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으로 소환된 끔찍한 강제징집 악몽

[ 시민활동가들을 만나다 ] 조종주 사무처장

강제징집 녹화 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강녹진)

병역의무를 악용한 독재정권의 악랄한 공작

운동권 학생에 고문 회유로 전향-프락치 강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미래 위해 증언-기록

"진상규명과 피해회복이 바른 역사의 시작"

2025-03-03     이득신 시민기자
이득신 작가

민들레에 ‘대리기사 이야기’를 연재했던 이득신 작가가 우리 사회 곳곳의 활동가들을 만나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터뷰 기사를 연재합니다. 이 작가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며 영화와 K팝 등으로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지만 쿠데타 세력이 도사리고 속이 곪아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편집자 주]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독재정권을 거치는 동안 국민들은 총칼의 위협 앞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그러나 모두가 숨을 죽이고 항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재에 맞섰던 4.19 혁명으로 대통령을 몰아낸 국민들이 있었고 김재규 장군의 거사로 유신정권을 끝장냈으며 6월 항쟁으로 40년 독재의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길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청년 학생들이 있었다. 독재 정권에게 그들은 눈엣가시였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이런 학생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학생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했지만 군대로 끌고 가서 격리시키는 방법으로도 학생운동을 억압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은 민주적 정당성 없이 정권을 획득하고 그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집·녹화 선도공작 및 프락치 공작을 자행하여 헌법이 부과하는 ‘병역의 의무’를 악용하고 ‘양심의 자유’ 등의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던 것이다. 당시 피해자들이 만든 단체가 바로 강제징집 녹화선도공작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녹진)이다.

 

2020년 11월 사자명예훼손으로 기소된 전두환 재판 당시 광주의 범원 앞에서 시위하는 조종주 사무처장.

조종주 씨에게 석 달 전 그날 밤은 악몽의 재현이었다. 시민단체 세미나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믿고 싶지 않았고 거짓말 같았지만 사실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차마 영상을 열어보지 못했다. 기어이 계엄령을 확인하는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지금까지 힘들게 꾸려왔던 일들이 모두 물거품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온몸이 굳어져 녹아내리는 듯했고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처럼 의지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국회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곳에 가면 또 다시 고문과 구타와 폭력에 맞서야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총을 맞고 어딘가에 쓰러져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녹진 조종주 사무처장의 12월 3일 계엄령의 밤이 그러했다. 81학번인 그는 전두환 시절 학생운동으로 강제징집된 후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은 당시 자행되었던 고문·폭행 및 가혹행위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계엄령이라니.

조종주 사무처장은 “우리가 겪었던 일이 다시 되풀이될 줄은 몰랐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국면에서 박근혜의 계엄령 시도가 있었으며, 당시에도 계엄령을 꿈꾸었던 자들이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윤석열의 계엄령과 내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건 우리가 과거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당사자인 우리가 반드시 이걸 해결해야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다진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강제징집의 역사는 한일 수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군사 정권은 병역의 의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세력을 군대로 보내버렸다. 전두환 신군부 들어서 강제징집은 더욱 교활하고 악랄하게 진화하며 학생운동 탄압의 도구가 되었다. 단순한 강제징집에서 벗어나 '녹화사업'으로 발전했다. 녹화사업이란 이른바 머릿속에 빨간 물이 든 학생들을 녹색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과정에는 폭행과 고문과 회유가 함께했다. 녹화사업의 프로세스를 그들은 매우 정교하게 꾸몄다. 심사와 순화 그리고 활용이라는 단계를 만들어 학생들을 분류했다. 한편에서는 전향공작을 진행하고 또 한편으로는 프락치라고 하는 이른바 역용공작(당시 정권이 사용하던 용어)을 시도했다. 어느 정도 순화가 이루어졌다고 판단되면 활용의 단계로 넘어가는데 그게 바로 프락치 활동의 강요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국방부, 내무부, 문교부, 검찰청, 병무청, 보안사령부 등 국가기관은 치밀하게 공모했다. 이들은 헌법과 병역법 등 법률을 위반하여 피해자들을 강제로 입영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녹화·선도 공작이라는 이름으로 고문하고 자신의 친구와 동료를 상대로 한 프락치 공작을 강제한 것이다. 한편 강제징집 녹화사업이 정치적 이슈로 불거지면서 여론이 나빠지자 공식적으로는 1984년을 기해 폐지한다. 하지만 ‘선도업무’라는 이름으로 비공식 계승된다. 녹화사업을 폐지한 후 1985년 1월부터 1988년 12월까지 보안사 정보처에서 미전역 녹화사업 대상자 193명과 운동권 출신자 약 1200명을 대상으로 동향관찰 및 순화 활용 공작은 계속되었다. 고문에 못 이겨 밀고자가 된 트라우마를 아직도 벗겨내지 못하며 살고 있는 피해자가 즐비하다. 그러나 어떤 이는 동료들을 배신하고 공직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김순호 경찰국장의 프락치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성균관대 재학 당시에도 활발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전력이 있다. 하지만 인노회 활동을 하던 동료들을 팔고 경찰에 투신하여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초대 경찰국장에 임명되었다.

 

1981년 11월 교내시위에서 연행된 후 징집된 정성희 열사. 1982년 7월 사망하였으며 강제징집으로 의문사한 최초의 사례이다.

한편, 강제입대는 운동권 학생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81년 11월, 학생 군사훈련을 위해 문무대로 향했던 고려대와 외대 1학년 159명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퇴학당하고, 군대로 끌려갔는데 이를 ‘문무대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은 5공 당시 강제징집과 녹화·선도공작의 초반부에 벌어졌다. 군대 한가운데에서 학원병영화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친 사건으로 고대생 109명과 외대생 50명이 학교의 제적 조치 후 군대로 끌려갔다. 전두환 정권은 운동권 서클 등에 가입하지 않았던 비운동권 학생마저 제적 조치하였고 그렇게 강제입대 당하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고문은 끔찍했다.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끌려가 이유없는 몽둥이 찜질을 당했고 이게 끝나면 통닭처럼 매달려 얻어맞아야 했으며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온몸은 불구가 되다시피 했다. 후유증으로 매일 밤을 통증의 고통에서 시달리기도 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도 했다. 살아 있어도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으며 고문실과 고문 경찰의 모습이 아직도 꿈속에서 어른거리기도 한다. 그런 자들에게 굴복했다는 치욕에 몸서리를 치는가 하면 더욱 심한 고문을 경험한 이들은 치욕마저도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고문에 길들여진 날들이 이어졌다.

강녹진은 2019년 12월 단체를 결성하면서 당시 연희동의 전두환 자택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진상규명 작업과 소송 등을 병행하며 나름의 성과를 얻기도 했다. 2023년 11월에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신원식에게서 국회 김영호 의원의 질의 과정에서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으며 그해 12월에는 국가 폭력 피해자로 정부를 상대로 벌인 소송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당시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강제징집·프락치강요 국가폭력 피해자인 故 이종명 목사와 박만규 목사에게 사과하며 항소를 포기한다는 보도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사과에는 진심이 필요하다. 정확한 형식과 내용이 포함되어야 하며 그 피해자들을 어떤 방식으로 구제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도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 장관들은 그저 말뿐인 사과에 그치고 말았다.

 

2019년 12월 전두환의 자택앞에서 강제징집 녹화사업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강녹진 회원들.

국가 폭력의 아픈 역사는 고스란히 개인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개인의 경험들을 기억하고 증언하고 기록하여 이를 역사로 세워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들이 모여 역사가 되고 그 역사가 더 나은 ‘다른 미래’를 열어줄 열쇠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에 두고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매일 작은 걸음이라도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강제징집은 명백한 불법 구금이었으며 녹화·선도공작은 불법 구금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락치 활동 강요와 정신개조를 목적으로 자행된 국가 폭력의 고문 행위였다. 강제징집과 녹화 선도공작 피해자는 공식 확인된 숫자만 3000명이 넘는다. 그중에는 돌아오지 못한 분들도 많다. ‘강녹진’은 진상규명과 피해회복, 가해자에 대한 법적 역사적 책임을 묻고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군 민주화, 재발 방지 대책 마련, 특별법 제정과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민하며 고통 받았던 기억들은 피해당사자에게는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이다. 그렇지만 그 기억이 모아져 진상규명을 위한 물줄기가 되고 그 물줄기가 역사가 될 것이다. 후손들에게는 우리가 겪어온 어두웠던 역사가 아닌 ‘다른 미래’를 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를 기억하는 자들의 것이어야 한다. 겨울바람은 살을 저밀 듯 매섭지만 때가 되면 봄은 올 것이고 나무들은 꽃을 피워낼 것이다. 계엄령의 밤이 지나 탄핵으로 내란이 종식되고 윤석열의 파면으로 정의가 세워지는 것이 당연하듯 역사는 그렇게 흘러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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