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2인자 소동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백승종 역사가·퇴직교수
백승종 역사가·퇴직교수

모든 권력은 시민(국민)에게서 나오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자가 됐든 시민이 됐든 모두가 안전하다. 그러나 독재국가 또는 비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두가 불안해진다. 권력이 없는 피지배자는 말할 나위도 없고 설사 최고 권력자라고 해도 안심할 수 없게 된다. 권력 2인자는 더욱 위험하다. 오늘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2인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마오쩌둥의 2인자 게임

1949년에 마오쩌둥(毛澤東)은 중국의 공산화라는 숙원을 이루었다. 오랜 투쟁 끝에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쫓아냈으나, 문제는 중국의 허약한 경제력이었다. 마오는 ‘대약진운동’이라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워, 국가가 주도하는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늦어도 10년 이내에 영국 같은 굴지의 산업국가를 추월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무리한 공업화 정책은 부작용만 남기고 철회되었다. 그때 약 2천만 명의 중국인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전술가답게 기민한 조치를 취했다. 정치 일선에서 일단 후퇴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류샤오치(劉少奇)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마치 은퇴한 황제처럼 유유자적하였다. 막중한 권력을 쥔 류샤오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덩샤오핑(鄧小平)처럼 유능한 참모를 기용하여 시장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중국은 빈사 상태를 벗어났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머리가 아파졌다. 류샤오치가 실패해서도 곤란하지만, 그의 정책이 성공해서 권력이 그에게 넘어가서도 안 될 일이었다. 마오쩌둥에게 국가란 사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류샤오치에게서 권력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류샤오치 등은 당연히 반발했다. 그들은 권좌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버티며 마오쩌둥을 비판하였다. 그러자 마오는 군부의 실력자 린뱌오(林彪)를 자신의 권력 투쟁에 끌어들여 승부수를 띄웠다.

마오쩌둥은 왜, 린뱌오를 선택하였을까? 린뱌오는 우선 항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장제스 일파를 중국 본토에서 축출할 때도 가장 공이 컸다. 그뿐 아니라 인도와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도 손수 중국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가져왔다(1962년). 그는 명장으로 군부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정치적 감각은 세련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리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 일당을 쫓아내려면 충직한 군인 린뱌오가 제격이라는 것이 마오의 판단이었다.

 

마오쩌둥과 린뱌오. 우만위키
마오쩌둥과 린뱌오. 우만위키

아부와 굴종은 린뱌오의 보신책

사실 린뱌오는 개인적으로 류샤오치를 존경했다고 한다. 린뱌오는 딸에게 “마오쩌둥보다도 류샤오치가 공산주의 이론을 더욱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부총리가 되지 않으려고 여러 차례 사양하였다. 심지어 린뱌오는 마오쩌둥을 만나 부디 자신의 부총리 임명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단 부총리로 발탁이 되자 린뱌오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표하였다. 이것은 물론 문화대혁명(1966-1976)의 혼란기에 자신을 지키려는 전략이기도 하였다. 그는 부총리였으나 어설픈 의사표명을 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마오의 의견 또는 입장이 명확해질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마오쩌둥과 공식행사에 참석할 일이 생기면 항상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반갑게 그를 맞았다. 린뱌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마오의 가장 충실한 추종자라고 믿게 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마오가 참석한 자리에 나갈 때는 언제나 마오의 어록을 들고 나타나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이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수제자”라고 여겼다. 이런 평판이 굳어지자 린뱌오는 기뻐하며, “저는 아무런 재능도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모두 마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린뱌오는 문화대혁명을 떠들썩하게 벌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의 요구가 있을 때만 그는 정부의 주요 회의에 참석했다. 그의 동료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사석에서 문화대혁명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피했다. 어쩔 수 없이 언급하게 되더라도 짤막하고도 모호하게 진술하였다고 한다. 부총리 린뱌오는 누구에게도 전화조차 걸지 않았다. 찾아오는 방문객도 없이, 동료들과도 격리된 채 은둔하였다. “과묵하고 신비스러운 사람”이라는 세평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다.

린뱌오는 왜 그렇게 수동적이었을까. 문화대혁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부하 타오주(陶铸)가 문화대혁명 초기에 제거될 위험에 빠지자 편지를 보내 이렇게 충고했다. “수동적이고, 수동적이며, 더욱더 수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타오주는 그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고, 결국 1967년에 숙청되었다(1969년 사망). 이런 시국에 린뱌오의 생존전략은 “무책임, 무제안, 무범죄”라는 ‘삼무(三無)’뿐이었다.

군부 숙청 – 고개 들기 시작한 린뱌오

린뱌오가 철저히 수동적이기만 하였다면, 마오쩌둥이 그를 부총리 자리에 그대로 두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린뱌오 역시 연로한 마오쩌둥 이후의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미래를 나름대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1966년 당시 마오쩌둥은 73세의 고령이었고, 린뱌오는 아직 59세였다. 앞으로 몇 년만 참고 견디면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린뱌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였겠지만, 린바오는 은밀히 군부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1966년 8월, 그는 앞으로 “3개월 동안의 폭동”을 통해 군부가 스스로 쇄신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또, 그해 10월 6일에는 중앙군사위원회를 통해 모든 사관학교가 수업을 중단하고 생도들은 문화대혁명에 온전히 참여하라고 촉구했다. 이 지시에 따라 많은 장교와 인민위원이 추방되었고 일부 인사는 생도들의 구타로 사망했다.

린뱌오는 사관생도들을 이용해 자신이 신임하지 않는 고위 장교들을 군에서 추방했다. 그는 생도들을 동원해 부참모장급 인사까지도 가차 없이 숙청하였다. 정치부에서 근무 중인 고위 간부만 해도 40명이나 숙청했다. 그들의 대다수는 감옥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중국에서는 8만 명의 장교가 숙청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감히 린뱌오가 독단적으로 단행한 것이 아니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얻거나 적어도 그의 동의를 얻어서 시행한 사업이었다.

그러면 린뱌오 나름의 계산은 없었을까? 고령의 최고 권력자 밑에서 제2인자는 악역을 맡기 마련이나, 거기에는 자신의 이익이 끼어 있기 마련이다. 린뱌오는 장차 마오쩌둥이 갑자기 서거하는 일이 발생하면 그때 빚어질 정치적 혼란상황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방법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럼 이렇게 세력을 키워도 린뱌오는 과연 무사할까?

독재자의 젊은 아내와 친하게 지내지 못한 린뱌오

류샤오치 축출 후에도 중국의 최고 권력층에는 적어도 3개의 계파가 존재하였다. 그중 하나는 린뱌오의 추종세력이요, 또 하나는 마오쩌둥의 젊은 부인 장칭(江青)이 이끄는 무리였다. 그밖에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역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긴장된 관계였다.

린뱌오와 장칭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될 때만 하여도 협력관계였으나 린뱌오가 장악한 군사문제에 장칭이 계속 간섭하려 들면서 그들의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했다(1968년). 그 뒤에는 시간이 갈수록 사이가 나빠져, 린뱌오는 장칭을 ‘콧대 높은 살모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린뱌오가 절대 권력자인 마오쩌둥의 젊은 부인과 불화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독재자의 아내와 친하게 지내지 못하면 언젠가는 화풀이를 당할 터인데, 린뱌오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이들 세 개의 파당은 대외 문제에 관해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이 문제는 특히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중요한 주제였다. 린뱌오 일파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중국에 똑같이 위협적이며, 중국의 이익을 해치려고 협력하기도 한다고 판단하였다. 반면에 저우언라이는 소련이 중국을 위협한다는 전제 아래 중국으로서는 앞으로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확신하였다.

린뱌오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보아 저우언라이를 비판하였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장칭 역시 린뱌오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 그가 미국과 접촉하지 못하게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1969년 3월에 몽골 국경에서 중국 군대는 소련과 전투를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때 린뱌오는 소련을 ‘사회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하였고, 소련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경고 명령을 중국군에게 내렸다. 린뱌오 일파는 혼란한 정세를 틈타 자파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힘썼다.

권력자의 변덕에 금방 허약해진 2인자

하지만 마오쩌둥은 린뱌오 일파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1970년 8월부터 9월까지 열린 루산(庐山) 중국 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2차 전체회의에서 마오는 린뱌오 일파에 대해 회초리를 들었다. 수세에 몰린 린뱌오는 마오에 대한 찬사를 열정적으로 늘어놓았으나 노회한 마오는 린뱌오에게 속지 않았다. 그는 린뱌오가 자신에게 대항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마오는 린뱌오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 일파인 천보다에게 망신을 주었다. 린뱌오의 시간은 급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루산 회의를 계기로 린뱌오와 마오 사이에는 불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군부 내의 일부 세력도 린뱌오에게 등을 돌렸고, 저우언라이와 장칭 일파는 린뱌오 측으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첫해에 숙청된 상당수 인사를 정부에 불러들였다. 이것은 저우언라이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아울러,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자는 저우언라이의 견해를 따랐다. 제2인자 린뱌오의 모습은 허약해졌다.

드디어 마오쩌둥은 린뱌오 부부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하였다. 린뱌오는 이를 회피했고, 그의 부인 예춘은 자아비판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그것이 제대로 된 자아비판이 아니라며 수용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에게 린뱌오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완곡하게 건의했다고 한다. 혹자는 그것을 일종의 중재라고 말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면 중재가 아니라 용서를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1971년 7월에 마오쩌둥은 린뱌오 일파를 몽땅 숙청하려고 결심하였다.

마침내 1971년 9월 13일에 린뱌오 부부와 그의 측근 몇 사람이 탄 군용 여객기가 몽골의 시골 마을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다. 중국의 공식 보도에 따르면, 린뱌오 일당은 쿠데타를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쳤고, 소련으로 망명하려다가 중간에 변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그들 일행이 사망한 사실 뿐이요, 정말로 쿠데타를 모의했는지도 알 수 없고, 소련으로 망명할 예정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것은 영원한 미제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만나 피해 상황을 둘러보고 있다. 2024.1.23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충남 서천군 서천읍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만나 피해 상황을 둘러보고 있다. 2024.1.23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2인자의 부상과 몰락, 독재권력의 초상

이것은 물론 중국이란 특수한 나라에서 벌어졌던 현대사의 어두운 한 장면이다. 그것도 마오쩌둥이 과거 왕조시대의 황제와 같은 권력을 구가했을 때의 모습이다. 그런 권력구조에서는 항상 2인자가 존재하며, 최고 권력자는 늘 그 2인자를 견제하기 위해 이간책을 써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견제 속에서 2인자의 처신은 린뱌오와 흡사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최고 권력자의 환심을 사고,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예스맨‘이 되어 당장의 권력을 유지해야 하지만, 미래에 닥쳐올 권력투쟁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최고 권력자의 의심을 사고 눈밖에 나게 되면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독재국가의 초상이다.

그와 같은 비슷한 일들이 우리에게도 과거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에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1987년 시민항쟁으로 직선제를 얻어낸 후, 즉 민주주의를 이룬 후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2인자‘ 소동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 같다. 집권 여당의 대표 자리를 대통령이 마음대로 바꾼다. 어떤 경우에는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겁박하다가 금방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신뢰감을 표한다. 삼권분립의 민주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인 것이다. 마치 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자아비판을 요구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듣기로 대통령 부인의 권세도 장칭만큼은 아니겠으나 만만치 않다고 한다. 임기(?) 내에 남북통일 시키겠다고 큰소리를 칠 정도라고 하니 이 역시 민주국가에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마침 봄철 총선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 나라가 진짜 민주주의 국가가 맞는지 한 번 확인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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