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계열사 간 편법 채무보증에 눈 감은 공정위
금융상품거래 위장한 계열사 채무보증 '고개'
공정거래법상 ‘탈법행위’ 규정 적용 가능한데
공정위는 “현행법으로 규율하기 어렵다”
그냥 두면 자금시장 교란, 공정경쟁 해쳐
공정거래위원회가 금융상품 등을 통한 대기업집단의 편법 채무보증에 눈을 감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제개혁연대는 19일 ‘총수익스와프(TRS·Total Return Swap) 거래를 통한 편법적 채무보증 관련 공정위 해석의 문제점’이라는 제목의 자료를 내놓았다. 요지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한 대기업이 파생금융상품인 TRS를 활용해 부실 계열사의 채무를 우회해 보증하는 데도 공정위가 이를 위법으로 판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2018년 4월 공정위가 발표한 효성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행위 제재 건을 살펴봐야 한다.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은 사실상 개인 회사인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GE)의 경영난 해소를 위해 계열사를 동원해 부당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TRS 거래를 활용한 편법적 채무보증 행위가 있었다.
TRS는 거래 당사자가 계약 기간 내에 채권 등 기초자산 거래에서 발생하는 총수익을 서로 교환하는 파생상품이다. 예컨대 대기업의 한 계열사가 전환사채(CB)나 교환사채(EB)를 발행해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차입할 때 이 채권을 기초로 다른 계열사가 금융기관과 TRS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원리금에 비해 해당 채권 가격이 하락하면 TRS 계약을 맺은 계열사가 채권을 발행한 부실 계열사 대신 차액을 정산해준다. 결과적으로 계열사 간 채무보증과 유사한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효성 그룹 일가도 바로 이런 TRS 거래 구조를 활용했다. 특수목적회사(SPC)는 GE가 발행한 전환사채(CB)를 인수하고 다른 계열사인 효성투자개발(HID)이 해당 SPC와 TRS 계약을 맺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효성투자개발은 SPC에 투자금과 약정 이자를 보장하고 전환사채 가격 변동에 따른 이익과 손실을 떠안았다.
당시 공정위는 효성투자개발과 SPC 간의 TRS 거래를 이용해 부실 계열사인 GE를 부당 지원한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효성과 효성투자개발, GE에 총 3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조현준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효성 측은 공정위 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조 회장도 형사재판에서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문제는 공정위가 효성이 TRS 거래를 통해 부실 계열사에 사실상 무상 지급보증을 제공한 것으로 판단했으면서도 사익 편취와 부당 지원행위로만 제재하고 정작 공정거래법에 명시된 채무보증 금지 위반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대기업이 편법으로 계열사 간 채무보증을 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정해 준 셈이 됐다.
공정위가 금융상품 등을 통한 대기업의 계열사 간 우회 채무보증 실태를 조사한 결과 2018년부터 5년간 18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서 54건의 TRS 계약이 있었다. 이중 계열사 간 거래는 20건으로 거래액은 3조5000억 원에 달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정위에 20건에 대한 채무보증 여부를 질의한 결과 8건이 채무보증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공정위는 8건 모두 공정거래법상 채무보증 금지 조항을 위반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 근거로 국내 금융회사가 SPC에 대출하고 SPC가 채권을 인수한다면 채무보증 규제를 받지 않고, 계열사가 직접 보증한 것이 아니면 채무보증 제한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현행 공정거래법으로는 규율하기 어렵고 법제화가 필요한 사항”이라며 공을 국회에 넘겼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공정거래법을 너무 소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채무보증 금지 규제의 회피를 목적으로 TRS 등 금융상품을 활용했다면 현행 공정거래법에 명시된 '탈법행위'로 얼마든지 제재할 수 있는 이야기다.
공정거래법에서 대기업집단에 속한 계열사의 채무보증을 금지한 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다. 경쟁력 없는 계열사가 총수 지분이 많다는 이유로 다른 계열사의 채무보증을 통해 차입할 수 있게 되면 자금시장을 교란하고 일반 기업과의 경쟁이 저해될 수 있다. 계열사 간 채무보증으로 발생한 부실은 해당 대기업집단을 넘어 금융기관 부실로 전염될 수 있어 국가 경제 전체에도 부정적이다. 대기업들의 무분별한 채무보증은 외환위기를 촉발한 원인 중 하나였다.
공정위가 금융상품 거래 등을 통한 우회적 채무보증을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는다면 대기업의 편법 행위를 부추기는 꼴이 된다. 김우찬 경제개혁연구소장은 “공정위는 현행 규정을 충분히 활용해 TRS 등 파생금융상품을 이용한 편법적인 채무보증 행위에 대해 엄정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경제개혁연대는 국회 김성주 의원 등과 합리적인 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