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패퇴한 식민지, '절친' 미국이 이어받아
[베트남 참전 60돌]① 베트남 전쟁의 기원
세계 공산화 막으려는 냉전 의식 전쟁 불러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도차이나 식민지화
호찌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 이끌어
베트남군의 무기는 화력이 아닌 인민의 힘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2025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50주년, 한국군이 참전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재미 역사학자인 이길주 시민기자가 [베트남 참전 60돌]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 기자는 1975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해 대학에서 미국역사를 전공했습니다. 럿거스 뉴저지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뉴욕시립대 등을 거쳐 현재 뉴저지의 버겐 커뮤니티 칼리지 역사학 교수로 있습니다. 또한 뉴욕/뉴저지를 중심으로 우리말 ‘역사 배움터’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길주 시민기자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미국의 정신사에서 베트남 전쟁의 뿌리를 찾아보겠다는 뜻을 전해 왔습니다. 이번 시리즈는 14개 주제로 나누어 주 2회 정도로 게재될 예정입니다. 필요와 사정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알림]
1965년은 굴곡 많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꼭 기억해야 하는 해다. 한국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타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해 5월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과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만나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의 밑그림을 그렸다. 10월 첫 파병이 이루어졌다. 선전포고도 없이, 망국으로 끝난 전쟁에 한국이 개입한 60주년을 맞아 이 역사의 경험을 되새기려 한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인간이 늘 하는 일이다. 전쟁의 종식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형제들이 커서 나이 들고 철들면 싸울 일이 없을까? 횟수는 줄어들지만, 싸움판은 커진다. 다툼 없는 날은 종말 아니면 신적 구원이 요구된다고 대개의 종교는 말한다. 그래서 전쟁을 깊이 되돌아보아야 한다. 다툼은 계속되겠지만, 충돌의 빈도와 폭력의 규모는 줄일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실존적 위협에서 벗어난 전쟁의 동기를 제거해야 가능하다.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분쟁이 아닌데, 죽기 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를 줄여야 한다. "전쟁은 단지 발명품일 뿐, 생물학적 필연성이 아니다(War is only an invention, not a biological necessity).”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의 촌철살인이다. 싸움의 이유를 계속 창조해서 필연화 하는 인류의 독창성을 둔화시켜야 한다.
히틀러와 제2차 세계대전이 생존과 전쟁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히틀러는 독일인을 우월한 지배 민족(Master Race)이라 했다. 독일 민족이 1000년 생존과 영화를 위해 땅과 바다 끝까지 통치해야 한다고 외쳤다. 따라서 우월 인종의 순수성과 능력을 저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그리고 천년 왕국을 지탱할 공간이 필요했다. 천한 슬라브 민족이 주제넘게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를 빼앗아야 했다. 이 극적이고 광적인 추상성을 전쟁의 구체적 목표로 설정해 독일인에게 주입했다. 결국 베를린에서 하늘길로 16만 3000㎞ 떨어진 모스크바를 함락시키려 러시아를 침공했고, 히틀러는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
1965년 대한민국은 3000㎞ 떨어진 땅 남베트남(월남, 베트남 공화국)에 전투 부대를 보냈다. 소규모 비전투 부대는 그 전 해에 갔다. 한자로 표현하면 抗湖(호찌민과 겨뤄), 援美(미국을 돕고), 衛國(나라를 지킨다)이 된다.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동기와 당위성의 중심에 한미 관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미국을 도와야 한다는 요구가 마치 교량처럼 앞뒤를 이어주었다. 이 다리를 건너 한국군은 베트남으로 갔다. 이 역사적 사건을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으로서 한미 관계를 분석해 보려 한다.
베트남 전쟁은 서세동점 역사 속의 전형적인 피지배 민족의 생존 투쟁으로 시작됐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화했다. 줄리어스 시저의 외침대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였다. 영국이 중국에서 한 것처럼 아편전쟁 수준의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고, 인도에서처럼 긴 세월을 투자한 것도 아니다.
19세기 후반 고작 10년 걸려 비교적 쉽게 차지한 땅에, 노동 착취를 통해 수익성 높은 수출 작물을 생산했다. 식민지는 프랑스에 민족의 우월감을 심어주었다. 자부심은 국력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꼭 붙잡고 있었다.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프랑스는 나치스 침공에 망하고도 식민지는 유지했다. 독일에 협력한 반대급부다.
미국의 대표적 흑인 사상가 윌리엄 에드워드 버가트 듀보이스( W.E.B. DuBois)의 지적대로다. 제국주의 나라들은 식민 통치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국력을 쏟고 전쟁을 꺼리지 않는다. 식민지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은 대수가 아니다. 식민지에서 빼앗는 다이아몬드와 코코아 같은 자원의 가치는 그 천배에 달한다고 했다.(“What do nations care about the cost of war, if by spending a few hundred millions in steel and gunpowder they can gain a thousand millions in diamonds and cocoa?”)
이 등식을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투쟁을 이끈 호찌민이 깼다. 베트남 민주공화국(1945년 독립선언. 1976년 이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군대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프랑스의 무릎을 꿇리고 인도차이나를 떠나게 했다. 호찌민의 3저(低)전략이 성공했다. 저비용, 저강도, 그리고 저기대치를 말한다. 최소한의 무기로 많은 프랑스가 군사 비용의 지출이라는 출혈을 하게 했다. 프랑스는 군비 수혈을 위해 미국에 매달려야 했다.
보응우옌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남 군대는 급소를 공격해 상대를 지치게 했다. 권투 경기에서도 본다. 낮은 자세로 파고들어 잽과 훅을 날리고 빠지면 화가 난 상대 선수는 강한 펀치를 날려 녹아웃을 노린다. 하지만 몸짓이 커지면서 에너지 소모가 늘어나고, 방어 자세가 흔들리면서 급소가 쉽게 노출된다. 프랑스가 그랬다.
게릴라전에 지쳐가는 프랑스는 일전 박살을 노렸다. 베트남 북서 지역 디엔비엔푸에 기지를 세웠다. 한 판 제대로 붙자는 메시지였다. 베트남 군대의 동서 이동로를 차단하겠다는 전략도 있었다. 프랑스는 기대치를 낮게 잡고 상대를 얕잡아 봤다. 디엔비엔푸는 성벽 없는 요새였다. 대규모 포격과 폭격 능력을 갖추었다. 위협적인 작전을 펼 수 있는 ‘외인부대’를 포함한 지상군이 주둔하는 난공불락의 베이스였다. 프랑스는 보응우옌잡의 군대가 결코 함락시킬 수 없다며 상대를 과소평가 했다. 나중에 미국을 무너뜨린 '힘의 교만(Arrogance of Power)'은 디엔비엔푸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군대는 화력으로만 싸우지 않았다. 인민의 힘을 믿었다. 독립을 위한 투쟁 의지가 국력이고 전력이었다. 여기에 1949년 공산혁명에 성공한 중국으로부터 군사 원조는 확대되어 화력도 향상됐다. 밀림에 길을 만들어 야포를 옮기고 이들을 밧줄로 묶어 디엔비엔푸 산 정상으로 끌어올렸다. 말 그대로 중세 수준의 이동 작전으로 프랑스의 요새를 포위했다.
베트남 군대가 고지대에서 산아래 디엔비엔푸로 포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과 대공(對空) 화기를 갖추면서 프랑스군의 생명줄인 공중 보급로가 끊겼다. 기대했던 미군도 오지 않았다. 전투 능력과 의지가 소진된 요새는 결국 베트남 군대의 돌격 작전 끝에 함락됐다. 베트남 군은 대포로 공격할 능력이 없다고 장담해 온 디엔비엔푸의 프랑스 포병 지휘관은 책임감과 수치심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가수다’란 가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 가수들이 참가해 탈락하지 않고 살아남는 생존을 위한 노래 대결이었다. 빠르고 경쾌한 리듬과 독특한 가사로 인기가 높은 한 유명 가수가 출연했는데, 청중의 평가에 따라 탈락했다. 현장의 몇몇 연예인들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판정 불복이었다. 게임 규칙이 바뀌고 탈락했던 그 가수는 예상 외로 다시 서바이벌 대열에 합류했다. 오래지 않아 이 프로그램은 종료됐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졌다. 베트남 민족 해방 투쟁이 세계적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탈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 만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탈락한 가수 프랑스 대신 마이크를 잡겠다고 그의 절친 미국이 나섰다. 프랑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을 갖춘 인류 역사상 가장 성량이 풍부한 가수를 자처한 미국은 프랑스가 떠난 자리에 나라를 세워주었다. 이 신생 독립 민주 국가를 지킨다며 군사 개입을 시작했다. 10년 뒤인 1965년 미국은 직접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냈다. 베트남 전쟁의 미국화 대열에 한국 군대가 합류했다. 이렇게 베트남 민족해방투쟁은 국제 전쟁이 되었다.
미국과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냉전 때문이다. 냉전 사고는 수심은 깊고, 대립의 공간이 넓은, 장르가 다양한 투쟁이다. 두 나라가, 또는 연합국들이 국경을 가운데 놓고 죽기 살기로 벌이는 실존을 위한 전쟁의 개념을 뛰어 넘는다. 먼저 나의 국가적 정체성과 이익을 설정하고, 이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를 악마화해 대결 구도를 공고히 한 뒤 대소원근(大小遠近)을 따지지 않고 충돌의 현장을 만들거나 뛰어들었다. 심지어 복싱 매치가 이루어지는 사각의 링도 냉전의 격전장이 될 수 있었다. 이 투쟁은 선택을 요구했다. 중간 지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양극 세계에서 나라들은 대부분 반공 아니면 반 또는 탈 제국주의를 첫째가는 국시(國是)로 내세웠다. 자기 캠프에 온 나라에 냉전의 종주 국가는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보상외교(Quid Pro Quo)를 펼쳤다.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동맹과 연맹이 살길인 역사가 냉전이다.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의 표현대로 작은 동물들이 호랑이 등에 타야 그나마 무엇이 되는 시대였다. 국가는 호랑이 등에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기준은 네 개다.
첫째는 직접적 위협(Immediate Threat). 누군가가 나에게 총을 쏜다. 둘째는 잠재적 위협(Potential Threat). 나에게 총을 쏠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상대가 존재한다. 셋째는 가상적 위협(Imaginary Threat). 나에게 총을 쏠 수 있다는 상상 속에 존재하는 위협이다. 넷째는 환각적 위협(Hallucinatory Threat). 환각 상태에서 귀신, 마귀, 외계인 또 벌레로부터 위협을 당한다고 믿는 상태이다. 뒤로 갈수록 현실성이 약해진다. 마지막 상태는 정신 이상으로 규정된다.
냉전 사고는 위협의 현실성을 극대화(비현실성을 극소화)한 이념이다. 냉전의 전략적 사고에서 인도차이나는 바다 한가운데 공산 팽창주의 쓰나미의 진원지와 같다. 위협은 갈수록 에너지를 더해간다. 승세를 타기 때문이다. 이 위협의 연쇄 반응을 처음에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이라 불렀다. 프랑스의 패배로 만들어진 빈자리를 미국이 채우면서 제기된 정당성이다. 도미노들이 넘어가는데, 어느 위치에 서 있는 도미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직접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미국의 냉전 전략의 매뉴얼과 같았던 1950년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 68호(NSC-68)의 결론이기도 하다. 세계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미정부, 국민, 그리고 전 세계의 자유 국민들이 냉전은 전체 자유세계의 생존이 걸린 실제 전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하다고 했다(“recognition by this Government, the American people, and all free peoples, that the cold war is in fact a real war in which the survival of the free world is at st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