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고작 이 정도야? - 트럼프가 상징하는 것

1년 반 전에 정치생명 끝난 자의 부활

범죄자 기록 사진이 일약 순교자 이미지로

낡은 바이든- 추악한 트럼프 양자택일

2024-04-18     김평호 미국 톺아보기
김평호 저술가·전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정치는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거나 사기행각이다. 지난주 한국에서는 총선이 있었다. 결과는 야당의 압승. 이제 과제는 승리로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대선과 총선은 11월이다. 일곱 달 정도 남았다. 2020 바이든-트럼프의 재대결판인 올 선거에서 그들은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미국이 고작 이 정도밖에 못한단 말인가?’ 새로운 대안은커녕, 대선 가도에 돌아온 트럼프, 바이든과 트럼프가 재대결하는 2024 대선을 두고 한 언론인은 그렇게 탄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되든 딱히 기대할 건 없고, 미국은 지금보다 더 퇴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올 1월 아이오와에 이어 3월 수퍼 화요일 예비선거에서, 15개 주 중 버몬트 한 곳을 뺀 14개 주에서 모두 승리, 사실상 공화당의 대선후보로 확정됐다.

2024 미 대선, 트럼프 우세 속 아직은 예측불가

먼저 가장 궁금한 질문. 트럼프와 바이든, 두 사람의 재대결에서 누가 이길까? 4월 17일 기준, ‘270towin.com’이라는 선거통계 전문사이트에서 발표한 선거인단 예상 투표 결과는, 221 대 213으로 트럼프가 간발의 차이로 앞서 있다. 지난해 1월부터 올 4월 17일까지, 250여 회가 넘는, 모든 대선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한 수치다.

 

여기서 중요한 곳은 엷은 갈색으로 표시된 네바다, 애리조나, 미네소타,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등 8개 주다. 통칭 경합주(swing state)라 불리는 지역으로 어느 당이 승리할지 예측할 수 없는 곳을 가리킨다. 지도에 푸른색으로 표시된 지역(예: 태평양 연안과 뉴잉글랜드)은 거의 언제나 민주당 지지, 붉은색 지역(예: 남부와 북서부)은 거의 예외 없이 공화당 지지 지역. 이번 대선도 마찬가지다.

이들 경합주 중, 미네소타와 노스캐롤라이나를 제외한 6개 주를 별도로 '빅6'라 부르는데 그만큼 대선에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2016년 선거에서 트럼프는 이들 중 네바다를 제외한 5곳을 확보하면서 승리했다. 2020년에는 바이든이 이들을 모두 가져가면서 이겼다. 다만 유의할 것은, 두 경우 모두 박빙의 차이였다는 점. 요약하면 현재까지 판세는 트럼프가 약간 앞서고 있지만, 2024 대선은 아직은 예측불가다. 한때 바닥으로 떨어졌던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전세 역전이다.

 

2024년 3월 26일 자 트럼프 기소와 재판 관련 BBC 뉴스 실린 이미지.

1년 반 전 이미 끝났던 트럼프의 정치생명

지금부터 불과 1년 반 전만 해도, 공화당 내부는 물론, 정치평론가들, 언론매체들은 트럼프의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입을 모았었다. 2021년 1/6 쿠데타와 그 역풍으로 인한 정치적 타격, 그가 지원했던 인사들의 2022년 11월 중간선거 패배(예: 펜실베니아주 연방 상원의원, 미시간 주지사 등) 등이 배경이었다.

그즈음 이미 의사당 난입사태에 대한 대규모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7월부터는 트럼프에 대한 의회 조사위원회 활동이 시작됐으며, 사법당국의 조사도 본격적으로 개시됐다. 또 기밀문서 유출과 관련한 국가기록원의 조사도 진행됐다. 다음해 3월에는 기밀문서 유출 건과 관련, FBI도 수사에 들어갔다. 6월부터는 10차례에 걸친 쿠데타 청문회의 텔레비전 생중계가 시작됐다. 11월 중간선거에서 친트럼프 인물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전통적으로 야당에 유리한 게 중간선거지만 공화당은 상원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원도 한 자리 숫자 우위의 과반의석을 얻는 데 그쳤다. 사실상 패배에 가까웠다. 트럼프에 책임을 묻는 당내 여론이 일었다.

그런 분위기임에도 그는 2024 대선후보 출마를 선언한다. 그러나 당과 여론은 중간선거에서 19%라는 압도적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 플로리다 주지사 R. 드산티스를 차기 후보로 주목했다. 그즈음 USA 투데이 여론조사에서 그는 트럼프를 23%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미디어 재벌 R. 머독의 신문 뉴욕포스트는 그를 ’새로운 미래‘라고 부르며 표지기사로 다뤘다. 정치후원금도 드산티스에게 몰렸다.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23년 3월, 뉴욕 검찰은 회계조작-성관계 입막음용으로 지급한 돈을 변호사 비용으로 허위 처리한 것-혐의로 트럼프를 기소했다. 6월에는 기밀문서 유출 혐의로 마이애미에서, 8월에는 선거방해 혐의로 워싱턴과 아틀란타에서 각각 기소됐다. 트럼프와 사법당국의 공방이 본격화한 것이다.

끝났다는 곳에서 살아 돌아온 트럼프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트럼프는 올라선다. 뉴욕 기소 뉴스가 알려지자, 지지자들이 다시 뭉쳤다. 트럼프를 벌하려는 사법절차의 개시가 그들에게는 집결의 신호탄이었다. 드산티스를 단순 역전한 정도를 넘어 무려 35%나 앞질렀다. 한때 그를 멀리했던 당 지도부도 주변에 다시 모였다. 이후 6월과 8월에 세 건의 기소가 추가되자, 트럼프와 그의 선거팀은 사법 체계가 정치화됐다며 ‘박해받는 정치인 트럼프’라는 프레임을 유포시키기 시작했다.

 

2023년 8월 24일, 구금자 D. 트럼프. 수인번호 P01135809. 사진 왼쪽 위 표식은 아틀란타 풀턴카운티 공식 인장.

드라마틱한 반전이 여기서 일어난다. 반전의 계기는 트럼프의 경찰 기록용 사진(위)이다. 아틀란타에서 기소되자 트럼프는 법 절차에 따라 해당 지역 경찰 유치장에 재판 출석 확인차 구금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경찰 기록용 사진을 촬영한다. 공개되자마자 사진은 엄청난 속도로 온라인에 퍼진다. 성난 복수의 표정을 담고 있는 사진의 정치적 선전효과를 트럼프 측은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그는 ‘경찰 사진, 이건 그들의 선거 개입 증거. 나 절대로 죽지 않아(Never surrender)’라고 쓴 멘션을 사진과 함께 자신의 트윗 계정에 올렸다. 사법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바이든이 자신을 억압하는 것이라는 프레임 전환용 선전이었다.

효과는 탁월했다. 반대자들에게 사진은 범죄자라는 증거였지만, 지지자들에게는 박해받는 정치인 트럼프라는 메시지를 확인해 주는 증거였다. 이렇게 그는 자신을 ‘딥 스테이트’의 음모에 희생된 정치적 순교자로 자리매김했다. 선거팀에 따르면 사진 트윗 이틀 만에 무려 7백만 달러의 정치헌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9월이 되자 지지율은 드산티스와 45% 차이를 보일 정도로 수직 상승했다.

공화당은 그즈음인 8월 23일 밀워키를 시작으로 24년 1월까지 다섯 차례의 예비후보 토론회를 개최한다. 다섯 번째 마지막 토론회는 첫 경선 투표가 시행되는 아이오와에서 열렸다. 트럼프는 이 다섯 차례 토론회에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 시간 그는 다른 지역에서 자기만의 선거운동을 벌였다. 트럼프의 불참에 다른 후보들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비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그를 지지한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지지자들도 그의 불참을 그리 문제 삼지 않았다. 난공불락의 파죽지세였다. 다른 후보들은 지지율에서 애초부터 경쟁이 되지 않았다.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다섯 차례의 후보 토론회는 그를 위해 준비한 대관식이었다고 썼다.

퇴보하는 미국 정치가 만들지도 모르는 ‘독재자’ 대통령

지난 3월, 메릴랜드주에서 열린 ‘전미 보수정치 대회(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 약칭 CPAC)’에서 트럼프는 이렇게 외쳤다. ‘11월 5일은 우리에게는 승리의 날이, 저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 우레와 같은 박수가 대회장을 흔들었다. 그는 그렇게 대선 가도에 돌아왔다.

 

2024 대선을 향해 뛰는 트럼프를 표지로 올린 2023년 4월 21일 자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법정의 판결만 없을 뿐 트럼프는 범죄자다. 두 차례에 걸친 탄핵과 1/6 쿠데타 청문회는 그 죄를 물으려는 정치적 시도였다. 정쟁이라며 거부하는 공화당의 비협조 속에 실패했다. 사법적 책임을 묻는 기소가 이어졌다. 수사와 기소에 이르는 과정에서 트럼프는 범죄자가 아니라 정작 체제와 맞서는 투사로 비쳤고 사법절차는 오히려 정계 복귀의 디딤돌이 됐다. 한편, 비판적 학자나 주요 언론, 나아가 1기 트럼프 정부의 몇몇 보좌관과 각료들까지, 트럼프가 가져올 민주주의 위기, 나아가 독재적 통치를 우려했다. 그러나 비판은 그에 대한 높은 지지 열기에 묻혔다.

결국 범죄자가 대선 후보가 됐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는 공화당 안에서도, 밖에서도 트럼프에 맞설 대안을 내지 못한 미국 정치의 무능함이다. 공화당 대선 예비 후보자들은 조연에 불과했다. 민주당도 사정은 같다. 인지능력 문제까지 제기된 데다, 가자전쟁 정책에서 드러나듯 네오콘과 다름없는 군사주의자 바이든은 대안이 아니다. 예비후보 선거에서 예상보다 훨씬 높게 나타난 반바이든 투표(예: 특히 경합 주인 미네소타 19%, 미시간 13%, 노스캐롤라이나 13%, 위스콘신 8%)가 그 증거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인종주의자임을 공언하는 트럼프에 대한 흑인과 히스패닉 등 소수민들의 지지율이 앞선 선거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의 3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흑인의 트럼프 지지율은 2020년 3%에서 2024년 무려 23%로 치솟았다. 그리고 민주당이 백인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잃은 지는 30년이 넘었다.

트럼프는 난동의 쿠데타로 임기를 마친 추악한 정치인이다. 그런 사람이 가장 큰 정치의 무대로 돌아왔다. 당선되면 ‘독재자(dictator)’가 되겠다거나, 낙선하면 ‘유혈사태(bloodbath)’가 벌어질 것이라 협박하는 인물이 대통령의 권좌에 다시 앉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그가 기소된 네 가지 형사 사건 중 첫 번째 재판이 이번 월요일(4월 15일) 뉴욕에서 열렸다. 나머지 세 건의 재판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전직 대통령이 형사재판에 회부 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설령 유죄판결이 나도 헌법상 그의 대선 후보 자격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낡은 바이든-무뢰배 트럼프, 막막한 선택에 몰린 미국민들

1974년 거짓말이 탄핵 사유가 되고 그것으로 대통령이 물러나던 나라에서, 꼭 50년이 지난 2024년, 쿠데타의 주범이 탄핵은커녕 대선후보로 당당하게(?) 복귀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역사는 다시 위험한 길로 빠질 수 있다.’ 영국의 가디언은 그렇게 경고했다. 프랑스 르몽드는 ‘미국 민주주의는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라고 개탄했다.

낡고 노쇠한 바이든과 난폭한 무뢰배 트럼프라는 막막하기 짝이 없는 선택밖에 없는 미국민들이 누구보다 큰 피해자다.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정당, 자기 정화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정치, 시민적 양식에 기초한 정치적·도덕적 올바름을 경시, 혐오, 증오하는 사회가 합해 낳은 악몽과도 같은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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