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잡하는 대리기사 : 주 100시간 일하는 사람들
[ 플랫폼의 노예들 : 대리기사 이야기 ⑭ ]
하루 16시간 일한 중국 배달왕 과로사, 남 일 아냐
투잡하는 문화예술인, 꿈 이루려 극한 노동 감내해
박사 과정 대학원생, 연구논문 쓰며 대리기사 병행
대출 빚 시달리는 식당 주인, 주 100시간 우스워
학창시절 노동운동 헌신한 선배는 건물주 되기도
9월 28일 정권퇴진 시국대회에 참여해야 할 이유
며칠 전 중국의 배달왕이라고 불리는 위안모 씨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났다. 그는 50대 중반으로 하루 16시간씩, 일 평균 10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고 하여 배달왕이라고 불렸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소득격차를 고려하여 환산한다면 우리 돈 5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플랫폼 배달노동자였다. 그는 평소처럼 오토바이 위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영원히 잠이 들고 만 것이다. 그는 오전에 5시간, 오후에 5시간, 야간에 6시간씩 일을 하며 간간이 오토바이 위에서 쪽잠을 자다가 돌연사 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나라 플랫폼 노동자의 실상도 사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경기가 갑작스럽게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투잡 하는 대리기사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특히, 오래전부터 문화예술인들은 대리기사를 주업화하면서 부족한 수입을 대리운전으로 충당하고는 했다. 병찬이는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리더이다. 그는 밴드에서 기타와 드럼을 담당한다. 원래는 드럼을 담당하지만 기타리스트를 구하기 어려울 땐 기타를 맡기도 한다. 그의 공연 기회는 많지 않다. 10여 년 전에는 홍대 인근 클럽에서 전담밴드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젊은 친구들의 감각에 밀려 1년에 고작 3~4회의 공연으로 그의 직업상 명맥을 유지한다. 몇 차례 음반을 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음반 기획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40대 후반의 밴드 평균 연령 때문에 공연계에서조차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음악인의 삶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학창시절 오랜 꿈을 포기하지 못해 다니던 직장을 10년 만에 접기로 했다. 2007년 개봉영화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을 보면서 그는 마음속 깊은 곳의 열정을 다시 찾아 낸 것이다. 밴드의 리더로서 그는 연습실 임대료 납부를 위해 야간 대리운전을 하고 있다. 월 100만 원의 임대료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하루 10시간 이상을 야간 노동에 할애한다. 그리고 오후 3시부터 8까지 하루 약 5시간 정도 기약도 없는 연습을 한다. 물론 공연 계획이 잡히면 대리운전을 포기하며 연습에 전념한다. 공연을 위해 생계를 포기하는 아이러니한 삶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을 일한다. 책임질 부양가족이 없는 미혼이라는 것에 오히려 감사해 하며 대리운전과 음악인의 삶을 병행한다.
내가 채준이를 처음 만난 것은 인천의 어느 외진 아파트 단지였다. 새벽 3시쯤 함께 번화가로 이동할 동료 대리기사를 찾는 과정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외모를 보며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185cm의 훤칠한 키에 준수한 용모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는 모델학과를 나온 현직 모델이었다. 대학시절 몇 번 런웨이에 섰던 것을 자부심으로 사는 30대 초반의 청년이다. 지금은 피팅모델로 모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모델의 일이 늘 있는 것이 아니고, 유명 모델도 아니라서 모델 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다. 부모님께 얹혀사는 터라 생활비의 일부를 분담해야 한다. 자신의 모델 경력을 바탕으로 여기저기 기획사와 방송국에 지금도 이력서를 보내고 있다. 자신의 꿈과 삶을 위해 그도 역시 대리운전을 한다. 낮에는 이력서를 돌리고 밤에는 취객들을 상대하며 쉽지 않은 투잡족의 길을 걷는다.
성진이는 신촌의 모 대학 공학계열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이다. 그의 어릴 적 꿈이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인생진로를 잠시 변경하기도 했다. 5년 정도의 대기업 생활을 경험했지만 기업에서 성공하는 삶보다 교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실험실에서 연구 자료를 정리하고 간간이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학과의 조교로 활동한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야간 대리운전으로 학비를 보충한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의 신분으로 정해진 휴일이 있을 리 없다. 물론 형식상 주말에는 쉰다. 그러나 교수의 호출은 주말에도 이어지기 때문에 휴일은 그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산학연대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할 때면 며칠씩 집으로 가는 길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의 야간 대리운전은 주로 방학 시즌을 이용해 이루어진다. 학기 중에는 간혹 시간강사로 소득의 일부를 충당하지만 방학 중에는 수입을 충당할 방법이 없다. 편의점 알바도 해봤지만 교수의 갑작스런 호출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노동은 되도록 피하고 있다. 성훈이는 지금도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을 위해 요령껏 눈치껏 야간 대리운전을 한다. 그도 역시 주 100시간을 일해야 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동철 형님은 고기구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규모가 제법 있는 식당이라 종업원 3명과 배우자와 함께 식당을 경영한다. 코로나 시절 영업 제한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함께 일하던 종업원 모두를 부득이 해고해야만 했다. 다른 식당의 경우엔 배달을 병행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았을 테지만 고기구이 식당은 성격상 배달이 쉽지 않았다. 몇 달 만에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코로나 시절이 길어지면서 은행 대출과 개인 빚으로 근근이 운영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마침 투잡을 찾고 있던 차에 손님으로 온 다른 대리기사를 통해 대리운전에 뛰어들었다. 마스크가 해제되고 코로나가 종료되면서 잠시 식당 경영에 전념하기도 했지만 그는 올해 1월부터 다시 대리기사 일을 하고 있다. 또 다시 경기가 어려워지자 부득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밤 8시 무렵부터 대리기사 일을 하고 이른 아침에 일을 마치면 그는 곧장 도매시장으로 달려간다. 고기와 각종 야채 등 식당 운영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하고 식당에 풀어놓은 후 아침 8시가 되어서야 휴식에 돌입한다. 그의 아내가 오전 11시 무렵 식당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하면 그는 오후 3시에 출근하여 식당일을 돕는다. 그리고 다시 8시부터 대리운전을 시작하는 무한반복의 투잡을 하고 있다. 그는 하루 16시간 씩 주 7일을 일한다. 주 100시간이 우습다며 그는 씁쓸해 한다.
그는 내가 존경하던 선배였다. 학창시절 자본주의 타파를 위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고, 졸업 후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삶을 살기도 했다.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지역에서는 워낙 유명인이라 그와 인사를 나누는 것 자체가 영광인 그런 선배였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한 때 수배자 신분이 되어 전국을 떠돌며 피신하는 유랑자 신세를 이어가며 운동권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내가 30여년 만에 다시 만났다. 시흥의 어느 번화가에서 어슬렁거리며 대리 콜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을 보며 서로 아는 체를 했다. 외모에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을 기억하는 모습이 남아 있어 서로를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을 때, 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는 나에게 변절자라며 농반진반으로 축하인사를 건네고 이후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대리운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대리기사와는 달랐다.
그는 부동산 경매업에 뛰어들어 어느덧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 작은 아파트와 상가를 몇 번 경매를 통해 매입하고 되팔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시가 20억이 넘는 건물주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경매에 나오기까지 얽힌 사연을 이해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터였기에 나에게는 그의 모습이 충격 그 자체였다. 부천의 살짝 외진 자신의 건물 세입자 식당에서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그의 종부세 비난을 들어야 했고 윤석열 정부에서 종부세를 감면해준 고마움을 설파하기도 했다. 대리기사는 그의 버킷리스트였다.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대리기사에게 야간 노동은 생계를 좌우하기도 하며 과로사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에게 대리운전은 건물주의 삶을 살며 경험해 보고 싶은 일종의 여가활동과 같았다. 그도 역시 낮에는 건물 관리하면서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주 100시간을 일한다. 건물 관리에 별도의 인력을 채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건비가 아깝다는 이유다. 생존을 무릅쓰며 일하고 있는 다수의 대리기사에게 그의 대리운전 일은 대단한 실례이고 다른 대리기사의 일을 빼앗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대리운전 중단을 요구했다. 젊은 시절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던 그가 지금은 극단적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건물주라는 사실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종종 만나서 소주 한잔씩 하자던 요청을 묵살하고 나는 그의 번호를 차단했다.
30대 중반의 준빈이는 한때 박근혜가 이끌던 새누리당의 당원이었다. 그는 평일 낮시간 편의점 알바를 겸하고 있다. 한때 나만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신조도 있었고 대부분의 가난은 없는 자의 게으름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던 그였다. 박근혜 탄핵이후 한때 정치로부터 멀어졌던 그는 최근 진보정당에 입당원서를 내면서 다시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으로 새로워진 계기는 최근의 경기 상황과 맞물려 있다. 다른 노동자에 비해 훨씬 힘든 하루 10여 시간의 야간 대리운전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경제 상황을 외면하는 대통령과 정부를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또한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현재의 시국 때문에 그는 다시금 분노하며 거의 매주 촛불집회에 참석한다.
내가 만난 투잡 하는 대리기사의 대부분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주일에 100시간의 극한 노동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할수록 더 극단적인 노동으로 이어지는 구조적인 문제를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근의 어려워진 경제 상황은 비단 대리기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엔 박정희 치하에 있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전두환 군사 독재를 목도했으며 민주화 이후 8번째 대통령을 경험하고 있지만 지금의 정권은 그동안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하고 해괴하기만 한 정권이다. 박근혜의 탄핵과 비교해 본다면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양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탄핵의 당위성이 깔려 있다. 9월 28일에는 전국에서 정권퇴진 시국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그날만큼은 야간 노동으로 피로하고 고된 몸을 일으켜 집회에 참여할 생각이다. 세상을 바꿔야 하는 민초들의 열망에 머릿수 하나라도 추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