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희생자 추도비 철거 전 한국쪽 면담신청 퇴짜

군마현 지사, 신청 자체가 없었다고 거짓말

'제3자 변제'에도 사죄는 커녕 독도, 교과서 뒤통수

일본은 다 얻고 한국은 다 잃는 이상한 양국관계

지난 1월 29일 군마 현이 철거한 '군마의 숲' 공원의 조선인 추도비.  연합뉴스
지난 1월 29일 군마 현이 철거한 '군마의 숲' 공원의 조선인 추도비.  연합뉴스

지난 1월 말에 철거된 일본 군마 현 ‘조선인 추도비’를 철거하기 며칠 전에 주일 한국대사관이 다른 해결책을 상의하기 위해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 현 지사와의 면담을 신청했으나 야마모토 지사가 이를 거부하고 철거를 강행했다고 <아사히신문>이 27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지난 1월 29일 시작된 추도비 철거공사 1주일 정도 전에, 한국대사관 직원이 군마 현 청사를 방문해 현 담당부장 등 여러 명의 직원들을 만났다”며, 그 직원은 “해결책을 상의하기 위해 야마모토 지사와 대사관 간부의 면담을 요청했다”고 전했다.

군마 지사 면담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한국대사관

이에 대해 군마 현은 그 며칠 뒤 대사관 쪽에 신청을 거부한다는 연락을 보냈으며, 예정대로 29일에 추도비 철거작업에 들어가 2월 2일 공사를 마쳤다.

야마모토 지사는 최근 일련의 기자회견에서 추도비 철거와 관련해 한국 쪽과의 접촉은 없었다고 거듭 밝혔다. <아사히>에 따르면, 한국대사관이 면담 신청을 한 직후인 1월 25일 회견에서 야마모토 지사는 “외교 루트로 들어온 얘기는 없다”고 말했으며, 추도비가 파괴된 뒤인 2월 1일과 8일 기자회견에서도 추도비 철거가 한일관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느냐는 등의 질문에 “외교적인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일본 군마 현 내의 '조선인  추도비' 철거를 강행한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 현 지사. 연합뉴스
일본 군마 현 내의 '조선인  추도비' 철거를 강행한 야마모토 이치타 군마 현 지사. 연합뉴스

거짓말로 얼버무리다 자백한 야마모토 지사

2월 15일 회견에서도 한국대사관이 접촉해 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공식’적으로 어떻게든 면회를 하고 싶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그에 앞선 일련의 기자회견에서 한 말을 일부 수정했다. 그 뒤 그가 말한 ‘공식’적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야마모토 지사는 “이것 이상으로 코멘트할 수 없다”며 구체적인 설명을 피했다.

이는 추도비 철거 직후에는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가, 면담 신청 여부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자 신청을 받은 사실 자체는 사실상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도 그것이 ‘공식’ 신청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모면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사히>가 보도한 대로 한국대사관 직원이 군마 현청에 직접 가서 현 담당부장 등 여러 명의 직원을 만나, 해결책을 상의하기 위해 야마모토 지사와 한국대사관 간부의 면담을 요청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면, ‘외교 루트’를 통해 한국정부 쪽에서 아무런 얘기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 그의 말은 거짓이라고 봐야 한다. 야마모토 지사는 ‘외교 루트’를 통해 들어 온 한국 쪽의 그 면담 신청을 거부한 뒤, 문제가 될 소지가 생기자 그것이 ‘공식’적인 요청이 아니었다며 자신의 대응을 정당화했다. 그가 말하는 ‘공식’ 요청이 아니었다는 것이 공문서를 통한 면담 신청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대사관의 면담 요청이 설사 그런 의미에서의 ‘공식’ 요청은 아니었을지라도, 한국정부가 그런 요청을 했다는 사실을 그가 보고받은 뒤 면담을 거부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추도비 철거를 강행하기로 작정한 야마모토 지사는 비 철거 전에 한국대사관 간부를 만나 얘기할 경우 난처한 처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면담 요청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처리하려 했을 것이다. 면담 거부 사실이 알려질 경우 문제가 더 복잡해질 테니까.

야마모토 지사는 자민당 참의원 4선 의원 출신으로, 외무성 부대신과 오키나와 북방상(北方相) 등을 지낸 이력을 지닌 유력 정치인이다.

 

독도. 일본정부와 역사교과서들은 독도(다케시마)를 한국이 불법 점거한 일본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교도 연합뉴스
독도. 일본정부와 역사교과서들은 독도(다케시마)를 한국이 불법 점거한 일본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교도 연합뉴스

물컵의 나머지 반도 한국이 채우라는 일본

지난해 3월 한일 정상회담 때 윤석열 정부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를 피해자인 한국 쪽이 부담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이라는 편법으로 해결하자며, 일본 쪽의 끈질긴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 국민들의 반발을 ‘물 컵의 반은 일본이 채워줄 것’이라며 무마하려 했다.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은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면서 “물컵의 물이 절반 이상 찼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지난 1년 간 일본정부는 비어 있는 반을 채우기는커녕 나머지 반도 모두 한국이 채우라고 요구하는 듯한 자세로 일관해 왔다.

군마 현 조선인 추도비 철거뿐만이 아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정부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침 발표 뒤에도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끝내 ‘사죄’ 표명조차 하지 않았고, “일본 고유의 영토를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독도(다케시마) 일본 영유권 주장을 오히려 점점 더 강화해 가고 있다. 대다수 한국 국민과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원전 핵오염수 해양 투기를 강행했고,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문제 등에서도 오류 수정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며, 내년부터 사용될 중학 사회과 역사교과서 내용은 국수주의적인 내용으로 더 개악했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계열의 극우 출판사 교과서들을 검정에서 더 많이 통과시켰다.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 우두머리 신관인 '구지'에 해상자위대 장군 출신이 취임한 뒤 165명의 해상자위대원들이 한꺼번에, 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야스쿠니에 참배하는 등 패전 이전의 군국주의 일본으로의 회귀를 열망하는 분위기가 우익 지배세력 내에서 커가고 있다.

결국 윤석열 정부가 내세우는 '역사적인 한일관계 호전'은 일본을 과거사 성찰과 반성으로 이끌어 물컵의 반을 채우는 쪽이 아니라, 일본의 이런 파행을 아무런 견제 없이 모두 승인하거나 묵인함으로써 일본 내셔널리즘(국수주의)과 우경화를 더욱 촉발해 동아시아 전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있다.

 

일본은 다 얻고, 한국은 다 잃었다

한국정부는 이에 대해 침묵하거나 몇 마디 항의나 반박으로 체면치레하듯 지나갔다. 윤 대통령은 시간이 지나면 바뀔 것이라고 했지만, 일본정부와 우익의 언행에서 바뀐 것은 없다.

결과적으로 보면, 지난 1년간 한일관계에서 일본은 모든 것을 다 얻었고, 한국은 모든 것을 다 잃은 형국이 됐다. 윤석열 정부는 그렇게 다 내주었지만 기시다 정부가 내놓은 것은 애초에 일방적이었던 첨단반도체 장비부품 수출 규제 해제와 ‘화이트 리스트’ 복구 정도였다. 그것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내주고,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준동맹’의 틀에 부합하는 ‘한일 동맹’에 가까운 일방적 ‘친일’을 천명한 대가였다. 그렇게 해서 일본을 얻은 대신 중국 러시아 북한을 잃었다.

 

김명수 합참의장이 28일 찰스 브라운 미국 합참의장, 요시다 요시히데 일본 통합막료장과 한미일 3자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2024.3.28. 연합뉴스
김명수 합참의장이 28일 찰스 브라운 미국 합참의장, 요시다 요시히데 일본 통합막료장과 한미일 3자 화상회의를 하고 있다. 2024.3.28. 연합뉴스

“잘못한 것 하나도 없다”

야마모토 군마 현 지사는 조선인 추도비 철거에 대해 “가해의 역사를 제거하는 일에 가담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일자 “(추도)비의 정신은 부정하지 않는다”, “비를 철거하는 것과 역사인식을 왜곡하는 것은 내 머리로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추도비를 파괴해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놓고 한 얘기다. 그리고는 “철거는 지사의 판단으로 한 것이고,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겐 엔도 도쿄대 교수(국제정치)는 야마모토 지사가 한국대사관 간부와의 면담에 응했더라도 (일본 우익으로부터) 비판받았을 것이고 거부해도 비판받았을 것이라며, 그래서 아예 면담 요청조차 없었던 것으로 해버릴 작정이었을 것이라고 봤다.

일본이 더 불안해 하는 ‘너무 좋은 한일관계’

겐 교수는 “중요한 것은 전쟁 중에 타민족에 몹쓸 짓을 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을 위한 추도비를 철거해 버린 지사의 판단이 문제의 본질”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일관계는 작은 일이라도 순식간에 큰 불씨가 된다. (비 철거는) 모처럼 좋아진 한국과의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대국적, 그리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철거가 아닌 다른 선택지를 택했어야 했다. 지사는 ‘공익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비의 철거는 역사를 수정하려는 세력에 가담하는 행위로 부당하고 천박한 판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아사히>)

야마모토 지사가 말하는 ‘공익’이란 누구를 위한 공익인가.

양식있는 일본 식자들마저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 오히려 불안해 하는 최근의 한일관계가 이대로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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