘에 난 날숨으로 아주 높높은 ‘낮힘’을 든든히 가라앉혀 땅하늘을 꼬아 돌리는 ‘가온찍기’다. ‘깊힘’ 자리에 ‘낮힘’이 휘돌고, ‘낮힘’ 자리에 ‘깊힘’이 휘돌아가는 자리다. 숨 돌리는 ‘멈숨’이다. 용오름 큰바람(颱風) 가운데의 고요한 눈, 그 큰 ‘숨돌’(氣運)이다.
깊게 숨 지그시 밟는 ‘깊힘’에 두 발이 하늘너울이요, 어우렁더우렁 더덩실 숨 돌리는 ‘낮힘’에 어깨 들썩이는 땅너울이다. 너울너울 더덩실 두둥실 추어 추는 걸음걸음이다. 더덩실에 세움이 솟아 ‘세큰긋’(三太極) 드러남이요, 두둥실에 시방세계 열리는 ‘가온뚫림’(弓弓乙乙) 솟남이다. 오호라, ‘숨돌’ 동그란 마당에 뚝 떠 솟구친 얼이다!
숨에는 여섯 큰 ‘숨돌림’(氣運)이 있다. 첫째는 몸숨(身氣)이요, 둘째는 맘숨(心氣)이요, 셋째는 빛숨(靈氣)이요, 넷째는 시킴숨(命氣)이요, 다섯째는 바탈숨(性氣)이요, 여섯째는 알짬숨(精氣)이다.
첫째 숨에서 셋째 숨은 등줄기를 타고 시원하게 물오르는 싱싱한 물오름 숨이다. 검룡소 샘물이 졸졸졸 흘러서 계곡이 되고 내가 되고 강이 되듯이 오르는 물줄기다. 물숨이 굽이쳐 오를 때마다 시냇물이 내를 이루며 큰 강이 되고 점점 더 크고 넓고 장대하게 흘러 오른다. 크고 큰 강물이 백두산 폭포수로 솟구쳐 올라 천지연을 이루듯, 바이칼 호수를 이루듯, 태평양을 이루듯, 은하수를 이루듯 골밑샘((腦下垂體)을 채울 때는 둘레 없이 큰 우주다. 골밑샘은 솔방울샘(松果體)과 어울리며 온 우주의 온통이 되어 솟구친다. 정수리 숫구멍을 뚫고 끝 간 데 없이 치솟는다.
넷째 숨에서 여섯째 숨은 앞이마를 타고 콧구멍으로 들어가 목구멍, 가슴, 그리고 오장육부를 거쳐 배꼽에 이른 뒤, 단전에 가 ‘불숨’의 덩어리가 되는 불내림의 숨이다. 빛숨이 치솟아 하늘 시킴숨으로 은하를 이루며 내릴 때는 헤아릴 수 없는 별무리 빛무리로 쏟아져 내린다. 온 우주의 빛숨을 콧구멍으로 크게 들이쉬어 모시는 일은 아주 기쁨에 찬 일이다. 두 콧구멍으로 들어간 빛숨이 목구멍으로 내려갈 때는 회오리 바람결로 깊숙이 내린다. 가슴샘은 우주 숨바람이 휘돌아가는 밀림이다. 빽빽한 숲에 따듯한 바람이 넘실거린다. 그 바람이 콩팥위샘을 지나 배꼽에 다다를 때는 움쑥에 불쑥하고 불쑥에 움쑥하는 숨돌림이 환하다. 숨돌리는 힘 하나가 벼릿줄 내리듯 줄곧 뚫리며 단전에 가 ‘밝숨’을 돌린다.
얼이 추는 춤은 들숨날숨 사이 멈추어 선 ‘멈숨’에 조용히 솟는 늘이요, 더할 나위 없는 맨 그 자리 ‘늘’이요, 푸른 산 흐르는 ‘물’(靑山流水)이요, 나날로 여기에 여는 ‘살이’(生)니, ‘늘살이’로 솟나는 ‘해달’(日月)이요, 해달이 한 꼴로 팽이 돌리는 ‘검밝’(玄)이리라.
사람은 하나둘을 아울러 셋의 ‘세웃’으로 솟았으니, 그 바탕에 움트는 춤이 있다.
“줄곧 곧이(貞)의 정신을 가지고 입 다물고 숨을 쉬어라. 그러면 숨이 잘 쉬어진다. 먹는 것이 지나치면 식곤(食困)이 생겨서 잠이 많아지고 앉아도 바로 앉지 못한다.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숨쉴 식(息) 자는 ‘코’(鼻)에 ‘염통’(心)이 붙어 있는 글자다. 사람이 곧이 가려면 숨 쉬는 일이 왕성해야 한다. 세상모르고 잠이 들 때도 숨은 더 힘차게 쉰다. 불식(不息)은 묘한 말이다. 숨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으니 불식이다. 그런데 쉬지 않는 것이 숨이요 쉬는 것이 바로 숨이 아닌가. 건강은 식불식(息不息, 숨쉬기가 쉬지 않는 것)에 있다.”
- 『다석어록』
숨빛에 춤타는 몸
몸에 시루깃대 꽂고 굿을 지어 일으킨다. 돌무더기 오보에 버드나무 기둥을 세우니 검님이 오시리라. 기둥에 걸린 푸른빛 하닥이 하늘하늘 날린다. 바람에 날리어 나풀거린다. 시루깃대 타고 몸에 하늘이 화들짝 열린다. 몸은 떡시루요 몯돌(地球)이다. 하늘이 깊게 내리어 숨을 트리라. 땅에 하늘이 크게 열려 숨 돌리리라. ‘숨빛’이 몸에 환하리라. 이제야 ‘숨빛’이 몸을 바꾼다. 몸이 홀라당 뒤집혀 속알 낸다. 몸이 뒤바뀌는 ‘ᄆᆞᆷ’이다.
땅 아래 하늘이니 하늘을 감아 돌리는 땅이 온갖 ‘웋일름’(生命)을 내고 낸다. 뒤집힌 히응 ‘우’에 하늘 ‘ㅎ’이 위아래로 붙은 ‘웋’은 하늘 품은 땅이다. 땅이 위요, 하늘이 아래다. 몸에 ‘웋’ 씨알이 솟는 꼴이다. 빛 씨알 튼 몸은 ‘ᄆᆞᆷ’이다. ‘ᄆᆞᆷ’ 가운데에 하늘 담은 우주 우물이 솟는다. 텅 비어 돌아가는 ‘ㅁ’과 ‘ㅁ’ 사이에 하늘 숨이 박혀 있지 않은가. 그 자리가 ‘산알’이다.
땅 따로 하늘 따로, 따로따로 아니라 그냥 ‘땅하늘’(地天)이다. 땅과 하늘이 아니라 ‘땅하늘’이란 이야기다. 천지를 지천으로 돌린다! 땅하늘이 하나로 맞붙어 돌아야 ‘뒷하늘’(後天)이 벌어진다. 땅하늘이 벌어지니 우주여자 샤먼이 잠깬다. 땅하늘을 잇고 이어 오르락내리락 올 줄을 탄다. 올 가닥을 타면서 줄 가락을 부른다. 서슬 타는 ‘ᄆᆞᆷ’은 늘 불어가는 바람이다. 불어가오는 바람에 몸이 춤을 탄다. 몸에 소리가락이 터진다.
‘ᄆᆞᆷ’이 춤을 탄다.
나풀거리는 푸른 머리 하닥을 달고 쉬엄쉬엄 소리가락 타는 ‘ᄆᆞᆷ’에 손발이 수천 개다. 수천 개 손발로 추는 몸은 반짝이는 무지개 은하수다. 무지개 흘리는 사람이다. 겹겹이 무지개 산알 내는 춤꾼이다. 빛 알갱이 무지개 바다에 아른거리는 ‘흰그늘’이다. 해달별의 소용돌이에 든 ‘ᄆᆞᆷ’은 ‘때빔’(時空)을 뛰넘는다. ‘때빔’을 뛰넘어 씨알 틔우는 ‘ᄆᆞᆷ’. 그 ‘ᄆᆞᆷ’이 가없는 우주 끄트머리에 길을 낸다. 하고자 하는 마음 없는데 불현 듯 춤이 솟아 추어진다. ‘환빛’ 솟은 마음이 어수룩한 몸을 들썩인다. ‘몸’이 온통 ‘ᄆᆞᆷ’으로 열려서 놀놀이 번진다. 놀놀 놀놀이 놀놀이 놀아 놀면서 해돋이에 해넘이가 한가지로 돌아가고 저녁놀에 아침놀이 한가지로 돌아간다. 잦게 몰아가듯 자진모리 돌리니 중중모리로 넘어가면서 ‘몸’에 박힌 몯돌(地球)이 쑤욱 빠진다. 그 자리에 하늘 숨이 훅 돌아간다.
다시, ‘ᄆᆞᆷ’이다.
땅을 슬쩍 빼니 ‘ᄆᆞᆷ’이 되는 것이다. 휘리릭 바꾸는 둔갑술(遁甲術)이요, 거듭남이요, 하늘 모심이다. 땅하늘이 휘돌아 가오는 그 ‘가온꼭지’에 하늘 숨 하나 산다. 그 숨 하나가 ‘비롯’을 내리라. ‘처음’을 낳으리라. 그러므로 ‘ᄆᆞᆷ’은 ‘비롯’을 내고 ‘처음’을 낳는 율려(律呂) 가락이리라.
하늘아 숨 돌린 ‘ᄆᆞᆷ’은 하늘 모심의 사슴샤먼이다.
하늘아 숨 돌린 ‘ᄆᆞᆷ’은 춤바람 난 얼님이요, 한얼님이다.
하늘아 숨 돌린 ‘ᄆᆞᆷ’은 빈탕한데 맞추어 놀놀이 놀아 노는 숨님이다.
하늘아 숨 돌린 ‘ᄆᆞᆷ’은 뒤바꾸는 몸에서 일렁이는 윤슬이다.
하늘아 숨 돌린 ‘ᄆᆞᆷ’은 세 가닥의 줄을 타는 올틀이다.
올은 땅하늘 잇는 얼의 탯줄이다. 신바람 말숨 줄이다. ᄒᆞᄂᆞᆯ님이 나를 내어줄 때 붙잡고 오르라고 쥐어 준 올바로 ‘바른길’(道理)이다. 길을 몸에 닦아야 몸이 땅하늘로 숨 돌리듯이, 춤을 몸에 닦아야 ‘없이 계시는 숨님’이 저절로 나 돌린다. 춤이 몸에 들어 더덩실 솟는다. 스스로 솟아 저절로 돌아가는 몸은 이제 ‘ᄆᆞᆷ’으로 하나다. 하나에 걸음걸음 나아가는 둘셋이다. 길나니 하나요, 하나나니 둘이요 셋이다.
‘ᄆᆞᆷ’에 길이다.
말머리 화두로 세운 ‘올틀’은 올의 틀이다. 올의 얼개다. 앞으로 써 나갈 글의 온통이다. 글로 그물을 짜서 그 사이사이에 열린 그물코를 새기는 글이다. 그물코 자리마다 땅하늘이 돌아가는 ‘얼숨’(靈氣)이 솟으리라. 얼숨이 솟아야 다 안녕하다. 얼숨이 돌아야 다 넉넉하다. 그치지 않아야 다 훌훌하다. 얼숨이 안녕하고 얼숨이 넉넉하고 얼숨이 훌훌하니, 춤은 스스로 내고 스스로 낳고 스스로 돋으리라. 저절로 그러하리라. 숨과 나, 춤과 나, 빛과 나, 하늘과 나, 땅과 나, 가락과 나, 놂과 나는 하나다. 나는 숨이요, 나는 춤이요, 나는 빛이요, 나는 땅이요, 나는 하늘이요, 나는 가락이요, 나는 놀이다. 나날 ‘솟나’에 춤이다. 참이다. 하나다. 온통이다. 하나로 쉬지 않고 하시니 그 하나를 일러 ‘하실’이라 한다.
목숨은 생명(生命)이다. 생명은 바꾸어 말하면 ‘산일름’이요, ‘웋일름’이다. 날 때부터 하늘이 일러 준 ‘일름(命)’이 이어져 있잖은가. 그것이 또한 올이다. 올 줄이다. ‘숨줄’이다. 올은 ‘올바로’의 올이다. 곧고 바르게요, 제대로다. 그런 뜻이다. 이때 ‘곧고’는 쭉 뻗은 대쪽이 아니다. 산나무 속 빈탕이다. 가득 찬 숨이요, 번쩍이는 빛이요, 내는 힘이다.
산알 숨, 번쩍 빛, 내는 힘에 춤이 일렁인다.
숨 쉬는 사이사이에 ‘빛․힘’이 ‘웋일름’을 키운다.
사르는 춤, 사름 없이 추는 춤
산나무는 노자가 말했듯이 구부려서 성하고 굽혀서 곧고 움푹해서 차고 묵어서 새롭고 적어서 얻고 많아서 흘린다. 땅하늘이 올 하나로 돌아가는 저절로의 빛이요 힘이다. 하늘아(․), 그것을 ‘숨줄’이라 하고 ‘얼줄’이라 하고 ‘웋일름’이라 한다. 산나무 자라는 품새에 너울거리는 춤이 있다. 산사람도 숨 쉬는 사이에 ‘빛․힘’이 얼을 키운다. 숨 사이사이사이에 길을 내는 ‘ᄆᆞᆷ’은, 아, ‘ᄆᆞᆷ’은 늘 부들무릇하다.
부들무릇함이 올이다.
올은 산알이다.
살아있는 얼의 씨알이다.
글로 말을 튼다. 글로 울리는 소용돌이 말이니 그 소리울림에 들어가 몸을 들깨워야 하리라. 뒤흔들려야 하리라. 그래야 몸이 ‘ᄆᆞᆷ’으로 가락을 타면서 춤을 내리라. 안에, 없이 계시는 우주여자. 여신이 깨어나리라.
‘ᄉᆞᄅᆞᆷ’은 ‘사람’으로 ‘사름’의 뜻이다. 그리 본다. 몸은 거룩한 불의 심지다. 불꽃을 다 살라야 ‘없’에 든다. 사람은 몸 사름으로 ‘얼빛’을 크게 피워 올려야 ‘ᄆᆞᆷ’ 열린 참나(眞我)가 된다. 그가 얼나(靈我)다. ‘불숨’이 솟는 ‘ᄆᆞᆷ’에 맑고 시원한 가락이 울린다. 율려(律呂)가 아닌가! 바로 부처가 아닌가! 활활 춤추는 부처는 침향무(沈香舞)다!
정호완은 『우리말의 상상력』(정신세계사, 1991)에서 “중세어 자료를 보면 ‘ᄉᆞᆯ다(燒;《원각》상2-1:48)’가 확인되는데 ‘살아가다’의 뜻을 드러내는 ‘살다(生:《석보》10-3)’와 같은 낱말겨레에 넣을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사람’도 ‘ᄉᆞᆯ다/살다’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표기적인 변이형태로 보이는 말은 ‘사ᄅᆞᆷ(《석보》6-5), 싸ᄅᆞᆷ(《석보》19-5), 사름(《정속》1)’ 등이 있는데, ‘사ᄅᆞᆷ’이 그 중심을 이룬다. 결국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인데, 어찌 사람만이 살아가는 존재이겠는가.”(227쪽)라고 물으면서 “‘ᄉᆞᆯ~살’은 표기적인 변이형태로, 점차 다른 뜻으로 분화되어 쓰이기는 했지만 이들 모두는 ‘불사람’이라는 같은 속성을 드러내는 말들이다. 한마디로 ‘살’은 연소현상 곧 음식을 먹고 마신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이요 ‘사르다/살다’는 그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228~229쪽)라고 말했다.
불은 타오르는 불숨(神明)으로 ‘밝(明)’이요, 집집 우주에 빛나는 ‘ᄇᆞᆰ’(星)이니 까마득한 ‘감ᄋᆞ(玄)’요, 가마득하고 까마득하게 돌아가는 우주 소용돌이로 ‘돌(門)’이요, 그 우주 돌에 거룩한 골짜기가 있어 ‘골검(谷神)’이라. 골은 ‘ᄀᆞᆯ’에서 왔으니 길(道)이요, 검은 ‘ᄀᆞᆷ’에서 왔으니 곰(熊)이라. 곰은 빛나는 여신(熊女), 곧 등걸(檀君)의 어머니시다. 검님이 ‘흰그늘’의 춤을 몸에 익혀 닦으니 ᄒᆞᆫᄋᆞ로 뒤바뀌어 등걸을 낳으셨다. 나나(私私)에 ‘나없(無我)’으로 휘돌아 솟구쳐 ‘ᄎᆞᆷ’ 하나 이룬 ᄒᆞᆫᄋᆞ님이라.
밝(明)감ᄋᆞ(玄)돌(門)골검(谷神)길(道)곰(熊)여신(熊女)나없(無我)춤(舞)ᄎᆞᆷ(眞)ᄒᆞᆫᄋᆞ(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돌아 오르는 ‘숨빛’ 춤이다. 춤을 몸에 닦아 추어야 ‘ᄉᆞᄅᆞᆷ’의 숨이 환하게 빛을 틔워 올린다. 춤은 사름이다. 몸 사름이요, 맘 사름이요, 얼 사름이다. 사름으로 추는 춤이 ‘ᄎᆞᆷ’이다. 사름 없이 추는 춤은 땅하늘(地天)을 잇지 못한다.
하루하루 나날로 ‘몸성히’ 지내야 한다. 하지만 그 몸에 사로잡혀 자꾸만 ‘하고픔(欲望)’을 덧씌우면 답이 없다. 몸 살리는 밥은 산제사 올리는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다. 밥이 몸 사름의 불씨다. 그 불씨로 몸 살라 맘을 밝히고 얼을 키운다. 몸이 성하니 마음이 놓여 ‘맘놓이’에 이른다. 땅하늘 사이․새에 사람이 있다. 사이․새에 빛이다. 사람은 사이․새에 ‘밝’을 틔운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사람은 땅하늘을 잇는 ‘사이있’이다. 사람은 사름으로 ‘바탈태우’할 때 ‘사이있’의 존재로 곧이 설 수 있다. 곧이는 ‘고디(貞)’로 올바른 참나다. ‘바탈태우’는 ‘바탈’을 태우는 것인데, 그것은 ‘받할’로 ‘하늘일름(天命)’을 받아서 한다는 뜻이다. 하늘의 ‘일름(命)’을 받은 것이 ‘본성(本性)’이다. 그러니 본성을 ‘바탈’이라 하는 것이다. 바탈을 혼불처럼 살라야 한다. 얼빛 사르는 ‘바탈태우’로 산 우주의 은하가 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우리 몸은 신이 머무는 성전이다. 성전에 드리는 제사가 바로 밥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밥 먹는 일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의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예배드리는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다.”
-『다석어록』
몸성히 : 몸이 성해야 올이 바르다.
맘놓이 : 맘이 놓여야 올이 바르다.
바탈태우 : 몸맘이 ‘뫔’으로 올발라야 바탈태우 얼빛이 환하다.
몸․맘․얼 ‘닦아감(修行)’을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라 한다. ‘맘얼’(心靈)이 담긴 몸이 성해야 ‘맘얼’이 든든하고 튼튼하다. 스스로 가르쳐 익히는 ‘몸성히’는 가온찍기로 해야 한다. ‘없극(無極)’에 ‘큰극(太極)’이 움 솟아 ‘세큰극(三太極)’ 돌리는 ‘숨짓’이 춤의 비롯을 내는 한바탕이요, 가온찍기(ᄀᆞᆫ)다. 땅(ㄴ) 익힘, 가운데(․) 익힘, 하늘(ㄱ) 익힘이다. 세 익힘이 딱 맞아 돌아야 몸이 ‘ᄆᆞᆷ’으로 ‘고름(造化)’을 이룬다. 성하니 ‘ᄎᆞᆷ’ 하나다. 춤이 저절로 솟는다.
ᄒᆞᄂᆞᆯ님을 모시니 올발라졌다!
이른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다!
저 스스로 가르쳐 익히는 ‘맘놓이’도 가온찍기로 해야 한다. 몸이 고루 성하고, 마음이 놓일 때 비로소 ‘바탈태우’가 환하게 넓고 깊어진다. ‘바탈태우’는 사람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本性)에 불꽃을 피우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하늘로부터 뜻을 받아 태어났다. 그래서 그것을 ‘하늘일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일름’을 바로 알아야 올발라지고 깨달아진다. 깨달아야 참나다. 생각의 불꽃을 늘 틔우고 다 살라야 텅 비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탈태우’의 뜻이다. 텅 빈 자리에 솟은 ‘나없(無我)’ 보는 것을 불교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한다.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땅하늘 씨알 그대로의 타고난 마음씨다.
큰이(大人)는 저 스스로를 가르쳐 익히는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로 오늘살이 살았다. 늘 오늘로 닦아 나갔다. 오늘이 늘이니 ‘늘살이’로 ‘말숨’ 사뢰면서 스스로를 사르고 또 살랐다. 말씀 올리는 생각 불꽃을 마음씨에 붙이고 하루를 온통으로 살았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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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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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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