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⑦] 비읍(ㅂ), 바닥에 비롯하는 하늘

2025-07-07     김종길 다석연구자

“빛과 빚과 빗은 다같은 말이며, 다 다른 말이다. 빛에서 빚이 나오고 빚에서 빗이 나온다. 빗이 있는데 빚을 덜게 되고 빚을 덜게 될 때 빛이 비친다.”

“믿(信)이라는 말은 밀(推)다는 말이 믿이 되었다. 밀어나간다는 것은 밀어 올린다는 뜻으로 추리라는 말이 있다. 생각을 민다(推)는 것으로 믿(信)이라는 말은 모시고 밀어 위로 들어간다는 말로 밀어서 터지도록 하라는 것이 믿(信)이다.”
『다석어록』에서

이 글은 여섯 번째 글월에 덧붙이는 뱀발(蛇足)이다. ‘뱀발’의 첫소리가 비읍(ㅂ)이듯이 미음(ㅁ) 못지 않게 흥미로운 것이 비읍(ㅂ)이다. 미음(ㅁ)은 다섯 숨길(五行)의 가운데인 흙(土)이다. 피읖(ㅍ)은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피어내는 두루두루요, 비읍(ㅂ)은 위아래를 뚫어 벌려내는 시방(十方)의 완성이다.

미음(ㅁ)을 밀어 올리면 무엇이 될까? 비읍(ㅂ)이다. 학산 이정호는 『훈민정음의 구조원리』에 비읍(ㅂ)을 이렇게 풀었다. 그러니까 “역(易)의 수괘(需卦)에 ‘마시고 먹고 잔치하여 즐긴다’고 한 것이 평화와 행복의 상징인 ㅁ이라면, 송괘(訟卦)나 사괘(師卦)의 ‘진실로 숨막힐 듯 하며 걱정스러운 것’과 ‘이것으로 천하를 해독(害毒)한다’고 한 것은 엄격(嚴格)과 감투(敢鬪)의 상징인 ㅂ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말의 밥, 범벅, 버버리다(訥), 벌인다(展․張)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 ㅂ으로 시작되는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리말 ‘범벅’은 혼돈(混沌)의 뜻이요, 카오스(chaos)의 뜻이다.

학산이 말한 수괘(需卦)는 하늘에 구름이 오르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감괘(坎卦:물)와 건괘(乾卦:하늘)가 거듭된 것이다. 또 송괘(訟卦)는 하늘과 물이 어긋나서 행하는 것이다. 이때는 건괘(乾卦)와 감괘(坎卦)가 거듭된 것이다. 수괘는 감괘가 먼저요, 송괘는 건괘가 먼저다. 그리고 사괘(師卦)는 땅속에 물이 있음을 상징한다. 사괘는 곤괘(坤卦)과 감괘(坎卦)가 거듭된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앞 글에서 살폈듯이 미음(ㅁ)이 ‘맨(弓弓:太極)’이라면 비읍(ㅂ)은 비로소 짓고 일어나는 바탕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다석 류영모는 그 바탕을 ‘빈탕한데’라고 말했다. “빈탕한데는 장자나 석가가 얘기하였는데 이것이 이단시되고 빈탕한데가 옳게 이해되지 않아 말한 그대로의 세상이 되지 않았다. 쓸데 있는 것만 찾는 사람에게는 ‘빈탕한데’가 쓸데가 없다고 하겠지만 쓸데 있고 없고는 하늘나라에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미음(ㅁ)을 처음이 비롯하는 ‘맨’이라고 했다. 그 ‘맨’에 무엇이 있을까? 다석은 “맨 처음엔 없이 있었을 것 같다. ‘없’하면 참으로 엄숙한 것이다. ‘없’은 ‘나도 안다’하고 지내버릴 수 없다.”라고 말한다. 바로 그 없이 있는 ‘맨’이 참나의 마음인 ‘ᄆᆞᆷ’이다. 몸에서 땅(ㅡ)이 쏙 빠진 글씨가 ‘ᄆᆞᆷ’이다. 땅은 몬(物)이다. 땅에 갇힌 몬이면 답이 없다. 지구(地球)라는 땅구슬 몯돌 한 가운데에 불숨(Inner core)이 돌아가듯이, 사람도 오롯한 맘(唯心)을 돌려야 한다. 모든 ‘있’(有)의 실재는 다 없이 있는 ‘맘’(心)에서 비롯(始)하므로.

 

그림1) 『역해종경사부합편 전』의 「삼일신고(三一神誥)」 ‘세계훈도’(世界訓圖)이다. ‘세계훈’의 말씀은 이렇다. “너희는 즘뿍(森) 벌린 저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둠과 괴롭고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라. 한얼께서 뭇 누리를 만드시고. 또 해 누리 맡은이를 시키어 칠백 누리를 거나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듯하나, 한 묵철(丸)만한 누리니라. ‘땅속불’이 울리어서, 바다가 변하고 뭍에도 옮아서, 이에 보이는 허울을 이루었다. 한얼께서 김(氣)을 불어 밑까지 싸시고, 해의 빛과 더움으로 쫗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헴하고 시므는 물건들이 많이 뿌렀나니라.”

그래서 다석은 “나라면 맘(唯心)이다. 맘에서 생각이 나오고 말씀이 나온다. 이게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크신 한아님이 계시는데 그게 내 맘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다. 이것을 가지고 ‘한아님의 씨’라, ‘부처님의 씨’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 석가도 나도 바보도 다 똑같다. 이것으로 가면 나도 한 동그라미에 간다. 여기야말로 평등하다. 한 동그라미 테 밖으로 나가면 못쓴다.”라고 한 것이다. 한 동그라미는 밑도 없고 끝도 없다. 가없이 큰 ‘맨’이 한 동그라미다. 그리고 그 가없이 큰 맨의 한 가운데에 바탈(天性)이 있다. 맘을 다한 자리에 한아님․부처님의 ‘씨(種)’가 있는 것이다.

“맘을 다하면 바탈을 알고 하늘을 안다. 맘을 꼭꼭 잡아서 그 바탈을 기름이 하늘 섬김이다.”  - 다석어록

그러니 앞 글에서 말했듯이 “ㅂ이 ㅁ을 위로 벌려내어 전개(展開) 개장(開張)의 뜻을 나타냄과 같이, ㅍ은 ㅁ을 좌우로 피어내어 발전(發展) 발산(發散)의 뜻을 표시한다.”고 힘주어 말한 것도 꼭 되새겨 둘 필요가 있다. 미음(ㅁ)에 ‘맘’이 있고, ‘ᄆᆞᆷ’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석이 ‘나라면 맘(唯心)이다.’라고 생각한 까닭이기도 하고.

비에 씨요, 몬이다

민세 안재홍 선생은 논문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의 제2장 “조선 정치철학과 신민족주의”에서 “조선의 선민이 맨 처음에 발견한 세계관적 철리(哲理)는 ‘비’요, ‘씨’요, ‘몬’의 그것이었다.”라고 꿰뚫었다. 이미 첫 글에 맛보기로 던졌었다. 이번엔 더 촘촘히 살펴보자.

“‘비’는 허공(虛空)이니, 우주만유(宇宙萬有)가 허공(虛空)에서 생성하고 출발한 것임을 규정함이다. 만유(萬有)의 원시(元始)가 ‘비로소’이니, 허공본무(虛空本無)에서 만유(萬有)가 출발하였음을 명징함이요, ‘빌미’ ․ ‘빌으집음’ 등이 다 그를 보임이다. 광명(光明)이 ‘비’에서 일며 통하고, 만물(萬物)이 ‘비’에서 배태(胚胎)되고 생장(生長)하나니, 광선(光線)의 ‘빛’ 및 ‘볕’과, 복(腹)의 ‘배’와, 잉(孕)의 ‘배어’가, 다 그것이요, ‘불’[불․번식(繁殖)] ․ ‘벌’[발전(發展)]등이 모두 그것이다. 이에서, 광명(光明)이 ‘밝’이요 신명(神明)이 ‘밝’이요 태양(太陽)이 ‘밝’이요 해(海)가 ‘바람’이요 원야(原野)가 ‘벌’이요 머리 또 ‘박’이니, 백악(白岳)․백산(白山)의 그것이며, 성시(城市)가 ‘불’(벌)이요, 군시국가(郡市國家)로 출발한 고형태(古型態)의 국가가 ‘불’(弗․伐․火․喙)이다. 신라 시조(始祖)는 혁거세(赫居世)요 혹은 불구내(弗矩內)니, 그 의(義) ‘광명이세(光明理世)’이라, 혁거세는 ‘불거뉘’의 사독(史讀)이요 불구내(弗矩內)는 ‘붉의내’의 사음(寫音)이니, 광명인 신(神)의 치세(治世), 신대(神代) 즉 ‘붉의누리’의 표의(表義)이라, 신라가 홀로 그 문헌(文獻)을 잘 이었떤 까닭에 이 고의(古義)를 전함이요, 상대 진방제국(震方諸國)에 모두 공통된 바이다.”

‘씨’와 ‘몬’의 뜻도 이어서 가온꼭지(核心)로 짧게 보자.

 

그림2) 다석 류영모가 제자 박영호에게 보낸 편지다. 1970년 12월 18일. 제목을 소리내어 읽으면 ‘참삶’이다. 뜻을 풀어 말하면 “우리에게 가온고디가 있건 혹은 뜨건 간에 한 가온데로 한님을 모셔야 한다. 말씀의 한님을. 한님은 거기 늘 계시는 곈(바닥)으로 오르니 디디고 디뎌 가온데 ‘뎨’로 가야 하리라. 나 고디(ㅣ)로 여기를 이어이어 땅 위 위 흙바탕 돌아가는 우주에. 땅에 솟은 거룩, 땀 나도록 쥔 손을 씻고, 다 잃어 잃은 ‘잃’에 쉴 날이 있으리니, 참 위로 솟는 날이 그날이다.”라는 뜻이다.

“‘씨’는 종(種)이니 즉 종자(種子)이다. 허공(虛空)이 세계의 외연(外延)이면, 종자는 그 중핵(中核)이요 섬위(纖緯)이다. 조선 맨 처음의 역사의 출발이 아사달사회이니(阿斯達社會)이니, 아사달은 ‘아씨땋’이라. 성모산(聖母山)․신모역(神母域)이요, 성모는 존엄한 성화(聖化)된 말이나, 그 원의(原義)인즉 원모(原母)요 또 원종(原種)이니, ‘아씨’는 현대에서도 성년 여성에 대한 존칭이요, 그 적나라한 어의(語義)인즉 원본적인 종인(種人)이란 것이니[생리(生理)․지식(知識)이 유치한 고대의 소견이다], 여성의 성숙한 생식기(生殖器)가 ‘종구(種口)’의 어의(語義)인 것은 이를 입론(立論)할 바요, 선도성모(仙桃聖母)․서술신모(西述神母) 등의 고전설(古傳設)과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민속신앙의 본존(本尊)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 유음(遺音)이다.”

“‘몬’은 물질(物質)을 이름이라. 세계 생성(生成)의 호대(浩大)한 물질 방면은 ‘몬’으로써 일컬었나니, 집결(集結)이 ‘모음’ 혹 ‘모듬’이요, 물질(物質)의 부유방산(浮遊放散)되는 잔재(殘滓)는 ‘몬지’이다[지는 잔재(殘滓)요 분(糞)].”

참으로 놀라운 눈이다. 민세는 이렇듯 깊게 살피면서 “‘비’요 ‘씨’요 ‘몬’이요 하는 삼자(三者)의 외(外)에, 우주의 근원이 되고 핵심을 이루는 섭리의 힘이라고 해서, 후생(後生)한 신앙이요 철리의 주축으로 된 자 - ‘알’ 혹 ‘얼’이니, 그는 지성(知性:알)이요, 핵심(核心:알)이요, 또 정령(알․얼)이다.”라고 덧붙인다.

민세의 ‘비’ ‘씨’ ‘몬’은 순우리말로 된 알맞이 철학(哲學) 뜻말이다. 그것은 ‘비’에서 ‘씨’요, ‘씨’에서 ‘몬’으로 돌아가면서 내고 낳고 되고 이루다가, 다시 텅 빈 ‘비’로 돌아가는 생명 순환의 길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생명 순환의 섭리를 ‘알․얼’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 돌고 돌아감의 길(道)에 삶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을 터. 그런데 수운 최제우는 땅에 갇힌 몬의 ‘몸’을 활짝 열어 제꼈다. 갇힌 몸을 ‘모신 하ᄂᆞᆯ님’(侍天主)으로 다시 개벽의 새 길을 연 것이다. 새 길은 ‘비’에서 ‘씨’, ‘씨’에서 ‘몬’으로, 그러니까 ‘비-씨-몬’으로 오는 ‘몬’에 ‘씨’와 ‘비’를 한꺼번에 모시는 일을 닦았기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서 ‘몬(物=人)’이라는 ‘몸’에 하늘의 ‘씨’로 들어있는 ‘비’를 들깨운 것이다. ‘몸’에 든 하늘의 ‘씨’가 터지니 텅 빈 우주 ‘비’가 크게 열렸다. 몸이 텅 비어 우주 하늘이다. 그렇게 곧장 ‘모심’에 들었다고 해야 한다!

‘몬’은 몬지, 먼지를 뜻하는 물(物)이다. 본디 우주의 티끌인 몬은 세상 온갖 잘몬(萬物)을 이루는 산알이다. 그 산알에는 텅 빈 빈탕의 하늘로부터 온 산숨(生命)의 씨가 박혀있다. 우리는 그것을 씨앗의 ‘앗’이라 하고 또 ‘알’이라고도 한다. ‘씨앗’은 ‘씨’에 ‘앗’이라는 하늘숨(天氣)이 든 것이다. ‘몬’에 든 ‘씨’가 ‘앗’하고 터지니 ‘비로소’이다. ‘몬’에 텅 빈 빈탕의 ‘비’가 모셔진다. ‘비’는 ‘빛’이요 ‘볕’이요, ‘밝’이요, ‘바람’이요, ‘불’이라 했으니, ‘모신 하ᄂᆞᆯ님’이란 ‘몬’에 ‘비’가 솟남이요, 거듭남이요, ‘제나’가 ‘참나’로, ‘얼나’로 거듭나는 일이다. ‘참나:얼나’로 솟나는 사건은 사람이 온갖 잘몬(萬物)이요, 다 같은 하나의 산숨(生命)으로 돌아가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림3) 1571년에 새긴 목판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이다. 1395년에 처음 돌에 새겼고(태조본), 숙종 연간(17세기)에 태조본을 바탕으로 다시 새겼다. 이 지도는 ‘하늘땅이 다를 바 없다. 하늘의 섭리가 땅에 통하고, 땅의 원리가 하늘에 닿는다’는 이른바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철학이 담겨있다. 세로 140.2cm, 가로 88.8cm,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다석은 땅에 하늘이 줄곧 내려와 찍혀 솟은 ‘긋’이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긋이다. ‘이긋’은 ‘제긋’이요 ‘이제긋’이다. 이어이어 온 예 ‘긋’이다. 이것이 영원에 대하여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긋’은 하나하나이기 때문에 뭐 이러구 저러구가 없다. 모든 것이 ‘이긋’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이 많이 배워서 높고 큰 사람이 되겠다는데 무엇이 참으로 높고 큰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 참으로 크고 높으려면 한 번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여 휘감겠다는 정신으로 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의 품속에 들어가야 한다. 무한하고 영원한 곳에 ‘긋’의 끝이 하나로 꼭 찍힌다.”라고 말이다. 땅(ㅡ)에 하늘을 모시니(ㄱ) 사람이 솟구친다(ㅅ). 그런데 그 사람을 인간으로만 풀면 말짱 도루묵이다. 꽝이다. 왜냐하면 이때 사람은 온갖 잘몬(萬物)로서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온갖 생명이 곧 사람이다.

신은 바닥(賤)을 뒹굴면서 하시는 ‘하는님’이다

『신생철학』을 세운 윤노빈은 ‘시천’(侍天)을 풀어 말하기를 “‘안에 있다’(內有)는 말은 일상적 의미로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속에 ‘있다’기보다 ‘계신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속에 있는 것은 창자, 밥통, 기생충, 대소변과 같은 것들”이라 말한다. 그런 다음 뒤를 이어 ‘모심’을 이렇게 풀었다. “한울님을 속에 모셨다는 것은 자신이 한울님 속에 빠져 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한울님을 속에 모셨다는 것은 한울님을 창자 속에서 부패시켜 타락시키며 강등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울님 속에 들어가 한울님에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승은 승천 또는 등산과 같은 상향적 운동이 아니라 사방으로 퍼져감이다) … 한울님(天)은 큰 하나(大一)이지 작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말의 참뜻은 한울님이 사람을 모심이나 마찬가지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사람 속에 한울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울 속에 사람이 계신다.”

수운이 말한 ‘시자내유신령외유기화일세지인각지불이자야’(侍者內有神靈外有氣化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는 “모심은 안에 계시는 ‘검얼’이요, (그것은) 밖으로 퍼지는 ‘숨짓’이니, 한 세상 사람들이 낱낱으로 알아 안 옮기는 것”이라고 풀어야 옳다. 윤노빈은 ‘안’에 있는 것은 창자, 밥통, 기생충, 대소변과 같은 것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내유(內有)’는 ‘안에 있는’이 아니고, ‘안에 계시는’으로 풀어야 옳다. 신령한 ‘검얼(神靈)’은 ‘없이 계시는 님’이기 때문이다. ‘모심’은 ‘없이 계시는 님’을 모시는 일이다. 그 ‘없이 계시는 님’이 사방팔방시방 곳곳에 외유기화 곧 ‘숨짓(氣化)’으로 퍼지고 번져간다. 미음(ㅁ)에 피읖(ㅍ)이요, 비읍(ㅂ)이다.

 

그림4) 윤노빈 지음, 『신생철학』, 제일문화사, 1974. 이 책은 증보판이다. 학민사에서 2003년에 펴냈다.

윤노빈은 또 이렇게 말한다. “신은 있는 것(존재)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것(생존)이다. 신은 존재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생존하는 것 즉 행위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신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한다. 행위하는 것이 신이다. 신의 존재증명이라는 문제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오로지 ‘신의 행위증명’이 문제로서 성립하며, 또 그 증명도 확실하며, 명백하게 성립하며, 납득된다. ‘있는 신’은 행위하는 신이 아니라 즉은 신이다.”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신은 살아계신 분이다.
신은 행위다.
신은 ‘하는님’이다.

하는님은 행위이지만 ‘순수한 활동’(actus pursus)은 아니다. 신은 그저 그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신은 도대체 저 혼자 돌아가면서 주위에 소용돌이 바람을 피우는 초대형의 팽이는 아니다.
하는님은 순수활동이 아니라 해방적 행위다.
신은 옛날부터 해방자로서 이해 되어왔다. 오랜 동안 인류는 자신을 구원하여 주는 존재로서 신을 숭배 하여 왔다. 그렇다. 신은 인류의 해방자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류가 고대 하여온 ‘신의 얼굴’(브니엘)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이 본 ‘얼굴’은 사람뿐이다.

윤노빈의 ‘하는님’ 생각은 ‘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의 큰 비극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하는님’을 분단에만 묶어 두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우주적 해방’으로 넓혀야 한다. 까닭은 윤노빈이 ‘하는님’의 첫 생각을 수운의 「용담가」에서 떠올렸기 때문이다. 윤노빈은 책『신생철학』에 「용담가」를 가져와 붙인 뒤, “이리하여 신의 존재가 아니라, 하는님 즉 행위로서의 신, 신적 행위가 명백히 증명되었다. 이제 하는님은 기지개를 펴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살아있는 신으로서의 하는님은 누구이며, 하는님의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라며 ‘신의 행위증명’을 결론 내리고 그 행위의 장소를 따져 묻는다.

윤노빈의 ‘신생(新生)’은 ‘새삶’이요, ‘새남’, ‘새솟구침’의 ‘거듭남’이다. 그것은 인내천(人乃天)을 ‘인내천(人乃賤)’으로 사유한 데서 비롯한다. 앞의 인내천에는 ‘하늘 천’이 있고, 뒤의 인내천에는 ‘바닥 천’이 있다. 윤노빈은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수운의 가르침은 인내천(人乃天) 곧 ‘하늘 천’ 혁명의 진리인데, 이것에 반하는 인내천(人乃賤) 곧 ‘바닥 천’의 역사와 삶이 아시아와 세계사에 펼쳐지면서 이에 대한 인내천(人乃天)의, 즉 바닥과 나락에서의 하늘과 존엄한 존재로 인간과 세계를 개벽, 혁명시키는 새로운 정신의 등장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더불어 향아설위(向我設位)와 함께 ‘밥이 하늘이다, 바닥이 하늘이다’라는 새로운 혁명의 화두, 즉 바닥과 하늘의 일치와 일체의 혁명적 인식을 살폈다.

바닥에 인내천(人乃天)의 ‘하늘’이 솟았다

바닥이요 나락인, 그래서 낮고 낮은 ‘바닥(賤)’을 ‘하늘(天)’로 새로 솟게 하는 것이 윤노빈의 ‘신생(新生)’이다. 그것은 산 사람이 새로 나는 것이니 ‘거듭남’이요, 나날이 새로 거듭나는 삶이니 ‘솟구침’이라 할 것이다. 거듭나고 솟구치는 그 자리에 ‘다시 개벽’이 있을 터.

사람이라는 ‘몬’에 살아있는 씨알의 ‘앗’이 솟아 ‘비’로 모셔졌을 때 수운의 ‘하ᄂᆞᆯ님’, 윤노빈의 ‘하는님’, 다석의 ‘ᄒᆞ실님’이 어떻게 계시는지를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잘 말해준다. ‘모심’은 스스로 ‘들임 받는’ 사건이다. ‘들임 받음’은 스스로 깨달아 알아차리는 자각(自覺)이어야 한다. 스스로 깨달아 솟구치는 ‘솟남’이요, ‘거듭남’이다.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뒤흔들어 깨우는 ‘들깨움’의 신명이 일어야 한다. 스스로 들깨워 신이 나야 한다. 신이 나서 신나야 몬이 신을 낳는다!

노자 늙은이(老子)는 42월(章) “길 나니, 하나. 하나 나니, 둘. 둘 나니, 셋. 셋 나니, 잘몬.”이라 했다. 길이 하나를 낳는 게 아니라, “길 나니, 하나”이다. 길은 낳지 않는다. 길은 그저 나고 낼 뿐이다.

텅 ‘비’니 하나요, 빈탕에 ‘씨’나니 둘이요, 씨에 ‘앗’나니 세웃(三:萬物)이다. 셋은 세웃, 곧 솟남이다. 세웃으로 싹이 두루 번지고 퍼지니 잘몬(萬物)이 나고 낳고 되고 이룬다. 하나로 늘 하시는 님이 곳곳에 없이 계신다. 저가 저를 알아차리니 저절로 환한 ‘밝(明)’이다. 노자 늙은이는 “남 아는 것이 슬기, 저 아는게 밝(知人者智自知者明)”이라 했다. 환한 ‘밝’이 솟은 자리에 ‘모심’이다. 그렇게 환한 ‘모심’이어야 새로운 숨을 짓는다. 새로운 ‘숨짓’을 짓는 일이 곧 불숨(革命)이다. 바로 그 불숨이 ‘다시 개벽’이고.

부처를 달리 부르는 10개의 이름을 여래십호(如來十號)라 한다. 그 중에 ‘여래(如來)’라는 이름이 있고, ‘선서(善逝)’라는 이름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타타가타’라고 하는 ‘여래(如來, tathagata)’의 ‘여’는 있는 그대로를 뜻하고, ‘여래’의 ‘래’는 오는 걸 뜻한다. 그러니 ‘여래’는 잘 온 이요, 여실히 온 이요, 참(眞如)에서 온 이를 뜻한다. 본디 있는 그대로의 ‘참나’(眞我)가 온 것이다. ‘저절로 있’이요, ‘스스로 있’을 그저 ‘있’(自在)이라 한다. 스스로 있는 ‘있’이 여기로 다시 옴(來)을 ‘있다시 온’이라 한다. 여래의 뜻이다. 이 땅에 씨알로 깬 우리는 바로 그 ‘있다시 온’을 알짬(精)으로 가졌다.

산스크리트어로 ‘수가타’라고 하는 ‘선서(善逝, sugata)’의 ‘선’은 착하게 잘하는 ‘잘’을 뜻하고, ‘선서’의 ‘서’는 떠나서 돌아가는 ‘감’을 뜻한다. ‘선서’는 잘 간 이요, 피안(彼岸)에 잘 돌아간 이요, 깨닫고 깨달아 그 세계에 잘 이른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로 잘 간 ‘참나’(眞我)를 말한다. ‘예’는 여기요, ‘옛’은 저기다. ‘예’하는 깜빡 사이에 ‘옛’이 된다. ‘옛다시 가온’은 예(여기)의 것을 다 잘 여의고 돌아갔다는 뜻이다. 선서의 뜻이 바로 ‘옛다시 가온’이다. 돌아갈 때는 씨알을 다 여의고 가야 한다. 영글어 푹 익어야 여읜다.

모신 하ᄂᆞᆯ님의 ‘다시 개벽’은 “‘있다시 온’에 ‘옛다시 가온’이다!”로 늘 사는 일이다. “‘옛다시 가온’에 ‘있다시 온’이다!”로 늘 사는 일이다. 다석이 그리 말했고 그리 살았다.

 

그림5) 수운 최제우가 짓고 해월 최시형이 펴낸 『동경대전(東經大全)』이다. 동곡미술관 소장본이다.

자, 그리고 이제는 땅에 하늘이다! 하늘땅이 아니라, 땅하늘이다. 땅에 하늘이다. 빛살(易)은 쉬지 않는 ‘해숨’이요 ‘빛숨’이다. 그 숨이 돌아 뒤바꾸는데 ‘녘’이 있다. ‘녘’이 벌어지는 아침놀과 저녁놀이 잘 돌고 돌면서 뒤바꿔야 ‘늘숨’이 짓고 일으켜 온갖 짓됨에 억눌림이 없다. 있는 그대로 변화무쌍이요, 생생화화(生生化化)이다.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그 모든 짓됨에 산일름의 생명(生命)이 너울거린다. 하늘이 하나로 하시는 온갖 산숨(生命)의 ‘숨(命)’이 불어간다!

다석은 1966년 2월 25일 『다석일지』에 『주역』 64괘 중 36번째 명이괘(明夷:䷣)의 “명입지중: 명이(明入地中: 明夷)”를 이렇게 풀었다.

따에 든 ᄇᆞᆰ음이 : 다치며? 몸속 ᄆᆞᆷ이 : 흐리랴?
땅 : 속ᄋᆞᆯ 관 : ᄃᆞᆯ낯 : 없고! ᄉᆞᄅᆞᆷ ᄆᆞᆷ은 : ᄒᆞ늘 나루!
무리들! 그이 : 에게는, 날마닥이 : 그믐밤 : !

소리내어 읽어 보자.

땅에 든 밝음이 다치며? 몸속 맘이 흐리랴?
땅 속알 관 둘낯(相觀) 없고! 사람 맘은 하늘 나루!
무리들! 그이에게는 날마다 그믐밤!

다석은 명이(明夷)의 이(夷)를 상(傷:다침)으로 풀지 않고 ‘닫힘’(無極:弓弓)으로 풀었다. ‘닫힘’은 곧 궁궁이다. 맨이다. 일원(一圓)이다. 한 동그라미 둥긂이다.

땅에 한 둥긂이 있다!
땅에 하늘이요, 몸에 속알 ᄆᆞᆷ이니
오히려 하늘 나루라고 말한다.

한 번 되새겨 보자.

땅에 하늘이다.
몬에 씨앗이 터지니 환빛의 비가 열린다.
사람에 모신 하ᄂᆞᆯ이다.
모심의 ‘다시 개벽’
바로 그것이
다시 개벽하는 ‘비롯’이다!

- 참고문헌 -

류영모 글, 다석학회 엮음, 『다석일지』, 동연, 2024
박영호 지음, 『다석전기(류영모와 그의 시대)』, 교양인, 2012
류영모 말씀, 박영호 엮음, 『씨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 다석이 남긴 참과 지혜의 말씀』, 두레, 2002
박영호 엮음, 류영모 글, 『다석 류영모 어록: 제나에서 얼나로』, 올리브나무, 2019
안재홍선집간행위원회, 『민세안재홍선집2』, 지식산업사, 1983
이정호 지음,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
윤노빈 지음, 『신생철학』, 제일문화사, 1974(증보판은 학민사에서 2003년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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