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킹만 사건이 증명한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
[베트남 참전 60돌]⑥ 통킹만 사건
합리적 분석의 천재 맥나마라의 허점
북베트남을 세계 평화의 적으로 설정
불확실한 정보에도불구 확전의 길로
입법부의 사명을 잊은 통킹만 결의안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이다.(The first casualty of War is Truth.)"
누가 먼저 말했는지 뚜렷하지 않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캘리포니아 출신 미연방 상원의원 히람 워런 존슨(Hiram Warren Johnson)이 한 말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비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us)가 먼저 일갈했다는 주장도 있다. 셰익스피어 수준의 짧게 정리된 깊은 성찰이어서 대개 말이 긴 정치인이 했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 마크 트웨인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진실’에 관한 한마디를 남겼다. "진실을 말하면 뭔가를 기억해 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If you tell the truth, you don't have to remember anything.”)고 했다. '내 기억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같은 표현이 앞서면 그 말의 진실성은 절감된다.
베트남 전쟁의 변곡점을 찾고, 더욱 확실한 사료를 발굴해 이견이 없도록 역사 사실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이견이 많은 작업이지만, 유독 한 사건에 대해서는 논쟁이 격렬하지도, 시끄럽지도 않다. 만일 베트남 비극의 변곡점을 투표로 정한다면 절대 다수표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1964년 8월 초 발생한 통킹만 사건 (Gulf of Tonkin Incident)이다.
이 사건이 비극의 변곡점인 이유는 사건의 규모, 인명 피해, 또 충격적 현장 때문이 아니다. 사실이 감추어지고 왜곡되면서 진실이 희생자가 됐다.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베트남 수렁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닌가를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해준 사건이다. 베트남 전쟁을 왜 미국화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이 사건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한 인물 연구가 필요하다. 로버트 맥나마라 (1916-2009)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국방부 장관을 지냈으니, 베트남 전쟁의 설계자란 호칭이 과장이 아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비극이 되게 한 '진실 희생'이란 자동차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말장난 (pun) 같지만, 그는 장관이 되기 전 포드 자동차 회사 사장이었다.) 운전자는 물론 린든 존슨이다. 마력이 엄청난 엔진의 이름이 좀 길다. 요즘 많이 사용되는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 의사결정 (Data-Driven Rational Decision-Making' 시스템이다. 정책 결정은 과학이어야 한다는 개념이기도 하다.
맥나마라는 평생 천재 소리를 들었다. 191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때로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기억으로 자신의 우수성을 소개했다. 여자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매달 시험을 치게 하고 성적순으로 자리를 정해 주었다. 반 전체 1등은 제일 왼쪽 줄, 맨 앞 자리에 앉았다. 맥나마라는 그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I worked my tail off” 했다고 기억했다. 신체의 끝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우리 말로 '뼈 빠지게'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 자리는 맥나마라 전용석으로 남았다. 어려서부터 경쟁이 주는 긴장감과 쾌감을 즐겼다.
캘리포니아 주립 버클리대학을 나와 1939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맥나마라는 바로 다음 해 하버드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어리지만, 제일 높은 연봉을 받은 하버드 조교수(Assistant Professor)였다. 삶의 중용한 전환점은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시력이 약해 전투병이 되지 못한 그는 육군 항공부대에 소속됐다. 거기서 통계학을 이용해 공습, 군대 이동, 후방지원 (병참)을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포드 자동차 회사에 '특채' 된 맥나마라는 44세에 이 회사 최고경영자가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최고 인재(The Best and the Brightest)로 행정부를 꾸리려 한 케네디의 인선 레이더를 맥나마라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포드 자동차 회사 사장 취임 두 달 만에 케네디의 국방부 장관이 됐다.
그는 1961년 1월부터 1968년 2월까지 7년간 케네디와 존슨 아래서 미국의 국방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케네디가 자신이 만나본 인물 중에 가장 똑똑하다고 평한 맥나마라가 세운 최장수 국방부 장관 기록은 앞으로 깨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맥나마라는 자신이 객관적 분석 과정을 통해 합리적 결론에 도달했다고 판단하면 주저하지 않고 직진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완전한 합리주의자(rationalist)란 자타 공인은 맥나마라를 불완전한 정책 결정자로 만들었다. 그의 사고 체계로는 수백만 톤의 폭탄을 쏟아부어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와 사회, 쾌속정으로 구축함을 공격하려는 비상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맥나마라가 1964년 8월 5일 미 상원 외교,국방위원회 합동 청문회에 앉았다.
위증은 중대 범죄이다. 미국의 행정, 입법, 사법부 모든 영역에서 위증하면 안된다. '(1) 중요한 사실을 어떠한 속임수, 계획 또는 장치로 위조, 또는 은폐하는 행위; (2) 실질적으로 허위, 사기적 진술이나 허위를 표현을 하는 행위; (3) 실질적으로 허위, 사기적 진술이나 허위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허위 문서를 작성하거나 사용하는 행위'로 유죄가 확정되면 벌금과 5년 이하의 금고형에 처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위증죄 처벌이 더 세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14조는 “이 법에 따라 선서한 증인 또는 감정인이 허위의 진술(서면 답변을 포함한다)이나 감정을 하였을 때에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8월 2일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USS Maddox)는 북베트남 해안에서 25~30마일 떨어진 공해상에서 직전 중이었다. 세 척의 북베트남 어뢰정이 매독스호에 접근해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매독스호, 또 인근 타이콘데로가(USS Ticonderoga)에서 발진한 전투기의 공격으로 세 대의 어뢰정은 침몰했거나 파손됐다.
맥나마라는 통킹만 사건은 이렇게 전했다. 뒤돌아보면 그의 발언은 앞의 법 규정에 대비할 때, 이 중차대한 증언은 위증에 가깝다.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맥나마라는 이 공격이 '고립된 사건 (isolated incident)' 아니면 북베트남의 판단 실수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재발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틀 후인 4일 제2차 공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건 발생 보고가 있던 그때부터 현장 증언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지만, 맥나마라는 확실한 도발로 결론짓고 존슨에게 응징을 조언했다.
“내 추정과는 달리 8월 4일에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데, 당시 3-6척의 북베트남 순찰선이 다시 매독스호와 추가로 터너 조이호 (USS Turner Joy)를 공격했다. 터너 조이호는 매독스의 항해 경로를 따라가기 위해 파견된 배였다. 이들은 북베트남 해안에서 60마일 떨어져 있었다.”
“공격은 밤에 발생했다. 매복 공격의 성격을 띤 고의적인 공격으로 보였다. 어뢰가 발사되고, 함선들을 향해 자동 무기 사격이 가해졌다. 함선들도 반격했다. 타이콘도레가호와 이 함선을 지원하기 위해 급파된 콘스틸레이션호 (USS Constellation)의 항공기들이 (공격받은) 함선들을 향해 출격하여 (북베트남) 순찰선의 사격에 응사했다. (이 교전으로) 순찰선 두 척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전은 2~3시간의 사격 후 중단되었다. 다음 날…대통령은 이 고의적인 공격, 명백히 고의적이고 사전 계획된 공격에 대해 군사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사건 발생 하루 뒤 그때 주어진 정보와 데이터에 기초해 최선의 결정을 했다는 설명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생각할 때 진실하지 않은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과 주변국, 미국, 한국 등 전쟁에 관련된 나라와 사람들이 당할 불행을 고려할 때 진행이 너무 급했다. 8월 7일 선전포고도 없는 전쟁에서 군 통수권자에게 군사 행동에 관한 '백지 수표 (carte blanche)'를 발행했다. 이제 베트남 수렁의 깊이는 곧 발목에서 무릎으로, 나아가 가슴 높이로 깊어질 것이다.
통킹만 사건의 진실 규명은 200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당시도 합리적 의심이 갔지만, 두 번째 공격은 발생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존슨 정부는 확전을 위한 명분으로 이 사건을 이용했다. 여기서 굳이 통킹만 사건의 진실 여부를 세세히 따질 필요는 없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의 전략적 사고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진실이 전쟁의 첫 희생자인가를 다시 확인하면 된다.
두 번째 공격이 있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1964년 8월 4일 존슨은 서둘러 텔레비전을 통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밤 11시 45 분, '자정 메시지'란 이름으로 기억된다. 존슨은 제한된 군사 충돌인 통킹만 사건의 의미를 증폭시켰다.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 군대를 직접 겨냥한 이 새로운 침략 행위는 미국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남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남베트남의 평화로운 마을 주민들을 향한 테러 공격에 이어 이제 미국을 향한 공해상의 공공연한 침략이 시작되었다.” (“In the larger sense this new act of aggression, aimed directly at our own forces, again brings home to all of us in the United States the importance of the struggle for peace and security in southeast Asia. Aggression by terror against the peaceful villagers of South Viet-Nam has now been joined by open aggression on the high seas against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게릴라의 군사 행동과 통킹만 공격을 세계의 자유인들을 위협하는 심각한 침략 행위로 규정했다. 남베트남의 하천과 남중국해 푸른 물이 공산주의 퇴치에 있어 같은 중요성을 획득했다. 베트남 전쟁은 더 이상 남베트남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전체 동남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한 전쟁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전쟁의 경계선이 사라졌다. 전설적인 밴드 비틀스의 노래 ‘Here, There, and Everywhere'의 가사가 떠오른다. 사랑하는 이와 늘 함께 있기를 원한다며 “여기에, 저기에, 모든 곳에 있을 것" (“I will be there/ And everywhere/, Here, there and everywhere.”)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미국의 전쟁터는 남베트남, 북베트남을 넘어 전체 인도차이나로 확장된다. 나중에 캄보디아가 '킬링필드'가 된 원인이기도 하다. 이 담화의 결론은 공산권 전체를 향한 경고였다.
“미국만큼 방대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대에 제한적인 군사 행동이라도 명령해야 하는 것은 엄숙한 책임이다. 하지만 나는 정부 안의 모두가 공유하는, 정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오늘날 평화를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 확고한 의지는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그 사명은 평화이다.”(“It is a solemn responsibility to have to order even limited military action by forces whose overall strength is as vast and as awesome as thos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but it is my considered conviction, shared throughout your Government, that firmness in the right is indispensable today for peace; that firmness will always be measured. Its mission is peace.”)
전쟁의 흐름과 깊이를 바꾸어 놓고, 미국을 베트남 수렁에 더 가까이 가게 한 통킹만 사건은 ABCDEF 로 정리할 수있다.
A: American Prestige (미국의 위신)
B: Basis (근거)
C: Confusion (혼돈)
D: Demonstration (발휘)
E: Expansion (확전)
F: Freehand (무제한)
이 분석은 Confusion, 혼돈에서 시작한다. 통킹만 사건과 관련해 가장 많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나중에 인터뷰를 통해 2일 매독스호 공격은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함정 갑판에 어뢰 파편이 떨어졌다고 했다. 사람을 시켜 한 조각을 자신의 사무실로 가져와 본 결과 실제 공격이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사실 규명에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두 번째 공격은 악천후에서 진행된 수중 음파탐지와 무선 신호 감청에 근거한 결론으로 신빙성이 없었다. 맥나마라도 인정했다.
"우리는 (그 공격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설령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첫 번째 공격에 대응했어야 한다는 강한 생각이 있었기에 존슨 대통령은 두 번째 공격이 있자 대응키고 했다.” (“we thought it highly probable but not entirely certain. And because it was highly probable, and because even if it hadn't occurred, there was strong feeling we should have responded to the first attack, which we were positive had occurred, President Johnson decided to respond to the second.”)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정책 실수에 대해서 맥나마라는 '그때는 그랬다'를 마치 화두나 되는 듯 붙들고 있었다고 느낀다. 참고로 1995년 맥나마라는 하노이를 방문해 생존해 있는 당시 북베트남 사령관들을 만났다. 두 번째 공격이 있었냐는 그의 질문에 베트남 쪽 인사들은 아니라고 확인해 주었다고 전했다. 그래도 어쨌든 한 번이라도 공격을 받았으니 보복은 불가피했다는 태도다.
어쨌든 '정당한 이유 없는 도발'이란 주장 자체가 틀렸다. 북베트남의 행동에는 ‘근거(Basis)’가 있었다. 미 해군 함정은 북베트남 해안 지역을 상대로 기물 파괴 등 교란 작전을 펴는 남베트남 비밀 특수 작전을 지원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으로서는 총을 가져다 준 자나 방아쇠를 담긴 자나 똑 같은 적이다. 매독스호나 터너 조이호는 공해상에서 단지 레이더를 돌리고 있던 군함이 아니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을 공중 폭격했다. 통킹만 사건은 단순한 해상에서의 군사 충돌 사건이 아니었다. 미국의 위신(American Prestige)이 달린 문제였다. 존슨의 표현대로 미국의 권위와 행동력은 전체 권역의 평화와 안보와 직결되었다.
존슨은 공폭을 명령했다. 전쟁은 프로 스포츠 게임과 같다. 힘과 기술을 발휘(Demonstration)해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야 한다. 관전자가 늘어나면 게임은 더욱 열기를 띠고 이를 인식한 선수의 행동은 크고 거칠어진다. 미국이 과연 북베트남의 도전에 어떻게 반응할까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 도전에 반응하지 않으면 미국의 권위가 떨어서 같은 도전이 다른 곳에서 발행할 수 있고, 미국의 보호를 받는 우방이 미국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이 논리에는 미국의 우방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노이를 때려야 한다는 사고가 읽힌다. 이런 전략이 초강대국 미국을 지금도 움직인다. 전쟁이 벌어지는 그 땅만이 전쟁터가 아니다. 미국에 의존하는 나라나, 미국의 약점을 노리는 나라 모두 전쟁의 무대 위의 미국을 바라본다. 이 관객들을 위해서도 물러나거나 패해서는 안된다. 글로벌 파워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통킹만 공격을 응징하기 위해 폭격기는 군사 경계선인 북위 17도 선을 넘어갔고, 전선은 확장(expansion)됐다. 북베트남 하노이에서 남쪽으로 300킬로미터 떨어진 빈(Vihn)지역의 초계선 기지와 인근 연료 저장 시설을 폭격했다. 공격에 나선 미군기 2대도 격추됐다. 베트남 사태를 근본적으로 민족 해방 투쟁으로 보지 않고 하노이, 나아가 베이징, 모스크바에 진짜 적이 있다는 전략적 사고가 굳어져 있었다.
통킹만 사건의 불행은 의회가 입법부이길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행정부는 '무제한(Free-hand)'으로 군사 행동의 선택권을 확보했다. 존슨은 대국민 담화 다음날인 5일 의회에 메시지를 전했다. 의회는 8월 7일 통킹만 결의안(The Gulf of Tonkin Resolution)을 통과시켰다.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결의안의 공식 명칭은 ‘동남아시아 결의안(the Southeast Asia Resolution)’이다. 명칭에서부터 이 결의안의 포괄성을 느낄 수 있다.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어디든지 적이 있는 곳은 공격 대상이 되었다.
베트남을 미국의 비극이 되게 한 원인 중에 정부의 ‘언행불일치 (Credibility Gap)’ 개념이 있다. 사실을 감추기도 하지만, 과장된 수사, 현실을 오도하는 부정확한 표현, 아전인수격 법 해석, 정부 권한의 확대 해석 등이 뒤섞인 언어에 진실이 담길 수 없다. 베트남 전쟁 기간에 정부는 불신의 대상이었고, 정부 지도자들에 대한 회의는 반전 운동을 격화시켰다.
통킹만 사건 뒤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은 분명한 확전이지만 평화를 위해 책임 있는 행동으로 포장됐다. 존슨은 이런 주장을 폈다.
“문제는 동남아시아 전체의 미래이다. 이 지역 어느 국가에 대한 위협은 (지역 국가) 모두에게 위협이며, 우리 모두에게도 위협이다. 우리의 목적은 평화이다. 우리는 이 지역에 군사적, 정치적, 또는 영토적 야망을 품고 있지 않다. 이것은 단순한 정글 전쟁이 아니라, 인간 활동의 모든 전선에서 (전개되는) 자유를 향한 투쟁이다.” ("The issue is the future of southeast Asia as a whole. A threat to any nation in that region is a threat to all, and a threat to us. Our purpose is peace. We have no military, political, or territorial ambitions in the area. This is not just a jungle war, but a struggle for freedom on every front of human activity.”)
앞에 언급한 대로 8월 7일 미 의회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존슨을 보안관으로 임명했다. 카우보이 영화에서 보듯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개척지 시골 마을 총잡이에게 보안관 배지를 가슴에 달아주고, 알아서 마을의 평화를 지키라 한 것과 같다.
“의회는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이 미군에 대한 모든 무력 공격을 격퇴하고 추가적인 침략을 방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처를 하겠다는 결의를 승인하고 지지한다." ("That the Congress approves and supports the determination of the President, as Commander in Chief, to take all necessary measures to repel any armed attack against the forces of the United States and to prevent further aggression.")
이 무한대 권한 부여에 근거가 있기는 하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의 국제적 평화와 안보 유지가 국가 이익과 세계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The United States regards as vital to its national interest and to world peace the maintenance of international peace and security in southeast Asia.)”
헌정의 요체는 '힘의 균형 (Balance of Power)'이다. 전쟁도 이 힘의 균형 안에서 이루어진다. 미국 헌법은 1조 8항에서 의회가 전쟁을 선포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통킹만 결의안으로 의회는 자신을 무력화했다. 1963년 말 1만 6000명의 군사 고문단이 1965년 말에는 18만 5000명의 전투 병력으로 늘어나고, 1967년에는 50만 명으로 치솟는다. 모두 300만 명 이상의 미군 병사가 베트남 전쟁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미 의회는 간섭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반전의 외침이 미국의 길거리, 광장, 캠퍼스를 뒤흔들어도 국회 의사당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직무 유기에 가까웠다.
맥나마라의 ABCDE가 미 의회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교만 (Arrogance), 호전성 (Belligerence), 자신감 (Confidence), 의지 Determination), 그리고 그와 동일시되는 자존심 (Ego)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