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 대리기사의 생존 투쟁…누가 갑질을 하는가

[플랫폼의 노예들 : 대리기사 이야기 ⑤]

비와 낭만? 대리기사에게 비는 싸워야 할 대상

갑작스런 장대비 피하려다 골절상 입고 깁스 중

영화 '기생충'에서 갑과 을에게 비는 다른 의미

대리기사에게 갑질하는 고객도 평범한 소시민

전화 대신 앱으로 대리 호출하는 편리함의 이면

플랫폼과 스마트폰이 집어삼킨 노동의 신성함

'천공'이 상징하는 현 정부의 저렴한 노동 인식

2024-07-13     이득신 작가
이득신 작가

비 내리는 저녁이면 사람들은 한 잔의 막걸리에 해물파전이 그립기도 할 것이며 운치 있는 창밖을 바라보며 비와 낭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가끔은 옛 추억에 젖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과거의 회상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대리기사에게 비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대상이 된다. 비 내리는 날이면 유독 대리기사를 찾는 어플이 끊임없이 울려대고 전화를 통한 대리콜도 요동치지만 비를 뚫고 운전을 감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주말에는 고객을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준 이후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피하기 위해 달려가다가 눈앞의 턱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3주 진단의 골절상을 입어 깁스를 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이 시대 을과 을의 경쟁이 담겨 있다. 특이한 것은 갑은 전혀 갑질하지 않는 선량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돈지랄을 일삼는 갑은 착하고 선량하며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우아하고 럭셔리하며 위선적이지만 악의 모습은 생략된 갑이 을에게 한없는 동정을 베풀곤 한다. 기생충에서 '비'는 인상적인 장치로 관객들에게 나타난다. 갑에게 비는 운치와 낭만의 상징이며 삶의 여유와 아름다움마저 제공한다. 창밖의 비를 보며 느끼는 아름다움은 비의 낭만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을에게 비는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물리쳐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지하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폭우로 침수된 집은 결국 인간 승리의 현장이기도 하다. 비라는 장치를 통해 을은 무지하고 비루하며 세상의 모든 초라함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형상화한다.

 

호우 특보가 발효된 7일 오전 대전 서구 도심이 아침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가운데, 차량이 전조등을 켠 채 이동하고 있다. 2024.7.7. 연합뉴스

이러한 을들의 경쟁을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 갑이라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일 수도 있고 시스템을 장악한 집단일 수도 있는데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대리기사들에게 갑질을 하는 고객은 그저 취객일 뿐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고 오늘도 지친 삶의 현장에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한잔 걸치고 거나하게 취해버린 평범한 소시민이다. 낮에는 자신이 당하는 갑질을 견뎌야 하니 그 구조적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대리기사를 향한 가벼운 갑질로 내일을 준비하려 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사회의 말단 노동자인 대리기사는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인 갑질과 개인의 갑질을 온몸으로 버텨내는 중이다.

어쩌면 70~80년대 노동운동 시대엔 투쟁의 대상이 명확했는데 요즘은 명확하지 않은 대상 때문에 노동자의 인권이 더 심하게 묵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저임금 위원회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1만 30원으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노사정 협의체 형식을 띤 기구에서 결정한 일이다.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는 이미 7년 전 모든 대선 후보의 공약이었지만 이제야 겨우 열린 것이다. 식비는 한 번 오를 때마다 2000~3000원씩 오르지만 최저임금은 이제 겨우 1만 원이 넘었다. 1시간 일해서는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가는 비행기의 속도로 오르고 임금은 거북이의 속도로 진행 중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그 많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사용자 단체는 협의체에서 결정한 일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모든 책임을 피해간다. 사람이 갑질하는 세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구조적인 시스템이 갑질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자본이든 소자본이든 돈은 벌고 싶은데 인건비는 올려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심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 한 장면.

14세기 영국에서 농민 봉기를 이끌었던 존 볼은 '아담이 경작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대체 귀족은 누구였나?'라는 말로 당시 귀족들의 착취를 일갈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향해 이 질문을 던진다면 대한민국의 지배층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나라다. 스마트 폰을 작동하는 운영 체제가 안드로이드나 iOS인 것처럼, 이 나라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체계이다. 종교나 철학 또는 정치 시스템이 자본주의보다 우위의 개념이라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지만 실상은 기독교나 불교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그들의 방식대로 가동되는 것뿐이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는 갈수록 고도화하고 거칠어진다. 더욱이 스마트 폰의 탄생과 획기적인 보급은 사회의 모든 분야를 산업화시켜 핸드폰 안으로 몰아넣었다. 100원짜리 만화카페의 추억마저 스마트 폰으로 집어넣은 것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마저도 스마트 폰에 의존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제 스마트 폰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과 같다. 인간의 노동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스마트 폰은 노동을 하나의 상품으로 왜곡시킨다. 노동의 신성함은 사라지고 노동자의 인권은 묵살되는 세상으로 진행 중이다. 그 중심에 플랫폼 세상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화를 거듭한다.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의 유행은 전화를 거는 낭만이라도 존재했지만, 플랫폼이 '인력시장'을 이끌어 가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상품'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는 '앞뒤가 전혀 다른 플랫폼 대리운전'이 그 세상을 지배한다.

 

더불어민주당 김남근 의원이 5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온라인플랫폼법 발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7.5. 연합뉴스

플랫폼 기업 규제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꾸준하게 제기되었지만 언제나 성장과 산업의 논리가 우선이었다. 이것은 마치 산업과 환경이 충돌할 경우 언제나 산업의 손을 들어주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플랫폼 경제는 소비자 후생을 증진시키는 혁신이기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사회적 갈등과 진통이 다소 있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이를 감수하면서 산업 발전을 장려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토종 플랫폼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과감하게 규제를 완화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도 힘이 세다. 하지만 플랫폼 기업이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위험을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공론화해야 한다.

지금 플랫폼 노동의 문제로 언급되는 과제들은 대부분 이전부터 노동법을 회피하려는 다양한 탈법과 오래된 꼼수들이 새로운 이름표를 달고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이윤은 극대화하고 싶지만 책임은 지고 싶지 않은 기업들의 전형적인 횡포이며 이제는 플랫폼이라는 것을 등장시켜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몰아부친다. 전화로 부르던 대리운전 기사를 앱으로 호출하게 되면서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지금도 전화 대리를 통해 대리기사를 호출하고 있으나 이제 그 트렌드는 서서히 또는 급격히 앱으로 호출하는 방식으로 이동 중이다.

사용자 대신 알고리즘이 통제하게 되면서 노무 제공 관계의 모습이 달라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플랫폼 기업의 모든 사용자 책임을 일단 덮어줘야 할 면책특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해고를 일상적으로 정당화시켜버린 대한민국의 시스템은 항상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혁신을 강조하지만 그 혁신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혁신이냐고 묻고 싶은 지경이다. 과연 그 혁신이 우리 사회가 민주적 과정을 통해 그동안 쌓아 올린 가치와 질서를 양보하고, 구성원들 사이의 오랜 신뢰와 합의를 허물면서까지 감수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가죽을 벗기는(革新) 고통을 거쳐 거둔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천공 정법 강의 '대한민국 노동자 퇴치 운동' 영상. 2022.10..31. 유튜브 화면 갈무리

플랫폼 노동자들은 망명정부의 백성들과 같다. 다수가 존재하지만 아무도 돌보려 하지 않는다. 정부와 사회시스템이 나서서 노동자의 삶을 돌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정부가 노동자를 대하는 인식 수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저렴함을 자랑한다. 천공이라 불리며 도인 행세를 하는 자가 대통령의 멘토임을 자처한다. 대통령도 굳이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한 지인을 넘어서는 관계이 분명해 보인다. 그의 유튜브 채널에선 연일 대통령의 국가 운영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그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엄청난 기회가 온 것'이라고 표현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지난해 화물연대 파업 당시에는 '노동자 퇴치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망언을 내뱉어 전국의 노동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를 바퀴벌레 정도로 인식하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발언이었다. 현 정부가 취하고 있는 노동에 관한 기본 의식에는 노동자를 무시하는 시선이 깔려 있다. 노동자들은 무지하고 폭력적이며 외부인이자 이방인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이라는 용어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나라에서는 '근로자'라는 말로 부르기를 즐겨한다. 근로자라는 단어에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일꾼이라는 의미의 사용자적 관점이 짙게 깔려 있다. 통제와 억압을 통해 착취를 당연시하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근로자라는 용어에도 고스란히 묻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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