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의존국에서 베트남 전쟁 동반자 된 한국

[베트남 참전 60돌]⑪ 보복전으로 굳어지다

베트남전의 비대칭성…공폭 이긴 게릴라전

하늘에서 폭탄 쏟아져도 지상 전세는 불변

미국의 좌절이 한국 참전의 기회 제공한 셈

한국, 극한 폭력의 현장에 기꺼이 들어가다

베트남은 베트남이 아닌 냉전 전략 시험장

2025-07-15     이길주 시민기자
한국은 1965년 초 비둘기 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비전투, 건설 지원을 위한 부대였다. 이들이 사이공에 도착하고 2개월 뒤 박정희와 존슨은 백악관에서 한국군 전투 사단의 베트남 파병을 논의한다. 사진은 건설 현장에 투입된 비둘기 부대원들. (대한뉴스 갈무리)

역설이지만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돕는 친구는 많았다. 지칠 줄 모르고 남베트남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을 공격하는 민족해방전선, 북폭을 당해도 게릴라 투쟁을 지원하는 북베트남, 그리고 무능한 남베트남 군부. 이들 모두가 미국을 좌절시켰고, 이런 미국의 좌절은 한국을 선전포고도 없는 이역만리 전쟁터로 불러들였다. 한국이 베트남으로 가는 길에는 미국이 굳게 손을 잡아 주었다. 1945년 이후 미국에 부담스러운 의존국(client state)이었던 나라가 미국의 가장 힘든 군사·외교상의 도전에 파트너가 되었다. 이 동반자 관계는 선하지 못했다. 악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윈스럽 길먼 브라운(Winthrop Gilman Brown) 주한 미국 대사는 한국은 아직 국제 무대에서 큰 일을 할 정신적 준비가 안 돼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한국이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베트남에 보낸 외국 참전 국가가 된다. 연인원 32만 명을 보냈고, 5000명을 잃었다. 부상자는 1만 명, 고엽제 피해자는 10만 명 (고엽제 후유의증자 4만 명 포함)이다. 어림잡아 미국의 파병과 피해의 10% 정도를 한국이 감당했다.

한국이 베트남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베트남 전쟁의 비대칭성 때문이었다. 이런 비교가 가능하다. 공산 세력이 AK47 소총, 박격포, 사제 폭발물 따위가 초라하게 벽에 걸려 있는 시골 구멍가게인데, 미국은 파괴와 폭력 수단의 최고급 백화점을 남베트남에 차렸다. 위층의 팬텀기와 폭격기, 중간층의 탱크와 장갑차에서 아래층의 M16 소총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지하 매장에는 고엽제 드럼이 가득했다. 또 직원 수가 한 때 50만 명에 달했다. 이 백화점을 개업한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군산복합체'에 대해 경고할 정도였다. 

 

전형적인 비대칭 전쟁의 단면이다. 민족해방전선이 손으로 직접 제작한 위장 폭발물이 미군 탱크의 이동을 막아 세우고 있다. (National Archives)

놀라운 화력 컬렉션에도 이 백화점은 망했다. 구멍가게 공산 세력은 꿈도 꿀 수 없는 미국의 무기체계 앞에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릴 줄 알았지만, 오히려 숨을 고르고, 다리에 힘을 넣어 비대칭 게릴라 투쟁을 이어갔다.

미국의 화력 백화점이 너무 화려했다. 남베트남은 이 백화점이 제 것인 줄 알았다.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내 것이 네 것 (what is mine is yours)'이라며 마음껏 갖다 쓰라고 했다. 이 주문대로 남베트남 군대가 비싼 무기를 들고 전장으로 뛰어가기도 했지만, 군부 지도자들은 이 백화점 스카이라운지를 헬리콥터로 오가며 'VIP' 서비스에 익숙해 갔다. 더 높은 수준의 'VIP Pass'를 위해 다퉜다.

 

1965년 2월 베트남 중부 쁠래이꾸(Pleiku)에 위치한 미 공군기지 '캠프 홀로웨이(Camp Holloway)'가 민족해방전선 게릴라의 공격을 받았다.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다수의 군용 항공기가 파괴됐다. 미국은 이 사건을 확전의 명분으로 삼았다. (Public Domain)

1965년 2월 민족해방전선은 사이공에서 북동쪽으로 500킬로미터 떨어진 베트남 중부 고원 지대 쁠래이꾸(Pleiku)에 위치한 미 공군 기지를 습격했다. 공격 목표는 두 곳이었다. 항공기 기지(Camp Holloway)와 조종사, 정비사 등이 묵는 인근 숙소였다. 소수의 게릴라가 두 곳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 약 10분간 소총과 박격포 공격을 감행하고 도주했다. 미군 7명이 죽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또 항공기 10대가 파괴되고 15대가 손상됐다. 침투조는 소총과 박격포, 폭발물로 무장했다. 소수가 감행한 공격과 대규모 피해의 불균형이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전투기, 폭격기, 헬리콥터 모두 차이가 없다. 이들은 하늘에서 매가 될 수 있지만, 땅에서는 제대로 날지도 걷지도 못하는 푸아그라 생산용 오리와 다르지 않다. 

존슨은 쁠래이꾸 공격 12시간 만에 미 해군 전투기를 띄워 북베트남을 공격했다. 작전명을 화공에 쓰이는 '불붙은 화살(Operation Flaming Dart)'로 정했다. 한 달 뒤 존슨은 공폭을 확대해, '천둥소리 작전 (Operation Rolling Thunder)'을 개시했다. 전자가 공산 게릴라들의 도발에 대한 응징의 메시지를 담았다면, 후자는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력화하겠다는 지속적인 파괴전이었다. 공폭의 천둥소리는 이로부터 44개월이나 이어진다.

공폭은 과시, 전시, 사기 진작용 무력 수단이다. 최근 이란 핵 시설에 대한 미국의 공격이 보여주듯, 텔레비전 스크린에 비치는 전폭기의 공격 장면은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공격 수단의 효율성과 관계없이 폭력의 파장을 느끼게 해준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에 나오는 대사 그대로다. 하늘에서 뿌려대는 폭탄, 특히 사람과 자연을 태워 버리는 네이팜탄 공격이 남기고 간 가솔린 냄새가 승리의 환각을 줄 뿐이다. 게임을 하듯 전쟁에 임하는 미군 기병연대 한 장교의 고백이다. ("I love the smell of napalm in the morning. You know that gasoline smell... (it)smells like victory.”)

미국의 이 '불붙은 화살' 작전은 박정희의 베트남 전쟁 개입 욕구에 불을 붙였고, ‘천둥소리 작전’은 그의 워싱턴을 향한 메시지의 볼륨을 높였다.

 

1965년 들어 미국의 베트남전쟁은 보복전의 양상을 띠었다. 남베트남에서 벌어지는 공산 게릴라의 공격은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공격을 정당화한다는 논리였다.  44개월 동안 계속된 천둥소리 작전 (Operation Rolling Thunder)의 공폭 장면. (Public Domain)

1965년 새해초 서울은 분주했다. 미국의 조언(advising)과 원조(assistance)로 남베트남의 군사력을 강화해 공산 세력을 무찌르게 한다는 전략은 이루지 못할 꿈이었다. 1964년 말 베트남의 미군 병력은 2만 3000명에 달했고 이동은 대개 항공기에 의존했다. 민족해방전선이 공격할 수 있는 미국의 표적은 커졌다. 남베트남군에게 미군 기지 방어를 맡기기에는 신뢰가 가지 않았다. 남베트남군과 민족해방전선과의 내통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이미 제2차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고 1965년 1월 26일 국회는 이를 인준했다. 준비는 빨랐다. 3월 16일 비전투, 건설 지원을 위한 '비둘기 부대(처음에는 주월한국군사원조단)'가 사이공에 도착했다. 2000명 규모였다. 존슨의 도움 요청에 냉랭했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전체 한국군 규모는 벌써 미군의 10%에 달했다. 한국은 비전투 부대 파병을 전투 부대 투입의 전제로 보았다. 파병을 위한 로비가 시작됐고 상황은 한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미중앙정보국 보고에 따르면 '천둥소리 작전'이 시작되자, 박정희는 극비리(top secret basis)에 한국 전투 부대 파병 준비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폭은 북베트남의 전의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피해가 컸지만, 북베트남은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원을 이어갔다. 지대공 미사일 앞에서 결전의 의지를 드러내는 북베트남 병사들. (Public Domain)

우레소리가 나긴 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전쟁 수행 능력을 무력화하겠다는 '천둥소리' 공폭은 오히려 북베트남의 전의를 다졌다. 첫째, 남베트남의 민족해방 전선을 지원하는데 엄청난 규모의 병기와 소비품이 필요하지 않았다. 게릴라전의 기본은 현장 조달이다. 둘째, 북베트남을 맹폭해도 사람들의 물질적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셋째, 폭력은 가해자도 지치게 한다. 특히 공폭은 고비용이다. 아무리 북베트남의 대공 무기가 부족하고 뒤졌다고 해도 추락하는 비행기는 있고, 생포된 미군 조종사는 북베트남인들의 전의와 사기를 높이는 전리품이 된다. 흔히 '하노이 힐튼 (Hanoi Hilton)'이라 불린 '호아로 교도소(Hoa Lo Prison)'에 갇혀 있었던 전쟁포로의 대다수가 항공기 조종사였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대사를 생각케 한다. "가난하고 만족하는 사람은 충분히 부유하다(Poor and content is rich, and rich enough.)" 북베트남이 그랬다. 은 미제 불발폭탄에서 얻은 폭약으로 자체 폭발물을 만들었다. 미국의 공격이 초래한 파괴는 상대적으로 복구가 빨랐다. 미국의 공폭으로 고층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스카이라인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미국의 공폭 작전은 역효과를 초래했다. 한 연구자가 잘 묘사했다. "폭격 전보다 더 많은 적이 나타났다. (There were clearly more of them (the enemy) than before.)" 하늘의 전쟁은 미국, 땅의 싸움은 남베트남에 맡긴다는 역할 분담론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1965년 3월 8일 미 해병 3800명이 남베트남 다낭에 상륙했다. 이제 미국은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음을 과시하는 더 많은 국기를 넘어 같이 싸울 군대가 필요했다. 더 이상 이 필연을 거부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호주, 필리핀, 태국, 한국, 심지어 파키스탄까지 포함된 병력이 있다면 남베트남 방어에 국제적인 색깔을 부여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데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A) force which had Australians, Filipinos, Thais, Koreans and conceivably even Pakistanis would give real international color to the defense of South Vietnam and would also have a substantial breaking effect on any possible Communist escalation.)"

존슨의 베트남 전략 수립자들이 언급한 다섯 나라 중 한국은 유일하게 부르기도 전에 가겠다고 답했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1965년 5월 박정희를 워싱턴으로 부른다. 미국이 전쟁판을 크게 벌여야 한국에 득이 된다고 확신했던 확전의 숙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박정희와 존슨, 그들의 마음에 전쟁을 이겨내야 하는 베트남인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도 '논라 (Non La, 베트남의 세모 밀짚모자)' 쓰고 있는 베트남인들은 '베트콩'일 가능성이 있다는 편집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제는 베트남인들에게 '논라'는 생필품이었다는 점이다.

비대칭 게릴라전-공폭 대응-외국 군대 개입 요구-한국군 파병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인물 연구가 있다. 케네디와 존슨의 국가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 (McGeorge Bundy, 1919~1996)이다. 베트남 전쟁은 보복전(reprisal)이란 개념을 만들어 냈다. 한 대 맞으면 꼭 10대로 보복한다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선제공격으로 바뀐다. 한 대 맞기 전에 맞을 것을 우려해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존슨(오른쪽)의 국가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왼쪽). 그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군사 행동은 북베트남의 사주를 받은 테러라며 북베트남에 대한 공폭을 정당화했다. 그의 제안대로 미국은 지속적인 보복성 공폭에 의존해 전쟁을 수행했다. (Public Domain)

번디는 평생 천재 소리를 들었다.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으로 한때 미국 최고라 불렸던 명문 그로튼(Groton ) 기숙학교를 다녔다. 학교 재학 중 그의 뛰어난 두뇌를 전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루는 그가 학급에서 발표해야 할 에세이 과제를 하지 않았다. 그의 순서가 오자 번디는 종이를 빼 들었다. 그리고 우수한 에세이를 읽어 나갔다. 아주 훌륭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읽은 종이는 백지였다. 그의 에세이는 머릿속에 있었다.

대학 진학에 필요한 입학 예비시험에 출제된 주관식 문제에 답하지 않고, 잘못된 문제라며 시험지에 자신이 새로 문제를 적고 답을 쓰고 나온 인물이다. 채점자가 처음에는 0점을 주었는데 나중에 100점을 바뀌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53년 34세에 하버드 역사 최연소로 문리대 학장 (Dean of Faculty of Arts and Science)이 된다. 한 하버드 교수는 그의 두뇌 회전 능력을 불꽃놀이(firework)에 비유했다. 문제는 그가 생각을 너무 빨리해 대화 대상들을 뒤에 남겨 놓고 혼자 달려가곤 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감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자신이 옳은지 돌아보는 데 필요한 판단기준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케네디-존슨 시대 연구자들은 번디를 최고로 꼽는다. 1996년 그가 사망했을 때 저명한 언론인이며 저술가인 월터 아이삭슨(Walter Isaacson)이 시사 주간지 ‘타임’에 게재한 부고 기사다. 여러 번 읽어도 매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의 레이저 같은 지성은 투명한 뿔테 안경 너머로 그의 차가운 미소만큼이나 뜨거운 강렬함으로 뿜어져 나왔다. 만약 그가 절반만 똑똑했다면,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주 보스턴에서 77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맥조지 번디는 냉철한 자신감으로 미국을 베트남 수렁으로 몰고간 지식인 엘리트의 오만함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His laser like intellect radiated from behind his clear-rimmed glasses with an intensity as hot as his smile was cold. Had he been half as smart, he might have been a great man. Instead, McGeorge Bundy, who died last week in Boston of a heart attack at 77, came to personify the hubris of an intellectual elite that marched America with a cool and confident brilliance into the quagmire of Vietnam.”

미국은 절대 옳고, 따라서 베트남에서 물러나면 안 된다는 그의 결의는 흔한 말로 '초전 박살' 개념이다. 맥조지 번디는 1965년 2월 존슨에게 보낸 전략 메모에서 "처음부터 미국이 구사할 수 있는 폭력의 수준을 확실히 하노이가 알게 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가 전쟁에서 "가장 큰 대담함이 가장 큰 지혜가 되는 경우가 있다 (There are cases in which the greatest daring is the greatest wisdom)"고 했는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번디의 사고가 그랬다. 공폭이 곧 지혜였다.

 

미국은 공폭에 다량의 네이팜 (소이탄)을 사용됐다. 사람을 포함해 목표물을 태워 없애기 위해서였다. 베트남인들의 공포와 분노의 대상이었다. (Public Domain)

번디는 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의 쁠래이꾸 습격 당시 사이공에 있었다. 나중에 현장을 찾아가 이 비대칭 공격의 파괴력을 직접 본 사실이 그의 정책 조언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그의 정책 조언이 베트남 불행의 씨앗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관련된 원고를 작성할 때 과거 한 편집자의 조언을 잊지 않으려 한다. 긴 인용문은 피해야 한다. 이유는 첫째, 필자가 지나치게 원저자의 연구에 의지하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둘째, 글 쓰는 이가 해야 하는 원문 분석을 독자에게 떠넘긴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지면이 산뜻해 보이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 원고 작성자가 원저자의 뜻과 뉘앙스를 풀어낼 자신이 없으면 긴 인용문이 낫다. 그래도 너무 길면 독자에게 이해를 구한다.

1965년 2월 번디가 존슨에게 전한 정책 제안의 핵심이다. (5000단어가 넘는 길이이니 미국의 헌법보다 길다.) 미국이 추가로 새로운 군사 행동을 하지 않으면 베트남은 수년 내에 공산화될 것이라고 전제했다. 

"베트남 전쟁의 위험은 매우 높다. 미국의 투자 규모는 매우 크며, 미국의 책임은 아시아는 물론 다른 지역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현실이다. 미국의 국제적 위상과 영향력의 상당 부분이 베트남에서 직접적으로 위태로워지고 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부담을 덜어줄 방법도 없고, 현재로서는 베트남에서 우리 스스로 협상을 통해 빠져나올 방법도 없다. 언젠가 불교 지도자의 지도 아래 중립적인 비공산 세력이 등장할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러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 협상을 통해 미군 철수를 결정한다면 (월부로 조금씩 값을 치르는) 단계적 항복을 의미할 것이다."
"The stakes in Vietnam are extremely high. The American investment is very large, and American responsibility is a fact of life which is palpable in the atmosphere of Asia, and even elsewhere. The international prestige of the United States, and a substantial part of our influence, are directly at risk in Vietnam. There is no way of unloading the burden on the Vietnamese themselves, and there is no way of negotiating ourselves out of Vietnam which offers any serious promise at present. It is possible that at some future time a neutral non-Communist force may emerge, perhaps under Buddhist leadership, but no such force currently exists, and any negotiated U.S. withdrawal today would mean surrender on the installment plan.”

요약하면 베트남은 더 이상 베트남이 아니다. 미국의 글로벌 냉전 전략의 시험장이다. 남베트남의 현재에 희망을 둘 수 없다. 협상을 통한 탈출은 없다. 철수는 항복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여기서 베트남에서 미국이 떨쳐내지 못했던 고질병을 본다. 번디 생각에 베트남의 모든 길은 하노이로 통했다. 그가 작성한 비밀문서를 박정희가 보았다면 아주 기뻐했을 것 같다.

"우리는 베트남에서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북베트남에 대한 지속적인 보복 정책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정책에 따라 북베트남에 대한 미 공군 및 해군의 (군사) 행동은 남베트남에서 자행된 베트콩의 폭력과 테러 행위와 연관되며 정당화된다."
"We believe that the best available way of increasing our chance of success in Vietnam is the development and execution of a policy of sustained reprisal against North Vietnam—a policy in which air and naval action against the North is justified by and related to the whole Viet Cong campaign of violence and terror in the South."

고전적 전쟁의 개념이 여기서 깨졌다. 전쟁에서는 나에게 총구를 겨누는 상대가 주적이다. 그가 왜 나를 해치려 하는지(전쟁 목적)를 파악해 반응해야 한다. 하지만 번디는 왜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이 미국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펼치는지 따지지 않았다. 게릴라가 미국을 공격하면 이는 남베트남의 자주와 평화를 보장해야 하는 미국의 합법적 책무에 대한 도전이다. 미국의 자동적 응징은 정당하다. 수백만이 목숨을 잃게 되는 전쟁을 마치 변호사가 법리를 다투듯이 접근했다.   

번디에게 보복은 '지속성'이 있어야 했다. "보복 공격이 정치적 의미를 가지려면 중단없는 작전을 해야 한다 (the political values of reprisal require a continuous operation)."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이게 지옥이 아닐지 생각이 들 정도로 베트남은 상식선을 넘는 파괴와 폭력의 전시장이 될 것이다. 차가운 지성의 천재 번디도 이 전시장의 기획자 중 하나였다. 

박정희가 늘 하던 말이다. 진짜 적은 북쪽에 있으니,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면 한국은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 그가 1965년 5월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오벌 오피스의 입장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이다. 따지고 보면 민족해방전선이 파병을 원하는 한국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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