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칼럼] 재미보다 '올바름'을 추구한 위대한 인물의 다큐

오동진 영화 평론가
오동진 영화 평론가

이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목의 맞춤법이 잘못됐거나 과거의 구어체를 차용하던 버릇을 그대로 가져온 것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제목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나온다. 총 러닝타임 126분 중 98분경 김대중의 육성을 대신한 배우 장현성의 목소리다.

나는 늘 길 위에 있었다. / 어디서든 부르면 달려갔다. / 그래서 늘 고단했다. / 많은 사람들이 내 연설과 삶에 박수를 보내고 격려했지만 / 돌아서면 외로웠다.

1982년 김대중이 정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석방 건의서를 쓰고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 한 말이다. 그는 미국 망명 2년여, 777일 동안 150여 번의 강의를 다녔다. 문동환은 그런 그를 두고 신들린 사람이라고 했다.

 

 영화 '길 위에 김대중'  포스터
 영화 '길 위에 김대중'  포스터

재미보다 ‘올바름’을 더 지킨 위대한 인물의 다큐

이런 얘기들은 어디서 알아냈을까? 다 기록에 있는 일일까? 과거에는 알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잊어버렸던 얘기였을까? 아니면 원래 모르던 에피소드였을까? 우리는 김대중을 얼마나 알까? 안다고 하면서도 모르고 모르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대중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길 위에 김대중’은 어쩌면 바로 그런 질문에 착안하고 있는 작품이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을 다루는 다큐의 모티프는 ‘새삼’이다. ‘새삼’스럽지만 다시 얘기를 꺼내는 것이고 ‘새삼’스럽지만 과거의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며 ‘새삼’스럽지만 역사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미래에 대해 각성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다큐는 기획 단계에서 역사적 정의(定義와 正義 둘 다)와 영화적 재미 사이에서 네 가지의 순열 조합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

정의롭고 재미있게 만들 것인가 정의롭지만 재미는 덜하게 만들 것인가 그게 아니면 정의는 불분명해도 재미만은 있게 만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정의롭지도 못한 데 재미도 없게 만들게 될 것인가이다. 최악은 맨 마지막일 것이다. 대개 그렇게는 안 할 것이다. 최고는 물론 첫 번째이다. 근데 그건 도통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런 다큐는 늘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서 헤매게 된다.

교과서적이면서 정치적으로는 옳은데(polictically correctness) 이른바 ‘노잼’이어서 꼰대 소리를 듣거나, 그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바이어스(bias)가 다소 보여도 정말 재미가 있어서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층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는 것이다. 굳이 다른 나라 극영화까지 끌어들여 예를 들어 비교하자면 영국 매튜 본 감독이 만든 ‘킹스 맨 : 퍼스트 맨 에이전트’같은 작품은 독일의 빌헬름과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이6세에서 이어지는 레닌과 히틀러를 동일선상에 놓고 역사 이야기를 구성하며 재미를 늘리려 했지만 역사인식이 워낙 왜곡돼 있어 국내에서조차 초반 흥행을 뒤이어 가지 못한 케이스의 영화였다. 극영화 감독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인데, 다큐멘터리라면 절대 삼가야 할 행보이다. 다소 극적 재미는 떨어지더라도 올바름에서 벗어나면 안 될 일이다.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한 장면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한 장면

김대중의 과거로 오늘의 민중을 가르치려는 작품

김대중 다큐가 가져가야 했던 노선으로 기획 단계에서 나름 심도 있게 검토했던 또 하나의 요소는, 관객층을 어떤 층에 맞추느냐였을 것이다. 김대중 다큐는 이른바 86세대라고 하는 50,60대가 주 관객층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들은 김대중에 대해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만을 선택하고 그들의 ‘입맛’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아마도 그건 일반 대중들을 위한 친절한 작품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 특히 다큐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늘 고민하게 된다.

‘길 위에 김대중’은 김대중이 걸었던 역사에 대해 거의 모를 것이라고 생각되는 20대와 30대, 심지어 10대를 겨냥한 작품이다. 역사에 대해, 한국 사회에 대해 잘 안다고, 나만큼은 나라와 역사를 걱정하며 산다고 하는 지식인층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 그것도 중학교 교육 수준의 대중들을 겨냥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쉽고 재미가 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감성으로 다큐의 오프닝을 깔아 놓은 것도 제작진과 감독 민환기의 노련한 전략으로 읽혀졌다.

‘길위에 김대중’은 오랜 기록 화면인 하의도 공중촬영 컷을 보여 주면서 시작한다. 김대중의 육성 내레이션이 깔린다. 그는 가난한 하의도에서 태어났고 7살 때 목포로 가기 전까지 살았으며 임금이 되고 싶었는데 옆집에서 왕이 될 상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에 기분 나빠 했다는 얘기가 이어진다. 대중들은 이런 에피소드를 좋아한다. 누가 어디서 어떤 꿈을 갖고 태어나고 자랐는가 하는. 지식인연하는 사람들은 김대중이 하의도 사람인 걸 새삼 왜 얘기하느냐 하지만 사람들은 아는 얘기를 다시 듣는 걸 좋아한다. 김대중 다큐는 잘난 척하는 식자층을 과감히 버리고 김대중과 김대중 정신을 다시 깨우쳐야 할, 지금 이 순간 이 시기의, 민중들을 위한 작품이다. ‘길 위에 김대중’이 아주 재미있는 작품까지는 아니어도 정의롭고 동시에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어떤 기층에 착지하려 했는가 하는 그 판단이 유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가 상당히 ‘브 나로드(인민 속으로)’하다는 느낌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다큐가 꼭 수행해야 할 ‘임무’는 과거의 역사성을 현재의 시의성으로 교차시키는 것이다. ‘길 위에 김대중’에서는 68년 박정희가 부도덕한 3선 개헌을 시도하고, 강온으로 분열된 야권이 이를 저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야당인 신민당은 급격하게 쪼그라든다. 그런 가운데 71년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중들은 박정희에 맞서 대권 경쟁에 나설 젊고 신선한 인물들을 갈망하게 된다. 이 얘기는 충분히, 지금의 시대적 코드를 대입해 치환시킬 수 있다. 불의한 검찰 정권, 여러 개의 신당 창당으로 쪼개지는 야권, 총선과 차기 대선 후보들, 이어지는 세대교체론 등등 ‘길 위에 김대중’을 보고 있으면 김대중이 과거의 행보를 통해 보여 준 정치적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 각성의 바늘이 꽤나 따끔하다.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한 장면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한 장면

인터뷰 대신 적합하고 유효한 자료로 채운 각고의 노력

‘길 위에 김대중’이 꽤나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온전히 푸티지(footage)의 다큐멘터리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큐는 기본적으로 방대한 자료 화면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너무 많으면 때론 너무 없는 것이 된다. 자료를 찾아내는 것은 그냥 자료가 아니라 적합하고 유효한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며 그건 때론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상황과 같다. 그것이 많은 다큐가 인터뷰 위주로 푸티지의 빈 구멍을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급격하게 재미를 떨어뜨리게 하는 요소가 된다. 이번 다큐에서 감독 민환기는 대면 인터뷰로 한겨레 정치부 기자 성한용이나 성공회 한홍구 교수 등 몇 명만을 배치하고 있는데 그건 아마도 이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조직 내의 김대중 자료를 제공했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적으로 볼 때 이들 인터뷰 삽입이 가장 튀고, 가장 어색했으며, 가장 안 좋았던 부분이다. 다른 사람의 인터뷰는 대체로 육성으로만 깔았는데 대체로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의 목소리 증언이었다. 비록 살아 있는 사람이고 현재성이 강한 사람이더라도 인터뷰는 육성으로 일관되게 가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이 다큐의 옥의 티이다.

그건 그렇다 해도 푸티지 하나만큼은 정말 제대로 찾고 올바르게 배치한 작품이다. 그건 감독과 제작진, 프로덕션의 취재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티지 하나하나, 그것이 사진 한 장이든 꽤나 긴 길이의 영상이든 뭐든 모든 자료에 대해서는 법적인 허가와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그 노력의 디테일이 돋보인다. 가장 좋은 장면은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인 4월에 수유리 한신대학교에서 있었던 김대중의 강연 영상 같은 것이다. 김대중 어록에 해당하는 전설의 유명한 발언은 이때 다 나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거기서 피를 토하듯이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한 죄로 우리가 어찌 공산당으로 몰리느냐! 우리 모두 파수꾼이 돼야, 전사가 되어야 한단 말이요. 그래서! 반역사적인 반민중적인 반민주적인 정권과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거요.” 1980년 한신대 강의가 있었다는 것을 젊은 대중 관객들이 새롭게 아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 밖에도 미국 망명 당시 ABC 앵커 테드 코플과의 인터뷰 영상은 처음 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어지는 푸티지의 ‘발견’이 꽤나 신선하다.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한 장면
 영화 '길 위에 김대중'의 한 장면

“민주주의는 돌아온다” 그 시대 그가 말했던 이 시대의 해법

전두환이 김대중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엮어 내란음모 사건을 기획하고, 그를 가둔 후 사형선고를 내렸을 때 그의 최후 진술은, 다시 말하지만, ‘새삼’ 감동을 준다.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한국에 민주주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한다. 이후 옥중서신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 나라를 이런 지경으로 몰고 간 자들에게 나중에 보복하지 말라, 인간 자체는 용서하라고 권한다. 그런 점 역시 꽤나 시의적으로 들리게 한다. 김대중의 그 같은 충언은 지금 이 시대의 해법과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좋은 장면은 김대중이 옥중에서 아내 이희호에게 편지를 쓰는 모습과 글을 다 쓴 후 담배를 피는 모습이다. 김대중이 평소 그 정도의 애연가였는지는 ‘새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장면에서 그는 꽤나 외로워 보였다. ‘길 위에 김대중’은 대중 속에, 민중 속에 있었지만 늘 군중 속의 고독에 시달렸던 김대중의 표정을 잘 캐치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게 만든다. 그런 법이다. 지도자는 늘 외로운 법이다. 그 외로움이 위대한 결단을 만드는 법이다. ‘길 위에 김대중’은 외로움과 결단 사이의 김대중을 추적하고, 그럼으로써 인간 김대중과 정치인 김대중, 지도자 김대중이 갖고 있는 진실의 골짜기를 잘 누비고 다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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