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문명사적 전환 알리는 시그널
[유정길 칼럼] 기후선거가 돼야 할 4월 총선
채굴자원 이용한 성장 이제 더는 불가능
생명평화, 녹색이 진보의 미래
기후위기 대응도 코로나 팬데믹 때처럼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3가지의 자원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3가지가 있다. ‘지하자원’, ‘지상자원’, ‘천상자원’이다. ‘지하자원’은 익히 알고 있듯이 철, 구리, 주석 등의 광물자원 외에 에너지자원으로 석유, 석탄, 우라늄, 천연가스 등이다. ‘지상자원’은 나무나 물처럼 땅 위에 있는 에너지원이며, ‘천상자원’은 태양과 바람이다.
지하자원은 지구 행성적 한계로 무한하지 않다. 파내어 쓰면 고갈된다. 복원이 된다고 해도 수만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한편 나무와 물 등의 지상자원은 복원속도를 넘어서지 않고 소비한다면 끝없는 재생산이 가능하다. 나무를 베면 이듬해 다시 나무가 자라고 물도 자연의 순환적 질서를 잘만 이용하면 끊임없이 이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천상자원은 태양이 존재하는 한 무한한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산업문명 이전에는 주로 ‘지상자원’을 사용했다. 그때까지 인류의 생산성은 자연의 복원력, 정화력, 회복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규모였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석유, 석탄, 천연가스, 우라늄 등의 에너지와 광물자원 등 ‘지하자원’을 캐내어 쓰기 시작했고 그 채굴 속도와 규모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확대되고, 자연 개조능력 또한 급격하게 커지면서 결국 오늘과 같은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기후위기는 문명사적 전환 시그널
결국 지하자원 중심의 산업사회를, 재생 가능한 지상자원을 사용하거나 태양광이나 바람 같은 천상자원 에너지를 쓰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오늘날의 위기가 모두 해결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기후위기를 해결하거나 탄소만 줄이면 지구 생태계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기후환원주의' '탄소환원주의'로서 비판받고 있다. 기후위기는 오늘날 수많은 위기 징후의 맨 앞에 있는 한 현상일 뿐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는 현재와 같은 인류의 삶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짓정보 위에 구축된 문명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문명사적인 전환을 강제하는 시그널이다.
자연은 산불, 홍수 등의 자연재해나 메르스, 사스, 코로나 등의 감염병을 통해 계속 인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으니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그동안 발전이나 진보라고 생각해온 모든 패러다임을 폐절하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채굴자원 이용한 성장 더는 불가능
대표적으로 오늘의 산업사회는 자원무한주의라는 거짓 정보를 토대로 구축된 문명이다. 자원무한주의는 무한채굴주의의 토대가 되어 무한성장주의 발전을 지탱해온 ‘현대판 천동설’이다. 명백한 사실은 “하나뿐인 지구(Our Sole Earth)”라는 행성적 한계가 모든 인류의 진보와 진화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엄정한 사실이며, 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 바로 기후위기의 본질이다. 더 이상 채굴 자원을 이용한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한정된 자원을 토대로 한 북반구 국가들의 풍요는 가난한 나라들이 함께 평등하게 나눠 써야 할 자원을 빼앗아 쓰면서 누린 풍요이며, 미래 세대가 써야 할 자원까지도 빼앗아 쓰면서 누린 풍요다. 20%의 부국들이 화석연료의 83%를 소비해서 기후위기가 발생했지만, 그러나 그 피해는 주로 가난한 나라들이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국들은 누적적으로 가난한 나라와 미래 세대에게 생태적 부채(Ecological Debt)를 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발전과 풍요는 그 오염의 피해를 자국 내에서는 가난한 지역에, 국제적으로는 가난한 나라에. 생물학적으로는 약한 생명에게, 시간적으로는 미래 세대에게 떠넘기며 누려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산과 강, 바다 등 비인간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멸종하든 말든 아무 고려 없이 그들을 단순히 식량이나 이용 대상으로 지배, 정복해 온 인간중심주의 또한 기후위기 원인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를 반성하며 동물들의 권리를 존중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에콰도르나 볼리비아, 뉴질랜드 등에서는 자연도 권리의 주체임을 헌법으로 인정하는 자연권이 점차 많은 동의를 얻고 있다.
생명평화운동의 문명사적인 전환 구상
1992년부터 우리에게 익숙해진 ‘지속가능한 개발(ESSD)’과, 그것을 이루려는 세계적 차원의 발전 기조인 ‘SDGs(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도 결국 성장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단절적인 전환이 강조되기보다는 구멍난 것을 메우고 갈라진 틈을 때우는 수준의 대응정책으로, 결국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싶어 하는 열망에 포섭되고 오염되었다는 비판이다.
따라서 기후위기는 단순한 전환이 아니라 ‘거대한 전환’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 국가수준의 혁명이 아니라 전지구적인 변혁이 돼야 한다. 생명운동이 ‘개벽’이라는 표현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
이것은 성장주의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 ‘포스트 성장주의’나 ‘탈성장’이 논의되는 이유이고, 인간중심주의에 대항하여 동물권과 자연권을 포함한 ‘신유물론’이나 ‘포스트 휴머니즘’이 논의되는 이유이다. 그것은 또한 국가주의를 넘어 행성적 사고로서의 글로벌리즘과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 소비, 폐기가 이뤄지는 로컬리즘으로서 풀뿌리 자치와 지역순환사회를 지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를 구분하고 나누는 이분법적 구획을 토대로 한 데카르트적 패러다임과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지배와 정복이라는 사회진화론적 인식을 폐절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우주 모두가 서로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로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나아가 개인과 사회가 연결된 존재인 만큼, 성장사회의 구조 변화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성장주의적 인식과 사고의 변화, 즉 외부와 이어진 인간 내면의 변화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영성과 깨달음, 정신성의 전환 또한 필수불가결하다.
환경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
생태위기 앞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특히 대의민주주의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자연의 이용과 개발에 관한 의사결정이 그 지역에 사는 현세대 인간만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연을 이용할 때 항상 7세대 이후를 기준으로 하는 전통이 있다. 현재의 결정이 200년 뒤에도 이로워야 한다는 원칙이다.
‘자원은 미래세대의 것이며 우리는 단지 그것을 빌어 쓰고 있다’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도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비인간 생명체들의 의사를 반영하지도, 미래세대의 이해를 반영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위기는 새롭고 더 깊은 민주주의로의 진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현세대가 결정하는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자연적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다.
1980년대의 반공해운동은 인간의 공적 피해를 반대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리후 환경회의 이후 반공해보다 더 확대된 의미의 ‘환경’이라는 용어가 정착됐다. 그 후 ‘환경’이라는 용어도 주체와 주변을 분리하는 용어로서의 한계가 지적되면서, 모두 연결되어 순환한다는 의미로 ‘생태주의’ ‘생태주의운동’이라는 말을 병행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청색)를 극복하겠다는 사회주의(적색)마저도 결국 생산력주의, 물질적 풍요 지향의 진보를 추구하는 한, 결국 ‘그놈이 그놈’으로 동일한 위기의 원인제공자일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청색과 적색을 동시에 뛰어넘는다는 의미로 ‘녹색’ ‘녹색운동’이 등장했다. 하지만 ‘녹색’이라는 용어도 외부 사회구조와 연결된 내부 인간의 욕망과 정신성, 영성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어서 이를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명운동’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토대가 되어야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에서 ‘생명평화운동’이 생겨났다.
마땅히 기후선거가 돼야 할 4월 총선
지금은 2030년까지 1.5℃ 기후 붕괴를 막기 위해 불과 5~6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4월 총선을 포함하여 2024년 올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인 60여개 국의 40억 명이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에 참여한다. 다양한 쟁점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문제에 관한 사활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선거들이라는 점이다.
생태위기의 관점에서 볼때 오늘날의 선거 시스템은 단기간의 이해만 고려하는 포퓰리즘 정치의 산물이다. 정치인들은 50~100년 뒤의 미래 세대보다는 자신의 이해가 걸린 4~5년밖에 책임지지 않는다. 진정 인류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 기후문제에 관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한 정치적인 판단과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기상황이자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정치와 시민운동 진영은 윤석열 정부의 검찰독재 청산을 가장 큰 과제로 삼고 있고, 그 한편으로 기후선거를 강조하는 흐름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평화나 통일 등 과거의 사회적 과제는 보수와 진보로 갈렸지만 기후 환경 문제는 좌우로 갈릴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미래세대를 위해 현세대가 해결해야 마땅한 책임이 있다. 앞서 강조했지만 생태정치는 단순한 기후위기를 넘어선 위의 모든 전환 과제들을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번 선거가 그 해결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후위기 대응도 코로나 팬데믹 때처럼
불과 1~2년 전 인류는 동시에 코로나 팬데믹 대응이라는 초유의 세계사적인 체험을 거쳤다. 모든 사람들이 외출을 삼가야 했고, 해외여행을 비롯한 국제적인 이동이 제한되었다. 정부의 감염병 위기 대응에 따라 진단과 치료를 받으며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차량통행이 급격히 줄고, 출근도 하지 못한 가운데 온라인 화상회의가 일상화되면서 우리의 삶과 생활양식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달라졌다. 그 사이에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없어 보이던 대기오염, 미세먼지 등이 한때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던 경험도 했다.
어쩌면 코로나 팬데믹은 앞으로 닥칠 긴박한 재난상황들을 위한 예행연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체험과 기억을 기후위기 전환을 위해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