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이어 ‘검찰정권’의 장기집권 지켜봐야 하나
[관료의 나라 ⑪] 검찰, 무엇이 문제인가(1)
세계에 이런 검찰은 없다
<‘검찰공화국’이라는 말은 이미 생소하지 않다. 이 ‘검찰공화국’에서 검찰은 당연히 최대 화두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 검찰의 생성부터 그 권력 확장 과정은 세계 검찰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검찰,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본고에서는 한국 사회의 키워드인 이 검찰의 문제를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국가권력과의 대결, ‘항명’ 그리고 ‘장악’
검찰조직은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유신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그 권력을 과잉 팽창시켜왔다. 마땅히 이를 견제했어야 할 정치권은 오히려 방조하고 또 편승해오면서 검찰조직은 오늘과 같이 초권력기관화할 수 있었다. 본래 검찰조직이란 전체 검사가 상명하복을 바탕으로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유기체적 조직이라는 이른바 ‘검사동일체’ 원칙이 작동되는, 군대와 유사한 성격을 띠는 집단이다. 이 조직은 이전 시기 권력집단화한 정치군인 세력이 그러했듯, 국가권력 장악의 길로 걸어갔다.
이 과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필연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정치사에서 자주 목격된 바와 같이, 과잉 권력화한 집단의 권력 확장 욕망은 필연적이다. 이 땅의 검찰권력은 군부가 퇴진하면서 ‘법과 관료의 지배’가 제도화된 87년 이후 비약적으로 강화되었으며, 이제 가히 국가권력과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검찰권력의 국가권력을 향한 권력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에 이미 본격화되었고,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법무장관에 대해 검찰이 대대적 조사에 나선 것은 사실상 ‘항명’이었다. 그리고 검찰 조직은 정치권의 무능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였다.
항룡유회(亢龍有悔), 솟아오른 용은 후회하게 되는 법이다. 길고도 길었던 군사정권 시대에 이어 우리는 이제 ‘검찰정권’의 장기집권까지 겪어야 하는 것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군대는 총칼이라는 무력에 의한 강압 지배로서 불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지금의 검찰권력은 ‘법치’와 ‘합법’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기 때문에 군사정권기보다 고도화된 난관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권력의 기원, 일제강점기부터 유신 그리고 현재까지
검찰이 지닌 그 뜨거운 권력의지의 기원은 멀리 일제 강점기의 조선형사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1912년 조선형사령을 제정하였다. 다른 법률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일제를 통해 계수되었다. 일제는 프랑스의 치죄법을 모방하여 치죄법을 제정했는데, 본래 프랑스 치죄법은 사법 기능의 분리 원칙에 의하여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일제의 치죄법과 이를 의용(依用)한 조선형사령은 검찰이 수사와 기소를 주도하는 주체로 규정되었다.
특히 조선형사령은 철저한 식민지배를 위해 영장제도를 배제시켜 검사와 사법경찰에게 예심판사에 준하는 강제처분권을 부여하였다. 이 ‘조선형사령’은 검사가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도 “급속한 처분이 요하는 때”는 공소 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검증, 수색, 물건 압수를 하거나 피고인과 증인을 신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 검사에게는 20일 이내의 피고인 구류권도 허용했다. 판사의 영장 없이도 피의자를 일정 기간 붙잡아놓고 강제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급속한 처분이 필요한 때”라는 불명확한 규정에서 그 판단의 주체는 전적으로 검사에 쥐어져 있었다.
세계 법률사상 일찍이 유례가 없는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인신구속과 구금이 가장 필수적인 요소로 파악하였다. 그리해 조선 총독을 정점으로 총독이 식민지 검사를 임명하고 그 하부 보조기관으로 사법경찰관을 배치하여 인신구속과 체포를 무소불위로 자행함으로써 식민지통치 권력의 극대화를 꾀했다. 이 조선형사령이라는 악법에 의해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이러한 독소 조항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악명 높았던 ‘일제 순사’라는 이미지 때문에 경찰에는 수사권을 부여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결국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 경찰을 견제한다는 명분 하에 미군정법령은 “검사는 수사권을 가지고 수사에 관하여 사법경찰을 지휘, 감독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박정희 유신을 거쳐 지금까지 백 년의 역사는 이 땅 검찰이 최고의 특권적 권력기관으로 전화되는 과정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헌법에 규정된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우리 헌법 제12조 3항에는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규정은 곧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규정이다. 이러한 조항이 헌법에 규정된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오늘 우리 검찰이 만천하에 과시하고 있는 뜨거운 ‘권력의지’는 바로 이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조항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문제의 이 조항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헌헌법에는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지금처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명문화된 것은 바로 박정희 군사쿠데타 직후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개정한 헌법부터였다.
절대권력을 향한 유신권력과 검찰 권력의지의 결합
본래 ‘영장주의’란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한 장치이다. ‘영장주의’란 수사기관의 강제 처분은 반드시 법관에 의하여 사전에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인신구속을 수사기관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으며, 영장발부 권한은 법관에게 전속되어 있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이렇듯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영장주의를 천명하는 헌법 조항에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유일한 영장청구 주체로서의 검찰’ 규정은 ‘영장주의’의 본질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며, 그 취지와도 필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규정일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이러한 ‘검사의 독점적 영장청구권’ 규정은 한국 외에 세계 어느 나라 헌법의 영장청구 조항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라는 이 규정은 박정희 유신헌법에서 한 발 더 나가 “검사의 요구에 의하여”로 다시 개정되었다. 검사의 영장청구 권한을 더욱 강화하고 상대적으로 법관의 영장발부에 대한 재량은 축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는 결국 검찰의 권력 의지와 절대 권력을 행사하려는 박정희 유신 체제의 권력 의지가 결합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유신헌법 제정의 핵심 인물이 바로 검사인 김기춘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권력 의지를 발현시킨 검찰은 이를 토대로 이후 단 한 번의 좌절도 없이 그 특권을 강화, 확대재생산해왔다.
눈앞의 권력에만 매몰돼 민주주의의 기본에 눈감아온 정치세력
10·26으로 열린 1980년의 ‘서울의 봄’, DJ와 YS의 신민당은 당연히 자신들이 권력을 손에 넣을 것으로 낙관했다. 이들은 그리하여 헌법 개정에서 이 영장청구 조항도 중시하지 않고 단순히 유신 헌법의 “검사의 요구” 규정을 이전의 “검사의 신청”으로 돌려놓을 것만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당시 헌법 개정 작업에 참여했던 대한변협은 “검찰의 신청이나 요구” 규정 자체를 삭제하고 단순히 “법관이 발부한 영장”으로 수정할 것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6월 항쟁으로 다시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눈앞에 권력에만 급급했던 야당 정치권은 오직 직선제 하나만 고치면 권좌에 오를 것이라고 다시 ‘착각’하면서 헌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았다. 문제의 헌법상 검사의 영장청구의 독소 조항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라는 그야말로 미사여구의 수식어만 앞에 붙이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바꾸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다시 한번 헌법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치인들은 온통 눈앞의 권력 장악에만 도취된 채 허송세월하면서 결국 헌법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헌법 개정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지금 이 나라에서 극적으로 현시되고 있는 검찰의 무소불위 절대권력이 만들어지는 데 정치권의 책임은 결코 작지 않다.
세계 검찰역사에 이런 검찰은 없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검사가 보유하고 있는 기소권 하나만 해도 매우 치명적인 엄청난 권한이다. 그것은 한 개인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는, 한 마디로 생사여탈권이다. 따라서 이 기소권이란 진실로 엄정하고 신중하게 행사되어야 할 권한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이 기소권은 여러 기관으로 분산되어 균형을 취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 기소권이 검찰에 완벽하게 독점되어 있고, 더구나 이를 견제할 아무런 장치도 존재하고 있지 못하다.
기소권을 이렇듯 완전하게 독점하고 있는 우리나라 검찰은 세계 검찰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방대한 규모의 수사 인력을 보유하면서 수사권도 행사한다. 기소권과 수사권의 결합은 현실에서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드러낸다. 일단 검찰이 혐의를 두고 시작한 수사는 검찰의 기소독점 조건에서 전혀 견제되지 않은 채 대부분 바로 기소로 이어지게 된다. 갖가지 잘못된 수사와 무리한 수사, 표적수사 그리고 편파수사도 모두 기소로 이어진다. 이러한 검찰의 수사-기소로 이어지는 과정을 외부에서는 전혀 통제할 제도와 수단이 부재하기 때문에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각종 위법 수사와 망신주기식 수사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등 사건 왜곡과 조작도 자주 벌어진다.
검찰의 이른바 ‘먼지털이식 수사’도 유명하다. 한가지 범죄 혐의를 고발 받아 수사를 하면 그 범죄 혐의에만 집중해야 하지만, 수사를 시작하면 광범위한 수사를 펼쳐 추가적인 혐의점들을 확보해나가고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결국 일단 검찰의 수사대상으로 올라간 대상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등 정보 흘리기라는 언론플레이가 함께 이뤄지면서 그대로 눈 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다. 위조한 증거를 사용해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도 실제로 있었고, 일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인사를 감옥에 보내기 위해 증인들에게 허위증언을 사주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외부의 친검찰 단체를 사주해 형사 고발하도록 한 뒤 이를 토대로 수사와 기소를 진행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런 객관적 조건에서 검찰 권력은 갈수록 막강해지고 특권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특권화되고 부패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 검찰은 형사 절차에서 재판권을 제외한 거의 모든 권한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검찰은 영장청구권을 포함한 직접 수사권과 수사지휘권, 불기소권을 포함한 기소권과 공소유지권을 가지고 있으며, 재판 이후에는 형 집행권까지 행사한다. 전 세계 검찰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찾아볼 수 없는, 가히 ‘초특권적’ 권한이다.
수사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기소권을 독점한 이 나라 검찰은 언제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사건’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사람이라도 검찰이 마음 먹으면 그 누구도 그 화살을 피할 수 없다. 먼지털이 수사를 통해 어떠한 사소한 사건이라도 만들어내고 갖은 망신주기식 수사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탄시키며, 또한 시도 때도 없는 마구잡이 수사로 한 개인을 결국 극단적 노이로제에 몰아넣게 된다. 검찰수사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은 그야말로 막강한 권한을 독점하고 외부에서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검찰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미국 검찰? 우리 검찰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대한민국에 미국을 너무나 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에서 검찰은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기소되었다. 바로 뉴욕의 대배심(Grand Jury)이 기소를 결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소’라 하면 곧 검사의 ‘독점적’ 권한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검사가 판사에게 기소 요청을 하면 판사는 16인에서 23인으로 구성된 대배심원단을 소집한다. 대배심원단은 18세 이상의 모든 시민권자를 대상으로 무작위로 선정되는데, 대배심은 피의자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는데, 이는 검찰의 부당한 기소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한다. 또 독자적으로 범죄 혐의자를 기소할 수 있는 권한도 보유하며, 이는 고위공직자 범죄 등의 각종 범죄를 수사하는 역할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의 경우 검찰의 중립성 확보 차원에서 대배심원에게 기소 권한이 주어진다.
한편, 미국 검찰은 연방검찰과 주(state) 검찰로 이원화되어 있다. 연방검찰은 93개의 지역검찰로 나뉜다. 93명의 검사장이 각 지역의 검찰청을 지휘 감독하며, 이들 검사장은 대통령이 지명한다. 그러나 이들 93명 모두 예외 없이 의회의 청문회를 거쳐 인준을 받아야 임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편향을 드러내거나 논란이 있는 경력의 인사들은 인준 과정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검사장 임명과정에 국민의 대표기관의 강력한 견제가 작용하는 것이다.
주(state) 정부 소속 검찰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하다. 주 검사장(법무장관)과 카운티(시) 검사장 모두 선출직으로 구성된다.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검사장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선출된 검사장은 임기가 확실하게 보장된다. 우리 검찰의 철칙인 검사동일체의 조직 논리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
특히 미국은 공소권 운용과정에서 검사의 직권남용, 직무 태만 및 위법행위 등이 있을 때 검사를 해임, 면직시킬 수 있는 해임제도(removal)가 있다.
우리나라 검찰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사회에 미국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만, 정작 이런 시스템은 배우지 않는다.
검찰의, 검찰에 의한, 검찰을 위한 ‘법치’와 ‘공정’
2013년 3월 이른바 ‘별장 성접대 동영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부터 동영상 속 인물은 검찰 출신인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으로 알려져 있었다. 경찰 수사결과 등으로 이미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무려 6년 동안이나 ‘김학의’를 ‘김학의’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제 식구 감싸기’ 비판이 쏟아졌다.
별장 동영상을 확보한 경찰은 김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모씨를 특수강간 혐의 등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였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피해자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진술을 번복해 진술의 일관성이 없어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진술 외에 다른 증거가 없었다”라는 이유로 김 전 차관을 무혐의 처분하였다. 당시 경찰 내부에서는 “사실상 검찰의 수사 방해에 이은 봐주기 수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신청한 김 전 차관에 대한 네 번의 통신사실 조회를 비롯하여 두 번의 압수수색영장 신청 그리고 두 번의 출국금지 요청 모두를 검찰에서 계속 반려하였다.
그 뒤 원주 별장 등에서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이 2014년 김 전 차관 등을 고소했지만,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김 전 차관에 대해 또다시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검찰은 “동영상에 등장하는 여성이 당사자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아 피고소인 조사는 하지 않았다”라면서 김 전 차관에 대한 소환조사도 하지 않았다.
2018년 4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김 전 차관 사건을 재조사하도록 대검찰청 진상조사단에 권고하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다. 김 전 차관은 자신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타이로 출국을 시도했으나, 법무부의 긴급 출국금지 조치로 실패했다. 마침내 김 전 차관과 윤중천이 2019년 6월 4일 구속 기소되었다. 하지만 이어진 재판에서 1심은 공소시효 만료 등을 이유로 김 전 차관에게 면소 또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별장 성폭행’ 의혹은 공소시효가 만료됨에 따라 아예 유무죄의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 수사’로 진상 규명과 단죄의 시기를 놓친 것이다. 2심 역시 공소시효 만료로 죄를 물을 수 없다며 면소 판결했다.
당시 검찰이 제대로만 수사했다면 진상 규명과 단죄는 당연하게 이뤄졌을 일이었다. 그러나 김 전 차관을 두 차례나 무혐의 처분한 일에 대하여 검찰은 일언반구 자성의 목소리조차 나온 적이 없다. 물론 이 사건과 관련해 책임을 진 검사도 없다. 2020년 10월 임은정 당시 법무부 감찰담당관은 검찰 내부망에 “마땅히 있어야 할 자성의 목소리는 없다. 우리 검찰로서는 할 말이 없는 사건”이라며 비판한 바 있다.
문자 그대로 곡학아세(曲學阿世)이며, 법 희롱이고 농단이었다. 굳이 ‘국민의 법 감정 위반’이니 ‘법의 정의 실종’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굳이 붙일 필요조차 없이 참으로 “눈 가리고 아웅”이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태이다.
검찰 지상주의, 검찰의 시대
왜 하필 검찰 주변에서만 이러한 일들이 자주 빈발하고 있는 것일까? 이 나라 검찰처럼 기소기관이 수사권을 독점하고 동시에 행사하면 필연적으로 권력기관화되어 권한의 남용을 초래하게 된다. 기소권과 수사권이 한 손에 쥐어져 있을 때 서로 견제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인권침해 수사를 비롯하여 강압 수사, 먼지털이식 수사 그리고 선택적 수사가 이루어져도 기소권에 의해 견제되지 않고 대부분 기소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무리한 수사와 기소에 대해 어느 검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검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당사자 역시 오직 검사들이기 때문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기구에 대한 국민의 민주적 통제 기제의 부재는 이른바 ‘87년 체제’가 지닌 가장 큰 허점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2항에 대한 명백한 부정이다.
검찰조직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권력기관이다. 지금 검찰은 법치를 말하면서 독립을 강조하지만, 법치란 결코 법치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민주주의 실현의 유효한 수단으로서의 법치여야 한다. 국가의 기반은 국민이고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검찰 조직을 포함한 모든 권력기구가 존재하는 것이지, 그 권력기구의 독립과 존재를 위하여 민주주의와 법치 그리고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법치가 오직 ‘외부인’들을 향한 것일 뿐 정작 자신들에게는 예외적으로 적용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공정’의 전형인 것으로서 당연히 ‘법치’일 수 없다. 그것은 ‘선택적 법치’요 ‘선택적 공정’이고 ‘억지 법치’, ‘억지 공정’이며, 그러한 ‘법치’란 결국 또 다른 ‘총칼 버전’일 뿐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하여 군사정권에서 권력에 도취한 정치군인이 범람했듯이, 오늘 검찰들의 전성시대에서 이러한 ‘정치검찰’이 범람한다.
검찰권 남용이 특히 심했던 분야가 바로 특수수사 영역이었다. 수사의 착수 여부, 수사의 대상과 범위 설정, 영장 청구, 증거수집 및 평가, 수사 종결 및 기소 대상 결정 등 모든 것이 오로지 검찰의 수중에서만 이루어지는 특수수사는 매우 자의적이고 일체의 외부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 이렇듯 진행되어온 특수수사권의 독점은 그동안 검찰이 정치, 경제, 관료, 언론계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특권화한 검찰의 막강한 힘을 토대로 하여 마침내 검찰 출신의 대통령이 나올 수 있었고, 검찰 출신들이 국가 요직에 임명되었으며 검찰 조직은 국가 운영의 핵심으로 작동되고 있다. “검찰이 곧 법이요 공정이며 정의이다”라는 무한한 엘리트의식과 ‘검사동일체의 상명하복 질서’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검사 자신들은 천상에 ‘우월하게’ 우뚝 군림하고 있는 공정과 정의의 사도인 반면, 지상의 다른 사람들이란 모두 범죄 가능성을 가진 혐의자가 된다. 특히 정치권에 대해서는 그들이 ‘부패와 범법 의혹으로 충만한 집단’으로서 언제든 ‘기소하고 수사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철두철미 검찰 중심의 시각과 사고방식이 관통한다. 하지만 외부인에 대하여 그토록 추상과 같이 적용되는 법의 잣대는 유독 자신들에게만은 거의 모든 경우에 예외가 적용된다. 바야흐로 검찰지상주의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는 ‘검찰공화국’, ‘검찰의 시대’이다.
수사권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기소권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는 검찰은 어떠한 사건도 언제든지 ‘문제화’시킬 수 있다. 또 어떻게 수사하고 기소하든 혹은 특정 사안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아예 하지 않든 오로지 그들의 ‘선택’에 달려 있게 된다. 자신들 이외에 다른 어떠한 세력이 수사하고 기소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위험한 상황이다. 필연적으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집단이 정치세력화하게 되면 그 위험성은 가장 엄중할 수밖에 없다.
7천 명이 넘는 검찰수사단,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미국 형사소송법은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를 규정하고 있다. 수사에 대한 대부분 권한은 경찰이 보유하며, 검사는 기소 여부 결정과 공소 유지를 담당한다. 다만 경찰도 각종 영장을 직접 청구할 수 있고 검찰도 조직범죄와 같은 특수범죄에서는 직접 수사가 가능하다. 이 경우 검찰과 경찰의 협력으로 진행된다. 제한적인 수사 인력만을 보유하고 있는 검찰은 경찰의 협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검찰은 수사 단계부터 사법경찰관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적법한 수사방법이 사용되고 중요한 증거가 적법하게 수집되어 성공적인 기소가 될 수 있도록 담보하는 역할을 한다. 법적 자문과 수색영장 발부를 통하여 경찰의 수사를 돕는 역할이다. 경찰 수사에 대한 검찰의 지휘 권한은 없다.
미국 각 주(州)의 법률은 수사를 경찰의 권한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검찰의 수사권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경제범죄, 조직범죄, 마약범죄, 환경범죄, 공직자부패범죄 등 대형사건이나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중요 사건의 경우 검사가 초동단계부터 관여해 경찰을 지휘하면서 수사를 진행한다. 다만 미국에서 검찰과 경찰은 지휘와 복종관계가 아니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업무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행사한다. 수사권을 분산해 경찰의 권한 집중도 막고 있다. 법무부 소속의 연방수사국(FBI), 주 경찰, 지방경찰, 이민국(INS), 마약단속국(DEA), 국경순찰대 등 50여 개 기관이 수사권을 분담하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이러한 수사권 분산 방식은 검찰 개혁, 특히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7천 명에 이르는 검찰 조직의 수사 인력을(2012년 9월 21일 기준 검사 이외의 총정원은 7941명) 어떻게 분산할 수 있는가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영국 웨일스의 검찰은 기본적으로 수사지휘권을 갖고 있지 않고, 수사는 원칙적으로 경찰이 담당한다. 다만 검사는 경찰에 의한 체포, 압수 등 수사에 대한 적법성 심사와 소추 결정을 통해 사건을 반려할 권한이 있다. 또 이런 기각결정권에 기반해 경찰에 대해 보완조사나 자료 추가제출 등을 요구할 수 있다.
영국의 중대범죄수사청(SFO)은 우리나라 공수처의 모델로 알려져있다. 1988년에 중요하고 복잡한 경제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SFO는 지역경찰만으로는 광범위하고 거대한 경제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미흡하다는 반성에 따라 검찰총장의 감독하에 독립된 기구로 조직됐고, 특정 경제범죄에 대해 수사와 기소권을 갖고 있다.
독일에서의 수사의 주체는 검사라는 규정이 독일 형사소송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검찰처럼 검찰을 돕는 ‘수사관’이 없다. 검찰청에 인적 자원을 배분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사는 검찰의 법적 지휘를 받는 사법 경찰관이 수행한다. 즉, 법적으로는 검찰이 수사와 기소를 독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어 있다. 검찰이 직접 수사에 관여하는 경우는 정치, 경제, 조직범죄, 마약범죄 등 중요 사건의 경우 ‘중점 검찰청’을 지정해 수사와 기소를 동시에 한다.
프랑스에는 ‘수사 판사’라는 제도가 있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한 검찰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이다. ‘수사 판사’란 ‘검사의 역할을 하는 판사’로서 수사법원 소속이다. 수사 판사는 프랑스 형사소송법상 중범죄로 판단되는 사건의 수사를 담당한다. 검사가 수사를 요청했을 때도 수사 판사가 나선다. 사법경찰을 직접 지휘하여 수사를 진행하며, 재판부에 영장을 자유롭게 청구할 수 있다. 일반적인 범죄 수사의 경우, 검사가 경찰을 지휘한다. 다만, 검사나 수사 판사는 규모가 작아 경찰에 수사를 요청해야 한다. 인적 자원의 불균등한 분배를 통해 막강한 권한을 견제하는 방식이다.
일본에서 검찰과 경찰은 원칙적으로 상호 대등한 협력관계이고,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지휘감독 관계다. 경찰이 초동수사 등을 하면서 1차 수사기관으로 역할을 하고, 검찰이 2차적 수사기관의 역할을 한다.
사실 경찰과 검찰로 완벽하게 수사와 기소가 분리된 나라는 세계적으로 호주와 이스라엘 두 나라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검찰이 보유한 수사권의 권한과 범위는 다른 나라와 상이하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7천 명이 넘는 수사관이 검찰청마다 배치되어 사실상 경찰관처럼 검사들을 보조하는 활동을 한다. 세계에 이런 나라는 달리 없다. 특히 이러한 조건에서 국민들은 검찰과 경찰 두 곳에서 ‘이중 수사’를 받는 상황이 된다. 재판에서 일사부재리 원칙이 적용되는 것처럼 수사 역시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더구나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2022년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피고인이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능력을 인정받아 자백 강요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초래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검찰처럼 필요에 따라 범죄 정보를 수집하고, 현장에 나가 압수수색도 하는 권한은 대부분의 외국 검찰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한 가지 덧붙일 점은 우리 사회에서 ‘검찰의 구형’이라는 행위가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검사의 구형’이란 형사 재판에서 피고인 조사를 마친 후 검사가 재판부에 “이 사람을 이 정도의 형량으로 처벌해달라”라는 의견 개진의 행위를 지칭하며, 법적으로 정의된 개념은 아니다. 즉, 검사 측의 ‘의견 피력’일 뿐 법적 실체나 구속력이 있는 절차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검사의 구형이 오랜 기간 일종의 검언유착 관계에 의해 언론에 언제나 커다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마치 확정판결인양 보도되면서 “판사의 선고에 준하는 법적 판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필연적으로 검사의 기소와 구형만으로 피의자는 ‘범죄자’로 확정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이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도 명백히 위반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우리 사회에서 검찰이 지닌 막강한 힘의 반영이며, 역으로 이렇듯 ‘검사 구형’이 강조되는 사회 분위기 자체가 다시 검찰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