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위기 30년] 미국 이제 해답 내놓을 때다
절대원칙 한반도 평화, 대화 통해 해결해야
북한 핵미사일 도발, 한미 연합훈련 악순환
제네바합의·페리프로세스, 네오콘이 파기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 선고 받은 9·19합의
헤커 박사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는 재앙"
북핵 위기가 본격화된 지 꼭 30년이 됐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년 12월)을 채택한 지 1년여 지난 때였다.
이른바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그리곤 긴 세월이 흘렀다.
당시 '북핵 게임'의 주역이었던 김일성(북한) 빌 클린턴(미국) 김영삼(한국) 세 정상이 수많은 인물을 거쳐 지금은 김정은, 조 바이든, 윤석열로 각각 바뀌었다. 북한은 세 번째 정권이고, 미국은 다섯 정권째, 한국은 일곱 정권째를 맞이했다.
지난 세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유 등 북한의 핵 능력만 고도화된 채 북핵 문제는 난제로 남아 있다. 비핵화에 실패한 것이다. 옛시조 가락처럼 '북핵은 의구하되(옛날 그대로이되) 인걸은 간 데 없는' 격이다.
1차 북핵 위기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로 해소
'1차 북핵 위기'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Agreed Framework)로 해소된다. 그 골자는 북한과 미국이 영변 핵시설 동결과 경수로 2기 제공을 맞바꾸는 내용이다. 북한은 또 NPT 탈퇴를 유보하고 IAEA 사찰을 받기로 약속했다.
미국은 한때 '영변 폭격'을 검토했다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돌연 사망(1994년 7월)하면서 기대를 모았던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됐다.
비상령이 발동되고 한반도에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그런 악조건에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타결을 극적으로 도출해낸 것이다.
순항하던 제네바 합의 체제는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과 대북 경수로 공사 지연, 중유공급 중단 등이 맞물려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내걸고 북·미 중재자 역할을 능숙하게 해내면서 정세는 전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분단 이후 한국의 국가원수론 처음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남북 화해 분위기는 북·미 간으로 확산됐고, 클린턴 임기 말인 2000년 12월에는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이 이뤄졌다. 북·미 수교까지 상정한 '북·미 공동 코뮤니케'가 발표될 만큼 순풍을 타는 듯했다.
부시와 네오콘, 급속한 남북 화해 흐름 제동
2001년 1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대북 정책은 초강경파인 이른바 '네오콘'이 좌지우지했다.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존 볼턴 국무부 군축·국제안보 차관이 대표적 인물이다.
'ABC'(클린턴 것은 모두 부정)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은 클린턴의 최대 외교 치적 중 하나인 제네바 합의 자체에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압박과 제재보단 외교협상을 통해 '단계별 동시 행동'으로 해결하자는 '페리 프로세스'(1999년 10월 발표)를 한국 정부와 별다른 협의도 없이 폐기했다.
탄력이 붙는 남북 화해·협력 흐름도 네오콘에겐 못마땅했다. 남북군사회담을 통해 DMZ(비무장지대) 지뢰 제거 작업이 이뤄지고 남북 간 경의선과 동해선 육로가 뚫리고 그 길로 이산가족을 비롯해 많은 주민이 남북을 오갔다. 2002년 9월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까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네오콘으로선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특사 방북을 통해 제동을 걸었다. 켈리 특사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첩보를 토대로 북한에 고농축우라늄(HEU) 개발 의혹을 제기했다. 부시 행정부는 급기야 클린턴의 최대 외교적 성취인 제네바 합의를 파기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북한도 합의 파기를 선언하고 핵동결을 해제한 데 이어 2003년 1월 10일 NPT 탈퇴를 재선언했다. '제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북한은 20년이 흐른 지금까지 NPT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훗날 볼턴은 제네바 합의에 "쐐기"를 박고자 했던 "매우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태어나기도 전 사망선고 받은 9·19 공동성명
북핵 위기는 다시 고조됐다. 북한은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친 재처리를 통해 상당량의 플루토늄을 확보했으며, 2005년 2월에는 핵무기 보유 선언을 했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한 6자회담을 주도했고 마침내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끌어냈다.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신, 체제 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해준다는 게 그 골자다.
문제는 6개국이 9·19 공동성명을 발표하기 나흘 전 부시 정부가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해 북한의 계좌를 동결한 대목이다. 9·19 공동성명은 빛을 보기도 전에 사망 선고를 받은 셈이다.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첫 회담을 시작해 6개국이 2년여 심혈을 쏟은 끝에 만들어낸 작품은 결국 폐기됐다.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북핵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최근 발간한 '힌지 포인트'(Hinge Points·결정적 순간)에서 부시 행정부가 서명 직후 바로 합의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당시를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던 2002년 10월에 이어 두 번째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1년 후인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첫 핵실험을 단행했다. '제3차 북핵 위기'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북핵 능력은 더 축적되고 해결은 더 어려워지게 됐다.
북핵시설 불능화, 북 테러지원국 해제 맞교환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데 대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북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북한을 설득해 그해 12월 6자회담을 재개하게 된다. 네오콘들이 빠진 부시 2기 행정부의 분위기가 반영됐다.
이듬해인 2007년 들어서 9·19 공동성명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담은 '2·13 합의'와 '10·3 합의' 도출에 성공한다. 미국은 2008년 북한을 적성국교역법 상의 제재를 철회하고 테러지원국 명단서 제외했으며, 북한은 원자로 냉각탑 폭파를 포함해 영변 핵단지 내 주요 핵시설에 대한 불능화 조치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2009년 들어서면서 풍향은 다시 바뀌었다. 불능화 조치에 대한 의견 차이가 생기면서 6자회담 개점휴업 상태는 이어졌고, 마침내 2009년 북한은 불능화가 진행되던 핵시설을 재가동하고 그해 5월 2차 핵실험을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 이후 약 3년간은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천안함 침몰(2010년 3월 26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 2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2011년 12월 17일) 등 충격적인 사건들이 터졌다. 남북 간, 북미 간 의미 있는 협상은 기대할 수 없었다.
김정은 정권은 출범 직후인 2012년 2월 29일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윤일(閏日) 합의'를 이뤘다. 규정 해석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오래가지 못했다. 상호 불신이 문제였다. 한달후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계기로 북·미는 각기 제 갈길을 갔다. 그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존재감은 찾을 수 없었다. '제4차 북핵 위기'의 시작이다.
4차 북핵 위기와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이때부터 오바마의 미국은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구사하며 북한이 뭘 하든 외면한 채, 이란과의 핵협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헤커 박사는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 정책을 "재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북한을 말그대로 방치하면서2017~2018년 북한 핵능력 고도화의 씨앗을 뿌렸다는 판단에서다.
이 기간에 북한도 경제·핵무력 건설 병진 노선을 내걸고 '마이웨이'를 외쳤다. 핵탄두의 폭발력 증대, 미사일 탑재, 대량생산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박차를 가했다. 국제사회의 규탄과 제재에도 추가 핵실험을 감행했다.
2013년 2월(3차), 2016년 1월(4차)과 9월(5차), 2017년 9월(6차) 등으로 이어졌다.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위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루토늄 탄 뿐만 아니라, 우라늄 탄 개발도 상당 수준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3년 3월 현재 북한은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를 위한 7차 핵실험을 준비 중이다. IAEA의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은 6일 빈에서 열린 정기이사회에서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내 3번 갱도 근처에서 활동 징후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정은 정권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지 5년이 넘었다.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을 단행한 지 약 3개월만인 11월 29일 ICBM급 화성-15형을 발사한 직후였다. 그 당시도 한반도는 전쟁 전야 같은 상황이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를 말하며 대북 선제타격을 공언할 정도였다.
끝내는 좌절됐지만, 극적인 반전이 있었다, 당시 문재인 정부가 북·미 양국 설득에 성공한 것이다. 2018년 2월 북한 고위급대표단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관이 그 전기가 됐다. 다시 한반도에 봄이 오는 듯했다. 문재인-김정은 간의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트럼프-김정은 간의 두 차례 북미정상회담이 숨가쁘게 진행됐다.
백미는 2018년 9월 9일 남북 정상의 '평양공동선언'이었다. 핵무기와 핵 위협이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과 ICBM 모라토리엄(유예)을 선언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지난해 1월 북한은 모라토리엄 파기를 내비치기 시작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문 정부가 약속했던 개성공단 재개 등의 조치도 미국 눈치를 보며 결단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으로 풀이됐다.
북한, 핵무력법령에 '선제공격 가능성' 명시
그다음부터는 좌고우면이 없었다. 김 국무위원장은 작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창설 90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에서 핵무기 사용 범위를 "전쟁에만 제한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마침내는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선제공격 가능성을 명시한 '핵무력 법령'의 채택을 공표했다. 그는 "절대로 먼저 핵포기란, 비핵화란 없으며 그를 위한 어떤 협상도, 그 공정에서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말해 당분간 대화와 협상은 거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작년 5월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윤-바이든 한미 정상회담(서울) 개최 이후 북한의 '호전성'이 더 한층 두드러지고 있다. 일례로 북한은 한미, 한일 정상회담을 마친 바이든의 귀국길에 ICBM 등 3발의 미사일을 쐈다. 자극적 도발이 아닐 수 없다.
뒤이어 6월 초 핵추진 항공모함을 동원한 한미 해군 연합훈련에 반발해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8발을 동시에 발사하기도 했다. 작년 한 해 동안 ICBM 8번을 포함해 탄도미사일은 66차례 발사했다. 전례 없는 빈도와 강도다.
당연히 남북 간, 북미 간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 2.0' 버전을 내걸고 북한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국가역량을 인도·태평양 전략에 따라 중국 봉쇄를 위한 포위망 구축에 쏟아붓고 있다.
북한 미사일 발사, 한미 연합훈련 악순환
올해 들어서도 정세는 악화일로다. 북한은 남한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하고 유사시 서울도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을 가하는 한편, 새해 벽두에 초대형 방사포 발사를 시작으로 2월 18일 ICBM 화성-15형 발사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다.
한·미, 한·미·일 3국의 연합군사훈련의 빈도와 강도도 유례가 없을 정도다. 올해만도 B-1B와 F-22, F-35B, B52-H 등 미 핵심 전략자산을 동원한 한미 연합공중훈련이 네 차례나 진행됐다. 2월 1일과 3일, 19일에 이어 3월 6일이다.
또한 한·미·일 3국 해상전력은 지난달 22일 독도 인근 동해상에서 2차 미사일 방어 훈련을 벌였다. 프놈펜 한·미·일 정상회담(2022년 11월 13일) 이후 3국의 결속력을 급속히 강화하고 있다. 3자 동맹을 목표로 한 행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13일부터 한·미 양국은 연합연습인 '자유의 방패'(프리덤실드) 훈련에 돌입하고, 북한도 정면 대응을 예고하고 있어 우발적 충돌로 번질 우려도 적지 않다.
절대 원칙은 '한반도 평화'…미국이 해답 내놔야
고민은 '강 대 강'으로 치닫는 현 한반도 상황을 통제할 세력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의 지속적인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국제사회의 외교적 노력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미국 등 서구진영이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려 해도 거부권을 지닌 중국과 러시아가 협조하지 않아 속만 끓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북한에 설득할 능력과 책임이 있는데도, 북핵 문제를 방치하면서 북한의 무모함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최근 들어 미 전략자산의 잇단 서해 전개 등을 통해 중국을 압박하기도 하지만 중국은 아직 버티고 있다.
냉정히 보면 '키'를 쥔 미국의 전략은 '양립 불가능'하다. 한편으론 중국의 협조를 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동맹국들과 대중 포위망 구축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핵 문제는 20년 전 6자회담 때보다 해결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한·미 양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어서다. 한국 내에서 핵무장론까지 불거지는 등 북핵 문제의 심각성은 더 커지고 있다.
한반도 전쟁 위기 고조…그래서 다시 '반전과 평화'
당장은 누구도 고도화하는 북핵 문제와 격화되는 한반도 정세를 돌릴 방안을 제시하기 어렵다. 그러나, 가야 할 방향과 원칙은 분명하다. 한반도에 다신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북핵 문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 공동성명의 정신으로 돌아가면 된다.
북한은 즉각 핵동결과 함께 더 이상의 미사일 발사는 중단해야 한다. 특히 7차 핵실험은 금물이다. 미국도 당장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미 연합훈련은 불가피하게 진행하더라도 가급적 규모를 축소하고, 추가적 훈련은 중지할 필요가 있다.
북핵 해법과 관련해 미국은 무장해제로 보이는 선(先) 비핵화로 북한을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안보 우려를 인정하고 비핵화 단계에 상응해 제재 완화와 경제협력 등의 조치를 하는 게 현실적이다. 어렵게 합의해 놓고 이런저런 명분으로 합의를 깬 쪽은 대부분 미국이었다. 미국이 달라져야 한다. 해답을 내놓을 때다.
한반도는 지금 전쟁 전야와 같은 위태로운 국면에 처해 있다. 한반도 평화를 지키는 일을 위정자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다. 남북한의 주민을 비롯해 세계시민들이 나서서 위정자들에게 촉구해야 한다. "전쟁 아닌 평화를 달라!"라고.